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맨 처음 창조주에 대한 생각하게 된 동기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진화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만약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면 원숭이는 무엇으로부터 진화되었으며 그 무엇은 또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이어진 의문은 끝이 없었고 가끔 공상 시간에 생각나는 인류 조상 찾기 운동(?)은 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고자 할 그런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할 때마다 결코 결말이 나지 않은 끝없는 의문이었기에 굉장히 답답했고 지겨웠다. 뭔가 딱 부러지고 정리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어떤 아줌마가 뿌린 전단에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라고 크게 쓰인 활자가 눈에 띄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렸었다.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게 쓰여서 그런 게 아니고 진화론이라고 생각하면 끝이 없고 창조론으로 생각하면 처음이 있기 때문에 끝이 없는 머리싸움은 하지 않게 되고 나의 인류 조상 찾기 운동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까 사람을 만든 조물주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말로 하자면 ‘나를 만든 위대한 신이 있다면 난 그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그 조물주란 분인가?’ 그때부터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 내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뜻 교회에 나갈 용기는 없었고 주변에서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고3이란 회오리바람 속에 그런 관심은 묻히고 대학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계기가 있었다.
원하지 않은 학교의 적성에 맞지 않은 학과 때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데다가 올케언니와의 심한 갈등까지 겹쳐 상당히 많은 세월을 방황하며 보내야 했다. 그러다 결국 휴학을 하게 되고 휴학하는 1년 동안 마음고생은 말할 수 없었고 더불어 많은 후회와 생각을 하게 되어 내 마음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간이 내게는 큰 전환점이었고 꼭 필요한 뜻깊은 기간이었나 보다. 오빠의 충고와 위로로 다시 시작하자는 새로운 각오로 복학했다. 후배들과 같이 다니면서 내 마음은 진정 많이 달라져 있었고 안정되어 있었다.
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못나 보이고 현실 도피자로 나약하게만 생각되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이 성실해 보이고 편안해 보여 부러웠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며 살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후배가 권유하는 성경 공부에 즉시 응할 수가 있었다.
한 번도 성경 내용을 읽어 본 적도, 정확히 들어 본 적도 없는 내가 성경책을 믿는다는 게 무리였다. 더구나 글자가 생기기 전 문자나 기호에 의해서 쓰인 것을 수많은 변화가 거듭되어온 오늘날까지 기록 당시 뜻으로 그대로 보존됐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 성경 자체를 인정한다면 이 안에 있는 내용은 저절로 믿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꽤 많은 질문에 일단 성경을 배우게 되면 이 기록들이 진짜임을 증명해 준다는 대답으로 일축하고 일단 그 의심은 접어두고 매일 2시간씩 배우기로 했다. 그때 배운 내용은 기억도 잘 안 나거니와 복잡해서 생략하겠다.
어찌 되었든 성경을 접한 결과, 밤을 새우면서까지 새롭고 신기한 사실을 들으려고 했고, 특히 예언한 것이 실제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신문 스크랩을 봤을 땐 더는 의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약 두 달간에 대략 다 배우게 되었다.
처음엔 놀람과 흥분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는데, 어느 정도 지나니까 다시 그 모든 것이 진짜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열성이 점점 식어갔다. 결국,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의아심이 많아지면서 그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졸업 후 바로 서울 생활에 적응하면서 생긴 갈등으로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하여 여러 곳의 교회를 조금씩 다녔다.
그럭저럭 1년이 지나고 서울 생활에도 어느덧 익숙해지자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언니네 집에서 대학원 준비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친구 언니를 통해 서울교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교회를 찾는 열성도 식었고 관심이 없었던 때라 썩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언니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갔다.
처음엔 제대로 나가지 않았고 나간 날도 졸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설교에 율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씀에 내 귀가 열렸다. 교회를 오래 다녀보지 않았지만 분명 다른 곳과 다르다는 걸 그 말씀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말씀은 내게 인정되지 않았다. 평소 죄란 크게 행동으로 나타난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경에 비추어 보면 마음으로 지은 악한 마음 모두가 죄라고 하니 성경의 세밀함에 놀라면서도 나 자신과는 연결 짓지 못했다.
역사나 예언에 대해선 믿어지는데 아주 작다고 생각되는 부분의 죄에 대해 엄하게 벌하신다는 말씀은 믿어지지 않았고 아담의 죄로 우리까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언성을 높여가면서 억지로 죄를 주입하려 하는 것 같아 목사님이 밉기까지 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자백과 용서를 빌며 깊이 뉘우치라는 목사님의 간곡한 외침 소리도 흘려버린 채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언니로부터 중요한 날이니까 꼭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고서 의례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나도 부담 없이 그날은 일찍 가고 싶어 앞자리 쪽으로 택해 말씀을 들었다.
초반부터 말씀들이 쑥쑥 들어왔다. 이천 년 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몽땅 영원히 뒤집어쓰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만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버린다. 즉 우리들의 죄는 백지화되어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 탓에 끊겼던 하나님과의 교통이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처음 들은 사실이기에 어안이 벙벙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안 것에만 신기해했을 뿐, 나하고는 연관 짓지 못했다. 예수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그리면서 계속 설명하실 때, 모든 세상 죄에 나 자신의 죄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때야 비로소 아담의 피를 통해서 네 개까지 흘러서 온 죄와 핏줄을 통한 죄를 인정하면서 행동으로 짓지 않아도 저절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법칙에 고개를 떨구었다.
구더기보다 더 더러운 것이 바로 내 모습이란 것이 그제야 보였던 것이다. 인간들이 믿지 않으니까 몸소 자신을 낮춰 인간의 육신적인 연약함까지 다 체휼하시며 우리 속에 나타나신 그분의 겸손과 끝없는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이 말씀만 받아들여 마음에 믿어져 버리면 그만이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느낌을 들게 했는지 모른다. 구원에 대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다 끝나는 것도 모른 채 나의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알고 나니 너무 단순한 진리이므로 감사하단 생각보다는 그동안 찾아 헤매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에 억울하던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기뻤다. 지금까지 내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
내가 맨 처음 창조주에 대한 생각하게 된 동기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진화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만약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면 원숭이는 무엇으로부터 진화되었으며 그 무엇은 또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이어진 의문은 끝이 없었고 가끔 공상 시간에 생각나는 인류 조상 찾기 운동(?)은 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고자 할 그런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할 때마다 결코 결말이 나지 않은 끝없는 의문이었기에 굉장히 답답했고 지겨웠다. 뭔가 딱 부러지고 정리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어떤 아줌마가 뿌린 전단에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라고 크게 쓰인 활자가 눈에 띄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렸었다.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게 쓰여서 그런 게 아니고 진화론이라고 생각하면 끝이 없고 창조론으로 생각하면 처음이 있기 때문에 끝이 없는 머리싸움은 하지 않게 되고 나의 인류 조상 찾기 운동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까 사람을 만든 조물주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말로 하자면 ‘나를 만든 위대한 신이 있다면 난 그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그 조물주란 분인가?’ 그때부터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 내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뜻 교회에 나갈 용기는 없었고 주변에서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고3이란 회오리바람 속에 그런 관심은 묻히고 대학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계기가 있었다.
원하지 않은 학교의 적성에 맞지 않은 학과 때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데다가 올케언니와의 심한 갈등까지 겹쳐 상당히 많은 세월을 방황하며 보내야 했다. 그러다 결국 휴학을 하게 되고 휴학하는 1년 동안 마음고생은 말할 수 없었고 더불어 많은 후회와 생각을 하게 되어 내 마음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간이 내게는 큰 전환점이었고 꼭 필요한 뜻깊은 기간이었나 보다. 오빠의 충고와 위로로 다시 시작하자는 새로운 각오로 복학했다. 후배들과 같이 다니면서 내 마음은 진정 많이 달라져 있었고 안정되어 있었다.
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못나 보이고 현실 도피자로 나약하게만 생각되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이 성실해 보이고 편안해 보여 부러웠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며 살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후배가 권유하는 성경 공부에 즉시 응할 수가 있었다.
한 번도 성경 내용을 읽어 본 적도, 정확히 들어 본 적도 없는 내가 성경책을 믿는다는 게 무리였다. 더구나 글자가 생기기 전 문자나 기호에 의해서 쓰인 것을 수많은 변화가 거듭되어온 오늘날까지 기록 당시 뜻으로 그대로 보존됐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 성경 자체를 인정한다면 이 안에 있는 내용은 저절로 믿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꽤 많은 질문에 일단 성경을 배우게 되면 이 기록들이 진짜임을 증명해 준다는 대답으로 일축하고 일단 그 의심은 접어두고 매일 2시간씩 배우기로 했다. 그때 배운 내용은 기억도 잘 안 나거니와 복잡해서 생략하겠다.
어찌 되었든 성경을 접한 결과, 밤을 새우면서까지 새롭고 신기한 사실을 들으려고 했고, 특히 예언한 것이 실제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신문 스크랩을 봤을 땐 더는 의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약 두 달간에 대략 다 배우게 되었다.
처음엔 놀람과 흥분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는데, 어느 정도 지나니까 다시 그 모든 것이 진짜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열성이 점점 식어갔다. 결국,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의아심이 많아지면서 그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졸업 후 바로 서울 생활에 적응하면서 생긴 갈등으로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하여 여러 곳의 교회를 조금씩 다녔다.
그럭저럭 1년이 지나고 서울 생활에도 어느덧 익숙해지자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언니네 집에서 대학원 준비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친구 언니를 통해 서울교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교회를 찾는 열성도 식었고 관심이 없었던 때라 썩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언니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갔다.
처음엔 제대로 나가지 않았고 나간 날도 졸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설교에 율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씀에 내 귀가 열렸다. 교회를 오래 다녀보지 않았지만 분명 다른 곳과 다르다는 걸 그 말씀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말씀은 내게 인정되지 않았다. 평소 죄란 크게 행동으로 나타난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경에 비추어 보면 마음으로 지은 악한 마음 모두가 죄라고 하니 성경의 세밀함에 놀라면서도 나 자신과는 연결 짓지 못했다.
역사나 예언에 대해선 믿어지는데 아주 작다고 생각되는 부분의 죄에 대해 엄하게 벌하신다는 말씀은 믿어지지 않았고 아담의 죄로 우리까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언성을 높여가면서 억지로 죄를 주입하려 하는 것 같아 목사님이 밉기까지 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자백과 용서를 빌며 깊이 뉘우치라는 목사님의 간곡한 외침 소리도 흘려버린 채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언니로부터 중요한 날이니까 꼭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고서 의례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나도 부담 없이 그날은 일찍 가고 싶어 앞자리 쪽으로 택해 말씀을 들었다.
초반부터 말씀들이 쑥쑥 들어왔다. 이천 년 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몽땅 영원히 뒤집어쓰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만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버린다. 즉 우리들의 죄는 백지화되어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 탓에 끊겼던 하나님과의 교통이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처음 들은 사실이기에 어안이 벙벙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안 것에만 신기해했을 뿐, 나하고는 연관 짓지 못했다. 예수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그리면서 계속 설명하실 때, 모든 세상 죄에 나 자신의 죄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때야 비로소 아담의 피를 통해서 네 개까지 흘러서 온 죄와 핏줄을 통한 죄를 인정하면서 행동으로 짓지 않아도 저절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법칙에 고개를 떨구었다.
구더기보다 더 더러운 것이 바로 내 모습이란 것이 그제야 보였던 것이다. 인간들이 믿지 않으니까 몸소 자신을 낮춰 인간의 육신적인 연약함까지 다 체휼하시며 우리 속에 나타나신 그분의 겸손과 끝없는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품에 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이 말씀만 받아들여 마음에 믿어져 버리면 그만이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느낌을 들게 했는지 모른다. 구원에 대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다 끝나는 것도 모른 채 나의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알고 나니 너무 단순한 진리이므로 감사하단 생각보다는 그동안 찾아 헤매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에 억울하던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기뻤다. 지금까지 내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