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기 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이방인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예의와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안에서의 세상적, 물질적 쾌락이 삶의 전부이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한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이라 생각했다.
어렸을 때 몇 달 교회에 나가 본 것 외에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둬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세상 속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은혜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보다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 마음대로 우리를 지옥 불에 던질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서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나 하나님을 들먹이면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경탐구모임에서 누나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누나는 몹시 기뻐했고 나에게 귀가 따갑도록 성경 이야기와 세상 종말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누나의 커다란 변화를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주일 사이 어떠한 경험을 했길래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혹시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게 아닐까?’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누나가 떠벌리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 후 누나의 적극적인 권유 반, 호기심 반으로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게 되었다. 첫날 테이프 하나하나를 보면서 나는 우선 권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 한마디, 성경 한 구절이 이론적으로 너무나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상상하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성경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었고, 서서히 성경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죄에 대한 문제점에 이르렀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죄로 뭉쳐진, 죄로 다져진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곧이어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성경이 사실이라면 나는 결코 구제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천만분의 1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허무하고 초라할 수 없었다. 세상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개 단막극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 단막극에서 나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 없는 엑스트라 인생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 테이프를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하면서도, 나는 좀 더 알기를 바랐다. 권 목사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죄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던 중 테이프를 9편까지 보게 되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 깨달았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죽음이었다. 그가 돌아가시는 순간, 이미 2000년 전 나는 예수의 피로 정결해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모든 성경 말씀이 저절로 풀려나갔다.
모든 사람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 친구 그밖에 모든 사람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구원받은 후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어리석음’ 투성이였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이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세상일로 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졌다.
나는 세상과의 벽을 쌓고 결코 티끌만큼의 죄도 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티끌만큼의 죄도 짓지 않는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내가 짓는 죄를 모두 주님께서 지셨을 뿐, 죄를 짓는 본래의 죄상은 아직도 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 힘만으로는 죄상을 없앤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만 한없이 넓은 주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주님을 알기 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이방인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예의와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안에서의 세상적, 물질적 쾌락이 삶의 전부이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한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이라 생각했다.
어렸을 때 몇 달 교회에 나가 본 것 외에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둬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세상 속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은혜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보다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 마음대로 우리를 지옥 불에 던질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서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나 하나님을 들먹이면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경탐구모임에서 누나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누나는 몹시 기뻐했고 나에게 귀가 따갑도록 성경 이야기와 세상 종말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누나의 커다란 변화를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주일 사이 어떠한 경험을 했길래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혹시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게 아닐까?’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누나가 떠벌리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 후 누나의 적극적인 권유 반, 호기심 반으로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게 되었다. 첫날 테이프 하나하나를 보면서 나는 우선 권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 한마디, 성경 한 구절이 이론적으로 너무나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상상하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성경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었고, 서서히 성경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죄에 대한 문제점에 이르렀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죄로 뭉쳐진, 죄로 다져진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곧이어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성경이 사실이라면 나는 결코 구제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천만분의 1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허무하고 초라할 수 없었다. 세상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개 단막극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 단막극에서 나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 없는 엑스트라 인생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 테이프를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하면서도, 나는 좀 더 알기를 바랐다. 권 목사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죄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던 중 테이프를 9편까지 보게 되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 깨달았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죽음이었다. 그가 돌아가시는 순간, 이미 2000년 전 나는 예수의 피로 정결해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모든 성경 말씀이 저절로 풀려나갔다.
모든 사람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 친구 그밖에 모든 사람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구원받은 후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어리석음’ 투성이였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이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세상일로 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졌다.
나는 세상과의 벽을 쌓고 결코 티끌만큼의 죄도 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티끌만큼의 죄도 짓지 않는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내가 짓는 죄를 모두 주님께서 지셨을 뿐, 죄를 짓는 본래의 죄상은 아직도 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 힘만으로는 죄상을 없앤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만 한없이 넓은 주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