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길었던 방황의 끝

 구원받던 그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내가 구원받기까지는 너무도 긴 세월을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였다. 내 반항아적인 생활은 중학 시절 보이스카우트 생활을 하면서 잘못된 호기심과 영웅심 그리고 자만심에 도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 합주단 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를 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영웅인 양 만용을 부리는 생활을 했다. 그런 중에도 박씨 집안의 장손이자 부모님께는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는 형과 오빠의 역할을 해야 하는 마음의 짐도 느껴야만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슬플 때나 기쁠 때 음악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취미로 음악을 듣고 감상하며 즐기던 것이 욕심이 생겨 돈을 버는 직업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졌다. 스무 살 때 천호동에서 스탠드바를 운영하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그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네다섯 위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싸움하고 다니는 것이 제일인 줄 알았다. 그러면서 밤업소 생활을 시작하였다. 


 목포와 해남에 사는 두 선배가 스탠드바 MC(사회자)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었다. 그때부터는 소 영웅적인 만용이 아닌 생업을 위한 수단으로 음란, 폭력, 도박이 어우러진 부패함 속의 난잡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항상 마음에서 나를 방망이질하는 걸림돌은 장남, 형, 오빠라는 집안에서의 내 위치였다. 

계속해서 강동구 일대의 밤업소를 전전하면서 MC 생활을 하다가 마음에서 원하던 나이트클럽 DJ를 보게 되었다. 마음은 부풀었고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고 즐거웠다. 그러다 병역의무를 위한 소집 영장이 나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제대 후 구두 만드는 회사, 벽돌공장, 구두닦기, 공사장, 건설회사, 목장 등 닥치는 대로 여러 방면으로 조금씩 경험을 해봤지만, 마음에서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었기 때문에 가끔 인근에 있는 교회에는 나갔다. 항상 마음에서는 내세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K 집사님이 경영하는 실내장식 사무실에 입사하게 되었다. 거기서 일하면서 생활이 조금 안정되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내 꿈은 변해갔다. ‘할렐루야 찬양 전도단’에 소속되어 전국을 다니며 찬양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였다.


 일요일이면 성서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인근의 어려운 교회를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생활을 하면서 더욱더 마음에서는 목회자의 길을 갈구했다. (나중에는 그러한 생활이 인간의 감정에 사로잡힌 위선의 탈을 쓴 가식적인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기엔 조금 늦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면접받는 날 포기를 해야만 했다. 면접시험 시간은 오후 2시였는데 그 시간에 나는 서울역 분수대에 한 개의 의자를 차지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교과서도 살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바로 전날 내게 닥친 하나의 사건이 시험을 포기하는데 더 크게 좌우했다고 할 수 있다. 무면허이면서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운전을 해왔는데 면접시험 전날 뜻하지 않은 충돌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인에게 내가 무면허로 운전해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동안 무면허를 속이고 일해온 것이 내 양심을 찔렀고 이런 양심을 가진 자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공포, 불안, 두려움,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벽이 가로놓인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헤매며 무엇을 하기 위해 달려왔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며 확실한 나의 목표는 무엇이며 소망은 무엇인가?’ 맑고 깨끗한 시냇물을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흐려놓듯 내 머릿속도 무엇엔가 의해 흐려진 듯했다.


 신학교를 포기하고 분수대를 떠나면서 그동안 위선적으로 살아온 삶을 모두 잊기로 했다. 신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나는 그날 스탠드바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연예인들의 온갖 쇼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 무엇인가 불만에 쌓여 주먹질하는 사람들, 한순간 지나간 옛일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잊어버린 옛 생활의 본성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짐했다. ‘주먹으로 살되 멋지게 살며, 도박을 하되 전문적으로 하며, 여자를 알되 의자 왕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알 것이며, 돈을 쓰되 부족함이 없도록 쓰며, 밤업소에서 일하되 내 사업을 하자.’는 생각을 했다. 무면허 운전사고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을 포기한 채 인생의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모든 생활을 잊어버리기엔 음악이란 베일 뒤에 감추어진 술, 담배, 도박이 최고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남들 출근할 때 잠자고 남들 퇴근할 때 출근하는, 그야말로 24시간을 남들과 반대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종교 생활을 통해 막연히 알게 된 지옥과 천국에 대한 불안감과 장남, 형, 오빠가 지녀야 할 책임감이 항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원당의 스탠드바에서 MC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는 폭력 조직에 가담하여 밤업소에서의 내 위치를 더욱더 굳혀갔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난 드디어 내 마음에 원하던 사업을 시작하였다. 술과 담배와 도박과 폭력 그리고 돈.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마음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늦게 배운 도적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허랑방탕한 생활 속에서 나는 죄짓는 자유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고, 일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5월 8일 어버이날 모처럼 집에 다녀온 후 나는 결국 그간의 내 삶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출감 후에는 친구가 자취하는 곳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낚시하러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이때 서울역 분수대에서 맛보았던 인생의 회의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아왔나?

남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찾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며 이렇게 방황하는 나는 누구인가?’


 해답은 없었다. 나라는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불안했다. 무엇엔가 쫓기는 생활이 무서웠고 두려웠다. 진실로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며 진정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면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무엇이라도 믿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내 인생행로를 정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고 내 마음을 평안케 하시면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의 고난과 역경이 와도 목회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만약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는 다시 폭력의 세계에서 밤무대를 누비며 죽음을 걸고 음악이란 베일 뒤에 숨겨진 암흑세계에서 멋지게 살아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결심하고 금식 기도를 위해 기도원을 찾던 중 오 남매 중 제일 먼저 복음을 접한 둘째 여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서로의 소식과 안부를 묻다 내가 기도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하자 동생은 내게 기도원에 가지 말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한번 같이 가 보자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동생이 이 말을 전할 때, 모처럼 집에서 동생과 만날 때마다 성경 말씀을 놓고 언쟁을 벌이곤 하던 일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꼭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가 나가는 교회같이 가 보자”는 동생의 부탁을 번번이 거절해왔던 생각이 났다. 이제껏 오빠로서 오빠다운 역할을 못 해왔는데 목숨 걸고 살기로 한 나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고 떠나자고 결심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동생이 다닌다는 교회를 같이 가보기로 하고 조금은 기대하면서 동생과 함께 교회 상담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되었다.


 기존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묵도로 시작하여 폐회까지 1시간이면 예배를 마치는 생활을 15년 이상을 해왔는데 2시간이 넘는 설교 시간은 내게 육체적으로 고통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에서 듣고 배우던 것과는 달리 목사님은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풀어주었다. 목사님의 설명해주시는 구구절절이 말씀들은 복잡한 내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정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말씀을 계속 듣던 중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며 마음의 평안을 안겨주었다. 육신의 꿈이 영의 소망으로 바뀌고, 육신의 어두운 생활에서 벗어나 영혼의 밝은 빛을 체험하게 되었다. 음악이라는 베일 뒤에 숨기어진 모든 것들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지난날의 방탕했던 삶이 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죄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받은 이후 영동에 있는 떡집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새로웠고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에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로 내면의 어둠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질에서의 문제, 형제 자매간에 생기는 갈등과 풀리지 않는 매듭과 보이지 않는 벽들이 생활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었다.


 ‘자기가 토한 음식을 다시 먹는 개’에 대한 말씀과 ‘돼지가 목욕한 후 다시금 자기 집으로 들어가 눕는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구원받기 전의 생활을 돌아보면 두려움과 무서움뿐인데, 자꾸 그전의 생활을 동경하며 그리워했다.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 일터를 박차고 떠났다 돌아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이 내게 들려주던 한 말씀 한 말씀이 나의 이런 마음을 바로잡아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감정 속에 잠재해 있던 문제가 해결되면서 그분들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떡집에서 일한 지 9개월 되던 때쯤 일하는 과정에서 귀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쌀이 떡이 되어가는 과정과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구원받은 후의 신앙생활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이 아닌 떡집에서 일하게 된 것이 실로 우연이 아니며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쌀은 땅속에서 나와 공기와 비와 거름 등으로 영양을 공급받으며 탈곡에서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거쳐 방아에 빻아져서 쌀 가게로 옮겨진다. 한편 사람은 모태에서 나와 자라며 세상의 지식과 학문을 쌓고 사람을 만나는 기쁨과 이별하는 아픔도 맛보며 울며 웃고 세상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쌀은 방앗간에서 쌀집으로 또는 가정집과 식당으로, 떡집으로 쌀이 있어야 하는 모든 기관에 팔리게 된다. 그러나 그중에는 땅에 떨어져 무의미하게 썩어가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살면서 언제 어디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권유받고 이끌리어 복음을 접할 기회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복음을 접하여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쌀이 떡이 되어가는 과정 중 모든 쌀이 다 떡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쌀이 물에 불린 쌀이 가루로 빻아지게 되는데, 씻는 중에 허실 되는 것도 있고 기계에 넣어 빻는 도중에 부스러기가 되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도 있다.


 구원받은 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모난 부분들을 훈련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얽히고설키며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떤 한 문제가 자신에게 닥쳐왔을 때, 그 문제를 말씀에서 또는 형제 자매간의 교제 속에서 해결하는 지혜와 끈기로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전진하는 사람이 있지만, 문제 해결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문제를 핑계 삼아 교회를 등지는 예도 있다.

 이런 과정을 생각하면서 구원받은 사람도 교회라는 기계에서 자기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지는데, 나 자신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견디지 못하고 뒤처지는 사람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된다.


 떡집에서 쌀의 최후 목적은 떡이지만, 구원받은 자의 최후의 소망은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나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형제자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활 이야기를 듣노라면 모든 문제와 생각이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는 생각보다는 성도들의 교제와 말씀을 문제 해결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일찍 세상의 경험을 했으며 세상의 것을 많이 알아버린 내 위치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너무도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리라 믿는다.

오늘날, 이 영광의 자리에 내가 있기까지 나를 붙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하루하루의 삶은 세상의 삶이어도 영으로는 항상 주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최후의 날까지 노력하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