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도집회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형제님께서 오시더니 일주일간 같이 지낼 선생님이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왼쪽,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오른쪽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구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에 옆에 있는 친구에게 “야.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가 대답하기를 “무슨 선물인데, 받으면 좋은 거야.,’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뭔지는 몰라도 안 받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받았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왼쪽에 앉았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전도집회를 하며 그 구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자신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일요일 교회에 나가서 ‘아멘’을 하면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름대로 정의한 구원을 받은 덕택에 침례를 받게 되었고, 남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거쳐서 어느덧 대학 시험을 앞둔 고3이 되었다. 그동안 교회에서 살아온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간증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수식어들을 섞어가며 간증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허전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뭔가 나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보낸 고3 생활은 몹시 힘이 든 시기였다.
대입 시험 결과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재수를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보았다.
너는 어느 구절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니? 네가 정말 구원받았니? 하나님의 사랑이 네 안에 있니? 이 모든 것이 맞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두려움이 없느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다가, 그동안 내가 막연히 믿었던 구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막상 인정하고 나니까 이런 문제가 생겼다. ‘당장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렵고 떨리지만, 지금까지 구원을 받았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고 행동을 했는데 이제 와서 거짓 구원이라고 얘기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이번에 비디오 집회가 있으니 참석해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너무 실망하실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예상 밖의 얘기를 들은 나는 약간의 자신감을 느끼고 전도 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거짓 구원으로 7~8년의 생활을 한 나는 전도집회 때 이루어지는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이 말을 하면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오겠구나’ 하고 미리 생각하고 그다음 읽을 구절을 찾아놓고 미리 기다리면서 옆에서 말씀 구절을 못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전도집회 하루를 남겨두고 그날 설교를 하시던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성경은 사실이고, 왜 이것이 쓰였고, 왜 우리가 이것을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지 얘기를 했지만,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죄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내일 하루면 전도집회가 끝나는데 죄인인지는 알겠지만 느껴지지가 않으니 마음도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그래서 저녁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내내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집으로 갔다. 행여나 이렇게 하면 자기 최면에 빠져 내가 죄인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도 거른 채로 곧장 삼각지로 향했다. 내 마음의 답답함을 풀고자, 내가 죄인임을 느끼고자 교회에 갔지만, 설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 설교가 끝날 때쯤, 아직 성경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상담이 있다는 광고가 나왔고, 나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나 혼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벌써 많은 사람이 상담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 틈에 끼어 얘기했다.
‘남들은 구원받을 때 죄 문제로 밤잠을 설치고 울고 몹시 괴로운 날을 보낸다고 하는데 저는 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그런 느낌과 고통이 없어요.”라고 하자, 김 형제님께서는 “그럼 지옥 가면 되겠네.”라는 아주 짤막한 말씀을 해주시면서, “너는 이미 사형선고나 받은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런 감정 느낄 필요 없다.” 하면서, 조용히 있다가 지옥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꼭 자기 죄에 대한 느낌이 들어야만,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그것은 나 죄 없으니까 이 판결은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교도소에서 주는 밥 먹고, 자라 하면 자면 되는 것이다. 네가 죄인임을 못 느끼는 것은 문둥병 환자가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도 아픈지도 모르는 것처럼, 너도 이미 영혼의 문둥병 환자가 되어있다.
그렇지만 성경 그 어디를 읽어보아도 마음의 고통, 괴로움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성경 한 구절을 찾아주시면서 너에게 구원받기 전에 그런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다고 말한 형제의 이름을 넣어 이 구절을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사도행전 4장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구절을 읽고 나서야 ‘그렇구나. 구원은 누구나 다양한 방법으로 받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의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알았다 해서 내 마음의 답답함은 풀어지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무렵, 어떤 분이 질문하자 로마서 10장을 펴서 같이 읽어보자고 말씀하기에 나도 그곳을 펴서 같이 읽던 도중, 이미 그분께서는 나를 위한 처소를 준비해 놓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아, 그렇구나.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죄인임을 못 느낄 정도로 악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분이 이미 십자가에 홀리신 그 피로 모든 허물과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셨구나.’
그 순간 ‘이젠 됐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어도 나의 영혼은 주님이 책임지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상담 도중 형제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의 의지가 아닌 그분의 뜻이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이제 나가봐도 좋다고 하셨다. 그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 본 하늘, 비록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지만, 그 하늘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남들처럼 기쁨의 눈물도, 기쁨에 겨워 춤도 추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잠시 그 당시 느꼈던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한 형제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도집회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형제님께서 오시더니 일주일간 같이 지낼 선생님이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왼쪽,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오른쪽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구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에 옆에 있는 친구에게 “야.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가 대답하기를 “무슨 선물인데, 받으면 좋은 거야.,’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뭔지는 몰라도 안 받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받았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왼쪽에 앉았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전도집회를 하며 그 구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자신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일요일 교회에 나가서 ‘아멘’을 하면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름대로 정의한 구원을 받은 덕택에 침례를 받게 되었고, 남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거쳐서 어느덧 대학 시험을 앞둔 고3이 되었다. 그동안 교회에서 살아온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간증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수식어들을 섞어가며 간증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허전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뭔가 나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보낸 고3 생활은 몹시 힘이 든 시기였다.
대입 시험 결과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재수를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보았다.
너는 어느 구절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니? 네가 정말 구원받았니? 하나님의 사랑이 네 안에 있니? 이 모든 것이 맞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두려움이 없느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다가, 그동안 내가 막연히 믿었던 구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막상 인정하고 나니까 이런 문제가 생겼다. ‘당장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렵고 떨리지만, 지금까지 구원을 받았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고 행동을 했는데 이제 와서 거짓 구원이라고 얘기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이번에 비디오 집회가 있으니 참석해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너무 실망하실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예상 밖의 얘기를 들은 나는 약간의 자신감을 느끼고 전도 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거짓 구원으로 7~8년의 생활을 한 나는 전도집회 때 이루어지는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이 말을 하면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오겠구나’ 하고 미리 생각하고 그다음 읽을 구절을 찾아놓고 미리 기다리면서 옆에서 말씀 구절을 못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전도집회 하루를 남겨두고 그날 설교를 하시던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성경은 사실이고, 왜 이것이 쓰였고, 왜 우리가 이것을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지 얘기를 했지만,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죄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내일 하루면 전도집회가 끝나는데 죄인인지는 알겠지만 느껴지지가 않으니 마음도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그래서 저녁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내내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집으로 갔다. 행여나 이렇게 하면 자기 최면에 빠져 내가 죄인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도 거른 채로 곧장 삼각지로 향했다. 내 마음의 답답함을 풀고자, 내가 죄인임을 느끼고자 교회에 갔지만, 설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 설교가 끝날 때쯤, 아직 성경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상담이 있다는 광고가 나왔고, 나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나 혼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벌써 많은 사람이 상담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 틈에 끼어 얘기했다.
‘남들은 구원받을 때 죄 문제로 밤잠을 설치고 울고 몹시 괴로운 날을 보낸다고 하는데 저는 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그런 느낌과 고통이 없어요.”라고 하자, 김 형제님께서는 “그럼 지옥 가면 되겠네.”라는 아주 짤막한 말씀을 해주시면서, “너는 이미 사형선고나 받은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런 감정 느낄 필요 없다.” 하면서, 조용히 있다가 지옥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꼭 자기 죄에 대한 느낌이 들어야만,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그것은 나 죄 없으니까 이 판결은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교도소에서 주는 밥 먹고, 자라 하면 자면 되는 것이다. 네가 죄인임을 못 느끼는 것은 문둥병 환자가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도 아픈지도 모르는 것처럼, 너도 이미 영혼의 문둥병 환자가 되어있다.
그렇지만 성경 그 어디를 읽어보아도 마음의 고통, 괴로움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성경 한 구절을 찾아주시면서 너에게 구원받기 전에 그런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다고 말한 형제의 이름을 넣어 이 구절을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사도행전 4장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구절을 읽고 나서야 ‘그렇구나. 구원은 누구나 다양한 방법으로 받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의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알았다 해서 내 마음의 답답함은 풀어지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무렵, 어떤 분이 질문하자 로마서 10장을 펴서 같이 읽어보자고 말씀하기에 나도 그곳을 펴서 같이 읽던 도중, 이미 그분께서는 나를 위한 처소를 준비해 놓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아, 그렇구나.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죄인임을 못 느낄 정도로 악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분이 이미 십자가에 홀리신 그 피로 모든 허물과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셨구나.’
그 순간 ‘이젠 됐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어도 나의 영혼은 주님이 책임지신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상담 도중 형제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의 의지가 아닌 그분의 뜻이라고 얘기를 하시면서 이제 나가봐도 좋다고 하셨다. 그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 본 하늘, 비록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지만, 그 하늘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남들처럼 기쁨의 눈물도, 기쁨에 겨워 춤도 추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잠시 그 당시 느꼈던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한 형제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