4. 믿음의 시련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 1:1)


야고보서를 쓴 사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 야보고입니다. 그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은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물질적인 어려움과 핍박 등 많은 시련을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2)


시험을 기쁘게 여긴다는 것은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역설적인 말씀도 많습니다. 사람의 생활 속에는 여러 모양의 시험이 있는데, 위의 말씀은 시험을 환영하라든지 억지로 만들어서 당해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은 없으며 또한 그 자체를 기뻐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시험을 잘 치루고 난뒤에 오는 유익이, 시험 없이 무사한 것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의 결과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결과가 올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아주 비참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좋은 결과를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없다면 시험을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시험을 당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근거가 3절에 나타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물론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옵니다(13절 참조). 그러나 시험으로 인한 믿음의 시련이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지 믿음의 시련을 이루며 그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가 길러지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4)


바로 이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그 끝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인내는 그냥 참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참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육신적인 생각이 정리되어 갑니다. 인간 본래의 조잡한 인격을 순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은 믿음을 시련해 가는데, 그 믿음의 시련을 참고 견디어 가는 중에 인간적인 생각이 죽어 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힘이 길러지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성이 갖춰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그리스도인의 덕성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얻는 행복이나 축복은 물질적인 데서 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떼를 쓰고 구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축복은 모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도록 되어 있어요. 

어떤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참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 자질, 덕성이 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구원을 받았으나 육신의 냄새를 그대로 풍기는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는 것이지요. 조그마한 시험이 와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길러가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세계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식을 여러 명 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돈만 주면 낭비해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식에게 부모가 무엇을 맡기겠습니까? 돈도 쓸 줄 알고 어떤 일을 시키면 잘 처리해 내는 자식에게 일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비록 많은 학문과 지식이 있고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맡길 만한 때에 일을 맡기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역전 경주를 한다고 합시다. 수원쯤 와서 "아이구, 이제는 더 못가겠다" 고 하면서 넘어져 버리면 차라리 오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견디려면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교회가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은 교회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마음에도 시험이 옵니다. 그러므로 결국 교회의 문제는 개인 심령의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 그 문제에 부딪치므로 같은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 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사람은 그 다음에 오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형편에 놓일 것이고, 자기 육신의 생각대로 행동해 버리는 사람은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시험은 자신을 연마시키고 훈련시키며 육신의 생각을 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까이 가는 기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문제를 겪을 때 교회가 어떻게 될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교회는 여러분 자신이나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교회보다는 자기 자신이 문제입니다. 자칫 잘못 하면 자기 자신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중에 육신의 생각이 꺾여 버린다면 한 발자국 하나님 앞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 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여기서 갑자기 지혜를 들고 나옵니다. 이 말씀은 얼핏 생각하면 앞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말씀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어떤 문제나 시험이 올 때에 그 배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 시험을 빛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눈, 그것이 지혜입니다. 시험으로 인한 어려움, 거기에만 눈이 어두워서 그것에 완전히 지배를 받아 버리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절망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두 제자의 마음도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옆에 와도 몰라봤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나중에 떡을 떼어 주는 순간에 마음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지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때야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경우,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 즉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은 그 문제에 빠져서 맥을 못 추는 상태에 들어 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 앞에서도 믿음을 가지며,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참겠습니까?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고 말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시험 속에 빠져서 꼼짝도 못하고 완전히 비참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차원에서나 개인의 차원에서나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는 참으로 자기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혈기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그리고 그 문제를 통해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기를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야고보서 1:6)


의심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베드로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겁이 나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시커먼 것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령인 줄 알았는데, "내니 두려워 말라" 는 반가운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 성급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 14 : 28)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오라" 는 말씀이 떨어지기 바쁘게 물로 들어갔습니다. 몇 발자국 가다 보니 큰 파도가 하나 앞으로 오면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파도가 예수님을 가려 버렸던 것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 갔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 일어나고 있는 파도가 아무리 높고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파도 너머에 있는 주님, 큰 바람 너머에 있는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일, 곤고한 일을 당할지라도 이 어려운 일 때문에 내가 몰락하거나 망하지 않으며 이 모든 일 속에 주님의 손길이 나타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6-8)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선을 원하는 마음,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과 또 한 다른 법, 즉 죄의 법이 있습니다. 그 두 마음이 속에 있어서 한 발은 세상에 있고 한 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6-17)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도 한편에 있습니다. 그 두 생각이 내 마음에 있는 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이 하나님의 인도로 해결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도 거기에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서 그것이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박력있는 신앙 생활을 못합니다. 항상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망설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약속하셨어. 하지만 이 일은 너무나 어려워. 내가 이렇게 구하지만 주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실까?' 앞에 있는 파도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기도도 주님과 관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 3)


내 앞에 놓여 있는 환난의 산봉우리가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마음에 참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받은 줄로 믿는 것' 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하던 문제에 대해 마음에 완전히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평안이 오기 전에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눈으로 본 일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 사실이 마음에 믿어졌을 때 마음이 완전히 평안해져 버렸지 않았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주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29-31)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 교회의 문제, 내가 당하는 작은 문제까지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어떤 자매님은 속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서 위경으로 위속을 살펴보았답니다. 그때 '과학자도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발명했구나. 하물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 하시겠나'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때 모든 염려가 끝나 버렸답니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란 걸 어느 날 마음에 안다면 모든 염려를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6-7)


금을 불에 계속 달구면 불순물은 다 제거되고 순금만 남습니다. 그러나 그 순금도 어느 시점에 가면 없어집니다. 하지만 시련을 통해서 단련된 믿음은 없어지지 않고 장차 굉장한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야고보서 1:9-11)


사람이 받는 시험을 얘기하면서 여기서는 그 중에 대표적인 세상 물질을 들었습니다. 

부한 것도 시험이 될 수 있고 가난한 것도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낮은 형제' 라고 말했어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굉장한 역설입니다. 낮은 형제는 비록 돈이나 세상적인 지위는 없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 위치가 높기 때문에 높아진 겁니다. 부자는 구원을 받고 보니 영적으로는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는 낮은 형제들과 평등하게 되었으니 그 평등한 자리를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물질에 치중하거나 가치관을 물질에 두지 말고 영혼의 현실에 두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누구나 부요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요해져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부요는 물질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이나 자질을 갖추어 가고 시련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 부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육신적인 눈으로 보는 외형적인 부요만 알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말이나 행동이 비인격적이고, 비양심적이어서 내키는 대로 막 산다면 이는 참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부의 가치를 성경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 앞에 좀 더 떳떳하게 사는 것에 둔다면, 물질의 많고 적음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그는 매맞고 가난할 때도 낙담하지 않았고 돈이 많이 생겼을 때도 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은 굉장히 부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부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난 앞에서나 어떤 문제 앞에서나 그것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물질이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말라져 버리는 풀의 꽃과 같다는 사실을 좀 실감했을 것입니다. 피난 올 때는 빈손으로 왔을 테니 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참아 내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험을 참다는 말은 이를 악물고 '참자, 참자,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는 그 자체에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참는 과정에 품격이 자라나고 육신의 생각이 죽어가며 성령의 생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것이 유익하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내가 우리 개개인을 연마하고 단련시켜 갑니다. 그러므로 인내할 줄도 모르고 인내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도, 또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했는데, 생명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 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야고보서 1:13-14)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오는 핍박, 물질 문제, 인간 관계 등에서 여러가지 시험이 옵니다. 그 시험은 반드시 죄나 마귀로부터 옵니다, 아담과 하와를 시험한 것도 마귀입니다. 또 그 마귀가 늙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시험했지 않습니까? 아담이 받은 시험이나 예수님이 받은 시험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이겼습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그 시험을 이기시지 않으셨으면 아담의 실패를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보기에 십자가는 마귀의 승리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의 결정타였습니다. 마귀의 운명을 완전히 꺾어 버린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승리한 그 진리가 사람들을 구원해 나가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마귀를 완전히 잡아 가두어 버리면 예수님이 통치하는 세계가 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마귀와 그 시험을 받는 대상자의 사이에 이루어져 가는 하나의 역사입니다. 아담 부부에게 있었던 그 마귀의 시험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역시 계속적으로 옵니다. 문제는 그 시험을 어떻게 참아가며 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께 완전히 드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육신이 희생을 당하는 그 과정에서 시험을 이기고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완전히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다시 한 번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말 속에는 내 육신의 생각이 꺾어지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평 없고 원망 없는 그 기점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뭡니까? 우리는 자칫 생명의 면류관을 나중에 하늘 나라에 가서 머리에 덮어쓰는 것인 줄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에 덮어쓰는 어떤 관이 아닐 뿐더러 그 생명의 면류관은 현재의 생활 속에도 있습니다. 

가령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시험이 오면 내 마음 속에 죄를 만들어내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어떤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때 마음의 유혹대로 일을 처리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해 버리면 그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을 대했을 경우,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약점을 가진 약한 자이니 사람을 믿을 것 없다. 저 사람의 행동, 저것은 분명히 나쁘다 그러나 내 속에도 저런 불의가 있지 않느냐? 그렇다, 저 사람의 옳지 않은 것이 내 속에도 있고 또 저 사람이 잘했든 잘못했든 내가 저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저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이고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냐,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고 네가 잘못을 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꾸중하지지 않았느냐? 그리고 바울은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 육신이나 네 육신이나 육신은 다 똑같으며 다 쓸모없는 것이다' 라는 방향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로 내 육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는 것이며 내 속에 있는 정욕을 처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시험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내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는 내게 올 수 있는 생명의 면류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놓고 육신이 살아 버리면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뭐 저래, 기분 나쁘게' 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서 차츰 분함에 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두움이 생겨 버리면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어도 소용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그 문제를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는다' 는 말 속에는 내 육신의 생각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의 방법입니다. 



음녀

시험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야고보서 1:14)


외부의 어떤 사건이 자기의 내적인 시험으로 변해 버림을 말합니다. 무슨 문제든 다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 하나가 생기면 그 외부적인 문제에서 끝이 나야 되는데 자기 속의 욕심 때문에 그것이 연장되어서 자기 속의 문제로 등장되는 것입니다. 

시험은 반드시 두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사건과, 그것이 자기의 욕심, 곧 정욕과 연결되어 내적으로 문제에 걸리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문제가 자기의 욕심과 연결되어 내부적인 문제로 대두될 위험은 항상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 잠언 7장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짐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잠언 7:1-27)


물론 잠언 7장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 속의 정욕이 바로 음녀입니다. 그래서 이 야고보서 4장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올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경우 속에서 유혹의 소리가 있습니다. 정욕이 온갖 말로 나를 유혹하는 것 입니다. 

잠언 7장에 보면 음녀가 한 젊은이에게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부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호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16-18) 고 하면서 음부로 내려가는 길로 이끌어 갑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외부적인 문제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마음의 문제로까지 받아들여 그것 때문에 걸려서 실패하고 망하도록 만드는 것은 자기 속의 음녀 곧 정욕 때문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여기서 '사망' 이라는 것은 육신이 직접 죽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 거룩한 것 깨끗한 것, 소망있는 것 등 새로운 생명의 요소인 모든 것이 다 떠나 버린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 생활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야고보서 1:16) 


하나님께 시험받는 것으로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시험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원수편에 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형제 자매들도 보기 싫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속은 것입니다. 자기 정욕에 미혹되어서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하나님은 나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 무엇이든지 좋은 것만 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에서는 좋은 것만 오는데 음녀가 우리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혼자서 고상한 외로움에 젖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센치해지는 것은 육신의 음녀와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신앙 생활은 힘이 빠지고 죽어 갑니다. 그래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향기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역사적으로 첫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신 이유는 다른 알곡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함께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외부적으로 어떤 시험이 올 때 거기에 유혹되지 않으면 내 속에서 생명이 역사합니다. 그 생명은 다음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첫 열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딪힌 시험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정욕의 유혹을 받아 자신이 죽어버리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망의 영향을 줍니다. 자기 마음이 불편하니까 옆의 사람 보고 이러쿵 저러쿵 흉을 본다든지 계속 불평을 털어놓으면 그 사람에게도 죽음을 전염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을 만났을 때에 참는 가운데서 자신을 희생시키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생명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열매를 맺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어려움당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고 마음에 불만 있는 사람에게 자기가 문제를 처리한 간증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깨달은 말씀을 전해서, 그로 하여금 자기가 정욕에 의해서 유혹되어 의로우시며 각양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사실과 잘못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사람은 그런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10-12)


우리 매일 매일의 신앙 생활 속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진리 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매일 같이 우리가 우리 육신의 삶, 육신의 생각이 죽는 경험을 할 때에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