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브라함과 롯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점

창세기 13장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이라는 사람의 얘기입니다. 

롯이 구원받은 사건에 대해 자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으니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선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대로만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13:1-4)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지명이 나올때 지도를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그 성경이 머리에 남습니다. 또 성경 읽다가 중요한 성경 구절, 자기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외어 버리든지 아니면 적으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트에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가나안에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계속 아브라함을 따라다녔습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기생 식물처럼 붙어서 사는 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는 말은 "하나님" , "주님" 하고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보다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자기의 생명으로, 자기 생애의 전부로,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 섬기게 됨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버릇처럼 부르는 그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는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5-9)


여기에 어떤 결정의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한 곳에 같이 있어도 사실은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롯도 틀림없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허나 그는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고 살기에 곤란할 때, 먹을 것이 많은 애굽 땅으로 가자고 롯이 아브라함을 유혹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가 가는 길에 거침이 됩니다. 강력한 육신의 주장으로 애굽으로 가자고, 세상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영향력을 미치는 일들이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광야로 나왔을 때 그 중에는 섞여 사는 무리가 있었어요. 섞여사는 무리는 부모 중의 한 쪽만이 이스라엘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과 사업적으로 결탁되었다든지 기타 어떤 인연으로 떨어질 수 없어서 같이 광야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섞여 사는 무리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지 않은 폐를 끼쳤습니다. 때로는 들고 일어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도 전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롯도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않고 사는 사람었습니다. 창세기 19 장에 가면 천사가 나타나서 롯의 손을 끌고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끌어내는 사건이 있지만 평소에는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적이 없었어요. 이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오늘날의 롯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구원을 받고 나서 성경 말씀에서 어떤 사실이 깨달아지거나 문제가 풀려진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좀 충실하게 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음으로써 답을 얻듯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떤 답을 얻어 가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지 않습니까?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뜨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5-71)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으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성경 말씀이 우리가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즈음에 그 고통의 원인을 알게 해 주시고 또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배우게 되며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물론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가운데 비록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는 못해도 자기의 올바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돌이키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롯이라는 사람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의 반열에 참여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러한 마음이 없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각자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육과 영의 부조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베드로후서 2:6-8)


롯은 소돔성 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성 사람들과 같은 죄를 짓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파렴치한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심령이 상할 정도로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롯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아브라함과는 함께 지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싸움이 생겼어요.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성경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분이시고 교회도 하나라고 했습니다(엡 4 : 5). 구원 받은 사람은 원칙적으로 한 머리되신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의 차이 때문에 나누어져야 했습니다. 

목자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가르침을 좇고 그 인도를 받는 편과 영의 인도를 받는 편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어느 시점에 가면 나누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전혀 듣지 못하고 자기의 취미대로, 자기 육신의 생각대로만 사는 사람과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은 조화가 될 수 없습니다. 

눈이 뜨여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배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눈이 감겨 있는 사람은 배후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천군 천사들이 보였지만 게하시의 눈에는 자기들을 포위하고 있는 적군들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람 불고 폭풍우가 일어나고 파도가 치는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이 바닷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유령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련이나 여러가지 고통을 당할 때 육신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이 보이지 않고 무섭고 떨리고 고통스럽고 실망되고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눈이 뜨인 사람은 그 어려운 일 배후에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축복을 한 아름 가지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큰 차이점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붙기는 했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둘이가 나누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롯을 용납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뒤에는 아브라함의 인도를 받는 목자들과 롯의 인도를 받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의 결과로 두 사람은 결별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린도후서 6:14-7 : 1)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자와 어떻게 멍에를 같이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꼭 거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순전히 육신으로만 살 때에는 역시 세상입니다. 롯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의 그림자이지만 완전히 세상 속에,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마음에 그러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롯과는 한자리에서 언제든지 의좋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분리

여기서 우리는 육신과 영이 타협을 해서 적당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인정에 끌려 육신적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육신적인 계획을 세우고 육신적인 방법과 적당히 타협해서 "우리 같이 잘 지내자, 좋도록 하자" 는 식이 결코 아닌, 아브라함의 단호한 결정이 여기에 나옵니다.

"나를 떠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으니까 좀 양보하고 적당히 해서 되도록이면 좋게 지내자' 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는 인정이나 관습, 인간적인 예법 등을 섞을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율법주의적인 것, 세상의 윤리와 도덕적인 것과는 철저히 결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 도덕도 버리고 어른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부모를 섬기고, 이웃에게 좋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는 말씀대로 성령에 의한 공경은 도덕적인 것을 훨씬 능가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도덕 같은 것은 인간기준 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부모를 섬기되 어떤 규율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목이 두렵기 때문에, 누가 볼까 해서 하는 것은 윤리, 도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나 체면, 어떤 습성과 타협하는 것과는 완전히 구별된 것입니다. 설교 하는 사람도 이 차원 높은 사실을 모르면 그 설교는 도덕 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 읽어 놓고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곁길로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설교는 윤리, 도덕의 이야기로, 성경은 종교 서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교회를 발견하고 그 교회와 더불어 사는 신앙 생활을 해 가야 합니다. 

구원받고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롯과 같은 사람인데, 그는 바로 주님께 받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가지고 온 사람이에요. 그는 장사를 하나도 못한 사람이며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의 한 므나를 은행에 맡겨야 합니다. 

자기 혼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모임을 따라가야 해요. 모임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모임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다가 후에 그 세력이 뭉칠 때 모임을 떠나 버리는 겁니다. 떠나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 개인적으로 참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고 싶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고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려서 살고 싶은 양심의 작용이 있는 사람은 가끔 가다가 성경이 열립니다. 혼자 성경 읽다가 열리는 수도 있고 설교 듣다가 열리는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그러니 네가 먼저 마음대로 택하라" 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자기가 좋은 것을 택하는 육신은 항상 앞섭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아담 이후로 항상 둘 째번 것이 좋아요. 가인보다 아벨이 좋고 에서에게보다 야곱에게 약속이 있었어요. 아브라함도 롯에게 먼저 택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면, 중요한 어떤 문제를 결정하거나 작정해야 할 때 육신이 앞 장 서서 선택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참고 기다릴 고요가 있습니다. 성급하게 어떤 결정을 하지 않고 현재 상태를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는 그것입니다. 롯이 택하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자기의 것이 되니까 자기의 결정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양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양보하는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0-13)


소돔성에는 죄가 많았지만 멸망하기 전이었으므로 에덴 같이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을 좇아 자기 눈이 좋은 곳을 선택해 갔어요. 그것이 롯의 운명입니다. 

여러분, 그 롯의 선택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선택이에요.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며 무엇을 따라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기에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세상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세계는 육신적으로는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마음에 찾아온 평안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좋았는데 좀 있다 보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재미있는것,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여 우리 육신의 마음은 그걸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세상 속에 깊이 빠져 버립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한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며 공부하는 학생들 보고 공부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이라는 사람을 내 속에 두고 봐야 합니다. 내 속에는 아브라함 같은 요소, 즉 구원 받아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요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좋아하는 육신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세상 목자의 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이 내 속에서 싸웁니다. 그러다가 이 둘이 완전히 구별되는 날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는 자기 안에 있는 영의 힘이 더 줄어 버리고 육신에게 싸여 순전히 육신의 소리에게 인도를 받으면서 삽니다. 육신의 소리에 따르는 것은 바로 롯이 선택한 길입니다. 육신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경우 신중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승패가 거기서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꺾여야 신앙 생활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자기 마음이 꺾여야 할 어떤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육신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므로 거부 반응이 생깁니다. 그것이 죽어지지 않으면, 그 마음이 정복되지 않으면 육신의 소리를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꺾는 연습이 뭡니까? 내 마음에 거치는 어떤 것이 있을 때 내가 이걸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언제나 그것이 가시처럼 내 마음을 찌르고 내가 언제든지 불만 속에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러한 것을 과감히 처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버리면 나중에 자유가 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요구하십니까? 하나님이 가난해서입니까? 천지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겠어요? 인간이 드리는 물질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투쟁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유를 얻게 하고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내리려는 하나님의 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싸움입니다. 마음속에서 이 음성을 들을까 저 음성을 들을까 투쟁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른 두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의 선택은 나중에 다 불사루어 집니다. 롯이 그걸 선택했기 때문에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 탈 때에 자기의 것이 다 불타 버리지 않았습니까?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육신적인 선택의 결과가 현시점에서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눈앞에 그 결과가 당장 보이면 누가 감히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선택할때는 나중에 그 성이 유황불에 사루어지리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들어섰을 때 벌써 그 운명이 기다리는 겁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 소금기둥이 남아 있어서 그 사실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 (고린도전서 3:12-15)


불로 시험을 하면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을 것이나 나무나 풀, 짚으로 세운 집은 깡그리 타 버릴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한 복음주의 성경학자는 자기의 저서 속에서 들림받고 난 후 불을 통과하는 심판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불이 언제 나타날지 저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금, 은, 보석의 가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세계에도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 므나로 장사해서 열 므나 남긴 사람도 있고 다섯 므나, 두 므나 남긴 사람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 성령의 인도와 상관없이 육신으로만 산 삶, 즉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사람 가운데도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신앙 생활 과정에서 육신적인 안목으로 선택할 것이냐 영적인 안목으로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엇을 따라서 살았느냐 하는 삶의 결과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창세기 13:14)


롯, 아브람이 애굽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도 롯과 같이 있을 동안에는 여호와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난 후에 여호와의 음성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과정에는 항상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캄캄하고 성경 읽어도 끌리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깨닫는 것이 없을 때는 뭔가 내 마음이 롯과 같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육신에 빠져 있는 동안, 롯과 같이 살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서 롯이 떠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의 비밀입니다. 내 마음을 얽어 매고 있고 내 신앙 생활을 막고 있고 거침이 되고 있는 어떤 육신적인 문제를 자기가 결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떨쳐 버리는 사실이 있으면 그 다음에 성경 말씀이 열립니다. 그때 배우는 것입니다. 빛을 받는 거예요. 롯이 떠난 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굉장히 놀라운 약속이 있었어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3:14-16)


자손 만대에 살 수 있는 땅과 자식이 없는 그에게 티끌같이 많은 자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 자손들에게 약속해 주신 땅은 눈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 땅은 롯이 택해 간 아주 비옥하고 가까운 땅과는 달랐습니다. 눈이 모자랄 정도로 동서남북 먼 곳에 있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나 약속은 내 눈앞에 당장 보이고 당장 나타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항상 근시안적으로 내 눈앞에 가까운 것, 아름다운 것만을 취해서 가기 쉽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세기 13:17)


믿음이라는 것은 가만히 서서 보는 것만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처음에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고 했고 그 다음에는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멀리 멀리 다녀 보았겠지요. 그것은 뭘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믿음이라는것은 믿는 만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도 그랬고, 특히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멘 사람이 물이 꽉 차 있는 요단강에 한 발자국 쑥 들이밀고 발을 담그니까 물이 흐름을 멈추었습니다. 물이 제자리에 서고 난 뒤에 한 발자국 내 디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눈앞에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캄캄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그 어려움 뒤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아야 찹니다. 그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리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18)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와서 또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믿음이 자라가는 광경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세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괴로운 일이 닥칠 경우,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