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따뜻한 남쪽의 섬, 거제도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맛있는 간식도 주고, 동네 아이들을 많이 데려가면 학용품 따위의 상을 준다고 해서 여름 성경학교가 열리거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 또래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안식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장로교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다녔다. 중등부 학생회장을 맡아 잠시 활동했던 기억도 난다. 장로교회에 다닐 당시, 나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친구들이 진짜 교인이 되려면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은혜나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 은혜나 방언이라는 것을 나도 한 번 받아 보려고 해마다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교회 마룻바닥을 두들기고 손바닥이 얼얼할 만큼 손뼉을 치면서 ‘울어도 못하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같은 찬송가를 목이 터지라 불렀다. “주여, 주여” 하면서 성인들의 기도를 흉내 내어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통성기도도 해 봤고, 부흥강사로부터 안수까지 받았는데도 신심이 부족했던 탓인지 나에게는 불을 받는 은사나 방언이 오지 않아 실망이 컸다.
나이 많은 목사가 하는 설교가 재미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아 졸다가 돌아오는 생활이 지겨워서 교회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주일이 되면 차라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병정놀이도 하고, 여름에는 멱감고 겨울에는 썰매 타기나 팽이치기하면서 노는 것이 더 재미가 있어 결국, 교회와 담을 쌓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우등생이 되어 3년간 장학금을 받아 가며 공부를 하였고, 학급 반장에다 총학생회 규율부장, 배구부 주장까지 맡을 정도로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며 통솔력 있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던 터라, 내가 최고라는 자만과 교만함에 빠져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 기억으로는 배구선수 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배가 있었는데, 그 후배가 시합을 앞두고 주일에도 연습해야 하는데도 연습에 불참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다음부터는 주일 연습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으나, 자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요일에는 교회를 나가야 하므로 연습을 못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닭똥구멍을 믿어라. 닭똥구멍을 믿으면 하루에 달걀 한 개를 얻는 게 확실한데, 무슨 뚱딴지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타령을 하느냐.”며 심하게 기합을 주면서 핍박했을 정도로 철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던 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고된 훈련을 마치고 보안부대에 배치되어 제대할 때까지 사복을 입고 대공수사 부서에 근무하다 보니, 자연히 일반부대 사병들에게 어깨 힘을 주고 다니면서 이유 없이 그들을 괴롭혔고, 휴가를 나가면 선후배들에게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보안대에 근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제대하고 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철퇴를 내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방패가 되며, 원더우먼과 그랜다이져의 세계를 동경하는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나름대로 동기를 가지고 경찰에 투신하여 15년간 오로지 수사 형사, 특히 강도, 절도, 살인, 방화 등 강력범이나 인신매매범, 조직폭력배, 마약 사범. 밀수 사범 등을 검거하는 특수 강력수사대 등 강력 부서의 형사반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범인 검거 실적을 올렸다.
건국 이래 최대 금괴 밀수 사건이라는 100억대 국제 금괴 밀수단 8명을 동료와 격투 끝에 검거하고, 시가 43억 원대의 금괴를 현장에서 압수하는 개가를 올려 경찰청장으로부터 특진의 영예와 포상을 받았으며, 방송이나 신문에 보도되는 크고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해결함으로써 부산경찰청 산하에서 베테랑 형사, 엘리트 형사라는 평판을 받아 가며 조직에 충성했다. 범죄꾼들도 나와 마주치면 혼비백산 달아나고, 조직 폭력배 두목들도 90도 절을 할 정도 악명이 높을 정도였다. 범죄꾼들에게는 밥맛 떨어지는 형사라고 인식될 만큼 치안의 역군으로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내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그것이 사나이가 가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오로지 그 길을 향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내달렸다.
동료 경찰관 중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있었지만, 직원들과 융화도 잘 안되고 회식 자리나 술좌석에 빠지기 일쑤여서 대다수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 예수쟁이 경찰들이 꾀죄죄하고 너무 고리타분하여 저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갈까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느 공무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경찰 공무원들은 불교 신자가 많으며. 승진과 영전을 위해 팔공산 갓바위 같은 영험하다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고 각종 부적을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공휴일이나 휴가 때면, 어김없이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면서 출세하게 해달라고 우상에게 수없이 절을 했고,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는 세 군데 이상의 절을 밟아야 액을 물리치고 복을 받는다고들 해서 어린 자식까지 이끌고 온종일 사찰 순례를 하면서 불전함에 돈을 넣고 생명도 없는 불상 앞에 절을 하면서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연중행사였다. 심지어 살인사건처럼 중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용의자를 찾지 못해 사건 해결이 안 되면, 심령 과학 한다는 사람이나, 촛불 점쟁이를 찾아가 범인이 누구일 것 같으며, 어느 방향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도 해봤을 정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등을 돌린 채 반평생을 살아왔던 나였다.
다른 동기생들에 비해 항상 승진이 빨랐고, 파출소 근무나 정복 한 번 입어보지 않고 수사 부서에서 사복을 입고 조직 안에서 업무적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선두 주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모 일간지에서는 “항도 부산의 범죄 해결사”라는 제목으로 각종 사건 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수사 형사로서의 자질과 근성을 가진 청렴한 경찰관이라는 내용으로 나를 한껏 치켜세우는 기사를 보도한 적도 있었다. TV 뉴스 사건·사고 시간에 가끔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본 고향 사람들도 그런 나에게 많은 격려를 보내주곤 했다.
조직사회, 친구들의 모임, 동창회나 향우회 모임에서 늘 인정받고 “네가 최고다, 네가 제일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차츰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거만하며 자만해지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과의 술좌석에 서 걸핏하면 “나만큼 도둑놈 잘 잡는 형사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보다 더 깨끗한 경찰이 있으면 데리고 와 봐라.”며 큰소리를 치면서 제 자랑을 했고, 남들은 모두 나보다 실력과 수준이 낮고 가슴이 좁은 사람들이라 깎아내리면서 나 혼자 잘나고 똑똑한 체 거드름을 피우면서 오만에 빠져 있던 나에게 마침내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다.
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최고 형사라는 명예를 거머쥐기 위하여 바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가족들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이 곪아가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밖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하느라고 자주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동네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고스톱 도박을 일삼고, 밤이 되면 어린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술집이나 노래방을 드나들면서 남편이 고생하며 받는 봉급을 유흥비로 탕진해 버리고, 음주 시비로 파출소에 붙들려가 남편 얼굴에 먹칠하기 예사였다. 아이들을 교육하고 남편을 내조해야 하는 아내는 어머니의 본분마저 망각하고 오직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타일러보기도 하고 설득하고 꾸짖어 보기도 했지만, 나쁜 생활 태도와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정불화만 늘어나게 되면서 평화로와야 할 가정이 지옥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는데, 제 가정도 옳게 다스리지 못하고 주제넘게 법을 집행하면서 사회를 다스려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잘난척하며 형사 노릇한 자신이 부끄럽고 직장에 나가도 그전처럼 의욕도 나지 않아 술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밤거리를 떠돌며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씻어보려고 바둥거려 봤지만, 되레 건강만 해치고 실수만 잦아져 사람만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아내의 탈선과 낭비벽은 더욱 심해져 갔으며, 가정이 편치 않은 나 자신도 직장에서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 나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른 가정은 모두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왜 우리 가정만 이토록 불행할까? 이렇게 된 원인이 내 탓이 아닌 아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아내가 원망스럽고 한없이 미웠다.
오랜 불화 끝에 우리 부부는 서로 위해 이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아내는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두 명을 자기가 양육하겠으니 얼마 되지 않는 기존 재산은 물론 사직하고 퇴직금까지 몽땅 줄 것을 요구하여 세상이 귀찮아진 나는 아내 요구대로 천직으로 여기며 그토록 충성을 다했던 경찰공무원 사표를 쓰고 아내에게 퇴직금을 수령하라며 통장과 도장을 맡기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기존 재산과 퇴직금을 다 주면 자식들을 책임지겠다고 나와 어린 자식 앞에서 철석같이 약속했던 아내가 정작 퇴직금을 찾게 되자, 자식들을 버려두고 짐을 챙겨 혼자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아들의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직장 잃고 재산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내가 앞으로 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하고 한숨만 나올 뿐 대책이 없었다. 자식을 버리고 재산까지 몽땅 챙겨 혼자 달아난 아내가 한없이 미웠고 찾을 수만 있다면 죽여버리고. 나도 인생을 끝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오갈 데도 없이 길바닥 신세가 된 것을 딱하게 여긴 형님의 도움으로 춥고 어두운 산동네 단칸방에서 끼니를 걸러가며 풀 죽은 아이들과 치매에 걸린 노모와 생활하면서 절망과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술로 삼개월을 보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형사가 인생의 낙오자요, 실패자가 되어 세상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다.
15년간 내 이름 뒤에 따라다니던 형사라는 직함마저 떨어져 나가고 나니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찌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라는 말씀대로 현직에 있을 때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이 붙어 다니며 아부하던 친구들이 바람같이 떠나버리고, 형제들조차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뿐만 아니라, 평소 나에게서 신세를 많이 지고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먼저 외면해버려 사람들을 만나기가 겁이 났다.
어디를 가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를 찾기 힘들어 낮에는 혼자 산에 올라가 종일토록 헤매고 다녔고, 밤이면 소주를 벗삼아 지냈다. 궁핍함 없이 지내던 아이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안타까워 부둥켜 안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너무 외로웠고 서러웠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같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를 연구한다는 청년을 만나 도통 군자가 되어보겠다고 그들이 옥황상제로 모시는 강증산이란 우상에게 수없이 절을 하며 주문을 외웠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금강산 도장까지 가서 우두머리 신을 모셔놓았다는 곳에서 도인들이라고 하는 순례자들과 합동으로 절까지 하면서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해보려 했다. 그곳에서 말하는 도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기 시작할 무렵에 교회에 나가고 있던 사촌 동생 부부로부터 연락이 와 “형님, 조카들 데리고 시원한 곳에 휴가나 갑시다. 경비는 필요 없으니 몸만 가면 됩니다. 빨리 챙겨서 우리 집으로 오세요.” 라고 하기에, 당시 마음이 답답한 상태였던데다가 여름방학이고 해서 아이들과 머리나 식힐 겸 사촌을 따라간 곳이 성경탐구모임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시달려 이내 짜증이 났고, “바캉스 간다더니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우리를 데리고 왔는가.” 하고 동생 부부에게 신경질을 내었다. 틈을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되돌아 갈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첫날 저녁 강사로 나온 분께서 창조론을 설명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설득력도 있는 것 같아 이왕 은 김에 지식이나 좀 쌓아가지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눌러 있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권 목사님의 비디오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화석이 되어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구를 공중에 매달았으며 북편 하늘에 허공을 펼쳤다는 성경 말씀을 설명하면서 자료까지 제시하기에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겨났고 모든 동물은 미생물에서 시작하여 차츰 진화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상대로 발전해 온 것이라고 믿어왔던 고정관념이 허물어지고 어쩌면 성경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시간 앞자리에 앉아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씀을 들었다.
권목사님께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통이 끊어진 것은 죄와 허물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며, 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5:21~22절과 로마서 1장 29~3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죄를 일일이 지적하고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참조)는 말씀을 하는데 그 모든 죄가 나에게 해당하는 것임을 알고, 비로소 내가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불에 들어갈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으나,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처리할 수 있을까’ 하고 잠 못 이루며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렇게 엄청나고 무서운 하나님의 계획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어김없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내 맘대로 온갖 죄를 저지르면서 내가 최고라는 교만에 빠져 인생을 살아온 것이 후회막심하였고, 일찍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많은 죄를 짓지 않고 경건하게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제발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보았으나 과연 내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금요일 저녁,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눅 15:11~32 참조), 요한복음, 로마서, 미가서, 히브리서에 있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 내 귀에 전해지고 있었으나, 나는 말씀으로 거듭나는 줄 모르고 신체상에 어떤 체험 같은 것을 느껴야 구원을 받는 것인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옆에 있던 큰아들이 먼저 구원을 받고 환하게 웃으면서 “아빠, 나 해결되었어요.”라고 소리치기에, 나는 그때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는 이사야 44장 22절 말씀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이사야 43장 25절의 말씀을 통해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과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영혼이 거듭난 사실을 깨닫고 한없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이 죄인을 그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침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한 후, 함께 구원받은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명예와 권력이 없어도, 비록 가진 것 하나 없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주 안에서 기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찬송가 189장)라는 찬송가를 기억해 내어 불러보니 비로소 그 가사와 내 마음이 일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지럽고 어수선했던 지난날의 고통이 사라지고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느낄 수 있었다.
구원받고 난 뒤에도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왔으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이제는 아픈 과거를 청산하고 온 가족이 믿음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친척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를 믿는 길만이 살 길임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나는 따뜻한 남쪽의 섬, 거제도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맛있는 간식도 주고, 동네 아이들을 많이 데려가면 학용품 따위의 상을 준다고 해서 여름 성경학교가 열리거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 또래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안식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장로교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다녔다. 중등부 학생회장을 맡아 잠시 활동했던 기억도 난다. 장로교회에 다닐 당시, 나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친구들이 진짜 교인이 되려면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은혜나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 은혜나 방언이라는 것을 나도 한 번 받아 보려고 해마다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교회 마룻바닥을 두들기고 손바닥이 얼얼할 만큼 손뼉을 치면서 ‘울어도 못하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같은 찬송가를 목이 터지라 불렀다. “주여, 주여” 하면서 성인들의 기도를 흉내 내어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통성기도도 해 봤고, 부흥강사로부터 안수까지 받았는데도 신심이 부족했던 탓인지 나에게는 불을 받는 은사나 방언이 오지 않아 실망이 컸다.
나이 많은 목사가 하는 설교가 재미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아 졸다가 돌아오는 생활이 지겨워서 교회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주일이 되면 차라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병정놀이도 하고, 여름에는 멱감고 겨울에는 썰매 타기나 팽이치기하면서 노는 것이 더 재미가 있어 결국, 교회와 담을 쌓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우등생이 되어 3년간 장학금을 받아 가며 공부를 하였고, 학급 반장에다 총학생회 규율부장, 배구부 주장까지 맡을 정도로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며 통솔력 있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던 터라, 내가 최고라는 자만과 교만함에 빠져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 기억으로는 배구선수 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배가 있었는데, 그 후배가 시합을 앞두고 주일에도 연습해야 하는데도 연습에 불참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다음부터는 주일 연습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으나, 자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요일에는 교회를 나가야 하므로 연습을 못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닭똥구멍을 믿어라. 닭똥구멍을 믿으면 하루에 달걀 한 개를 얻는 게 확실한데, 무슨 뚱딴지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타령을 하느냐.”며 심하게 기합을 주면서 핍박했을 정도로 철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던 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고된 훈련을 마치고 보안부대에 배치되어 제대할 때까지 사복을 입고 대공수사 부서에 근무하다 보니, 자연히 일반부대 사병들에게 어깨 힘을 주고 다니면서 이유 없이 그들을 괴롭혔고, 휴가를 나가면 선후배들에게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보안대에 근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제대하고 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철퇴를 내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방패가 되며, 원더우먼과 그랜다이져의 세계를 동경하는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나름대로 동기를 가지고 경찰에 투신하여 15년간 오로지 수사 형사, 특히 강도, 절도, 살인, 방화 등 강력범이나 인신매매범, 조직폭력배, 마약 사범. 밀수 사범 등을 검거하는 특수 강력수사대 등 강력 부서의 형사반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범인 검거 실적을 올렸다.
건국 이래 최대 금괴 밀수 사건이라는 100억대 국제 금괴 밀수단 8명을 동료와 격투 끝에 검거하고, 시가 43억 원대의 금괴를 현장에서 압수하는 개가를 올려 경찰청장으로부터 특진의 영예와 포상을 받았으며, 방송이나 신문에 보도되는 크고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해결함으로써 부산경찰청 산하에서 베테랑 형사, 엘리트 형사라는 평판을 받아 가며 조직에 충성했다. 범죄꾼들도 나와 마주치면 혼비백산 달아나고, 조직 폭력배 두목들도 90도 절을 할 정도 악명이 높을 정도였다. 범죄꾼들에게는 밥맛 떨어지는 형사라고 인식될 만큼 치안의 역군으로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내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그것이 사나이가 가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오로지 그 길을 향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내달렸다.
동료 경찰관 중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있었지만, 직원들과 융화도 잘 안되고 회식 자리나 술좌석에 빠지기 일쑤여서 대다수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 예수쟁이 경찰들이 꾀죄죄하고 너무 고리타분하여 저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갈까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느 공무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경찰 공무원들은 불교 신자가 많으며. 승진과 영전을 위해 팔공산 갓바위 같은 영험하다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고 각종 부적을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공휴일이나 휴가 때면, 어김없이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면서 출세하게 해달라고 우상에게 수없이 절을 했고,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는 세 군데 이상의 절을 밟아야 액을 물리치고 복을 받는다고들 해서 어린 자식까지 이끌고 온종일 사찰 순례를 하면서 불전함에 돈을 넣고 생명도 없는 불상 앞에 절을 하면서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연중행사였다. 심지어 살인사건처럼 중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용의자를 찾지 못해 사건 해결이 안 되면, 심령 과학 한다는 사람이나, 촛불 점쟁이를 찾아가 범인이 누구일 것 같으며, 어느 방향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도 해봤을 정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등을 돌린 채 반평생을 살아왔던 나였다.
다른 동기생들에 비해 항상 승진이 빨랐고, 파출소 근무나 정복 한 번 입어보지 않고 수사 부서에서 사복을 입고 조직 안에서 업무적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선두 주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모 일간지에서는 “항도 부산의 범죄 해결사”라는 제목으로 각종 사건 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수사 형사로서의 자질과 근성을 가진 청렴한 경찰관이라는 내용으로 나를 한껏 치켜세우는 기사를 보도한 적도 있었다. TV 뉴스 사건·사고 시간에 가끔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본 고향 사람들도 그런 나에게 많은 격려를 보내주곤 했다.
조직사회, 친구들의 모임, 동창회나 향우회 모임에서 늘 인정받고 “네가 최고다, 네가 제일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차츰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거만하며 자만해지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과의 술좌석에 서 걸핏하면 “나만큼 도둑놈 잘 잡는 형사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보다 더 깨끗한 경찰이 있으면 데리고 와 봐라.”며 큰소리를 치면서 제 자랑을 했고, 남들은 모두 나보다 실력과 수준이 낮고 가슴이 좁은 사람들이라 깎아내리면서 나 혼자 잘나고 똑똑한 체 거드름을 피우면서 오만에 빠져 있던 나에게 마침내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다.
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최고 형사라는 명예를 거머쥐기 위하여 바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가족들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이 곪아가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밖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하느라고 자주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동네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고스톱 도박을 일삼고, 밤이 되면 어린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술집이나 노래방을 드나들면서 남편이 고생하며 받는 봉급을 유흥비로 탕진해 버리고, 음주 시비로 파출소에 붙들려가 남편 얼굴에 먹칠하기 예사였다. 아이들을 교육하고 남편을 내조해야 하는 아내는 어머니의 본분마저 망각하고 오직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타일러보기도 하고 설득하고 꾸짖어 보기도 했지만, 나쁜 생활 태도와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정불화만 늘어나게 되면서 평화로와야 할 가정이 지옥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는데, 제 가정도 옳게 다스리지 못하고 주제넘게 법을 집행하면서 사회를 다스려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잘난척하며 형사 노릇한 자신이 부끄럽고 직장에 나가도 그전처럼 의욕도 나지 않아 술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밤거리를 떠돌며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씻어보려고 바둥거려 봤지만, 되레 건강만 해치고 실수만 잦아져 사람만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아내의 탈선과 낭비벽은 더욱 심해져 갔으며, 가정이 편치 않은 나 자신도 직장에서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 나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른 가정은 모두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왜 우리 가정만 이토록 불행할까? 이렇게 된 원인이 내 탓이 아닌 아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아내가 원망스럽고 한없이 미웠다.
오랜 불화 끝에 우리 부부는 서로 위해 이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아내는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두 명을 자기가 양육하겠으니 얼마 되지 않는 기존 재산은 물론 사직하고 퇴직금까지 몽땅 줄 것을 요구하여 세상이 귀찮아진 나는 아내 요구대로 천직으로 여기며 그토록 충성을 다했던 경찰공무원 사표를 쓰고 아내에게 퇴직금을 수령하라며 통장과 도장을 맡기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기존 재산과 퇴직금을 다 주면 자식들을 책임지겠다고 나와 어린 자식 앞에서 철석같이 약속했던 아내가 정작 퇴직금을 찾게 되자, 자식들을 버려두고 짐을 챙겨 혼자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아들의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직장 잃고 재산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내가 앞으로 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하고 한숨만 나올 뿐 대책이 없었다. 자식을 버리고 재산까지 몽땅 챙겨 혼자 달아난 아내가 한없이 미웠고 찾을 수만 있다면 죽여버리고. 나도 인생을 끝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오갈 데도 없이 길바닥 신세가 된 것을 딱하게 여긴 형님의 도움으로 춥고 어두운 산동네 단칸방에서 끼니를 걸러가며 풀 죽은 아이들과 치매에 걸린 노모와 생활하면서 절망과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술로 삼개월을 보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형사가 인생의 낙오자요, 실패자가 되어 세상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다.
15년간 내 이름 뒤에 따라다니던 형사라는 직함마저 떨어져 나가고 나니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찌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라는 말씀대로 현직에 있을 때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이 붙어 다니며 아부하던 친구들이 바람같이 떠나버리고, 형제들조차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뿐만 아니라, 평소 나에게서 신세를 많이 지고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먼저 외면해버려 사람들을 만나기가 겁이 났다.
어디를 가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를 찾기 힘들어 낮에는 혼자 산에 올라가 종일토록 헤매고 다녔고, 밤이면 소주를 벗삼아 지냈다. 궁핍함 없이 지내던 아이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안타까워 부둥켜 안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너무 외로웠고 서러웠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같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를 연구한다는 청년을 만나 도통 군자가 되어보겠다고 그들이 옥황상제로 모시는 강증산이란 우상에게 수없이 절을 하며 주문을 외웠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금강산 도장까지 가서 우두머리 신을 모셔놓았다는 곳에서 도인들이라고 하는 순례자들과 합동으로 절까지 하면서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해보려 했다. 그곳에서 말하는 도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기 시작할 무렵에 교회에 나가고 있던 사촌 동생 부부로부터 연락이 와 “형님, 조카들 데리고 시원한 곳에 휴가나 갑시다. 경비는 필요 없으니 몸만 가면 됩니다. 빨리 챙겨서 우리 집으로 오세요.” 라고 하기에, 당시 마음이 답답한 상태였던데다가 여름방학이고 해서 아이들과 머리나 식힐 겸 사촌을 따라간 곳이 성경탐구모임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시달려 이내 짜증이 났고, “바캉스 간다더니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우리를 데리고 왔는가.” 하고 동생 부부에게 신경질을 내었다. 틈을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되돌아 갈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첫날 저녁 강사로 나온 분께서 창조론을 설명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설득력도 있는 것 같아 이왕 은 김에 지식이나 좀 쌓아가지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눌러 있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권 목사님의 비디오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화석이 되어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구를 공중에 매달았으며 북편 하늘에 허공을 펼쳤다는 성경 말씀을 설명하면서 자료까지 제시하기에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겨났고 모든 동물은 미생물에서 시작하여 차츰 진화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상대로 발전해 온 것이라고 믿어왔던 고정관념이 허물어지고 어쩌면 성경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시간 앞자리에 앉아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씀을 들었다.
권목사님께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통이 끊어진 것은 죄와 허물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며, 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5:21~22절과 로마서 1장 29~3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죄를 일일이 지적하고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참조)는 말씀을 하는데 그 모든 죄가 나에게 해당하는 것임을 알고, 비로소 내가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불에 들어갈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으나,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처리할 수 있을까’ 하고 잠 못 이루며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렇게 엄청나고 무서운 하나님의 계획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어김없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내 맘대로 온갖 죄를 저지르면서 내가 최고라는 교만에 빠져 인생을 살아온 것이 후회막심하였고, 일찍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많은 죄를 짓지 않고 경건하게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제발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보았으나 과연 내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금요일 저녁,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눅 15:11~32 참조), 요한복음, 로마서, 미가서, 히브리서에 있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 내 귀에 전해지고 있었으나, 나는 말씀으로 거듭나는 줄 모르고 신체상에 어떤 체험 같은 것을 느껴야 구원을 받는 것인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옆에 있던 큰아들이 먼저 구원을 받고 환하게 웃으면서 “아빠, 나 해결되었어요.”라고 소리치기에, 나는 그때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는 이사야 44장 22절 말씀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이사야 43장 25절의 말씀을 통해 내 죄가 이미 사해진 것과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영혼이 거듭난 사실을 깨닫고 한없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이 죄인을 그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침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한 후, 함께 구원받은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명예와 권력이 없어도, 비록 가진 것 하나 없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주 안에서 기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찬송가 189장)라는 찬송가를 기억해 내어 불러보니 비로소 그 가사와 내 마음이 일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지럽고 어수선했던 지난날의 고통이 사라지고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느낄 수 있었다.
구원받고 난 뒤에도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왔으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이제는 아픈 과거를 청산하고 온 가족이 믿음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친척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를 믿는 길만이 살 길임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