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굴까?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전부 합해 놓은 사람이 나 아닐까?
나의 불행을 합해 놓으면 저 하늘까지 닿을 텐데.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를 지켜준 것이 바로 나의 자존심이었다.
어떤 이는 힘들면 힘들수록 신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데 나는 힘들면 힘들수록 나 자신을 의지하고 신을 저주하면서 살았다.
‘도대체 신이 나에게 해준 게 무어냐?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불행은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소중한 것을 늘 빼앗기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세상 사는 낙도 없고, 굳이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때가 있었다.
어찌 됐든 아무리 힘들어도 자존심에 의지해서 그럭저럭 적응하며 사는 한 불쌍한 인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둘째 누나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를 갔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누나였기에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그곳은 성경 말씀을 듣는 곳이었다.
나는 맨 뒤 전도인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씀을 들었다. 별로 앞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을 들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건성으로 말씀 듣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은 들을 것은 다 듣고 있었다.
누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 죄 있니? 너 천국 못 가면 어쩌니? 죄 있으면 지옥 가.”
그때 나는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했다.
그리고 내가 죄 있다면 그 죗값을 받겠다고 했다.
며칠간 들으면서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인데 죄인을 천국 보내고 의인을 지옥 보내지는 않으시겠지. 죄가 있다면 죗값을 받고, 죄 없으면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한 거지’
“하나님이 죄 있다고 하면 지옥에 가서 죗값을 받겠다.”는 내 말에 얼마나 누나가 답답했었을까?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분명 죄인인데, 철저하게 나는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우겼다. (마음속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나는 의인인 체했었다.)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무서울 게 없었다.
데려감이고 뭐고 죗값을 받겠다는 인간이 무서울 게 있을 리가 만무한 일 아닌가!
복음을 풀던 날, 나는 자칭 의인인 고로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하며 침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침례 이후로 나의 찜찜함은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성찬식이 시작되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고, 목사님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던 중, 나는 세례 요한을 만났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하라” (눅 3:7-8 참조)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구나.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얼마나 가증한 이중인격자인가! 세상의 모든 죄를 합해도 나만 한 죄인이 있겠나!’ 싶었다.
죄들이 나에게 몰려오는데 나는 죄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버렸다.
남들은 성찬식 때 죄 사함을 받아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때야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옆에는 둘째 매형. 둘째 누나, 막내 누나가 있었는데 모두 울고 있었다.
내 속도 모르고 둘째 누나는 내 등까지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누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에 나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가 보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날 저녁 나는 나의 마음 상태를 얘기하고 다음 날 상담을 받으러 아침 첫차를 타고 떠났다.
나의 마음속에 한 가닥 희망은 창조주도 하나님이시오, 나를 살리고 죽이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제발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참회하면 구원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상담실에 가보니 대기자가 많이 있었다. 뒤에서 기다리면서 제 앞에 계신 분이 상담하던 말씀을 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아!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한참 기다린 후 상담을 받았다.
나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 걸까요?” 하고 딱 한 가지 질문했다.
전도인이 그때 이사야 44장 22절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아, 이미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를 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나는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그냥 그렇군요! 믿어져 버리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선.
특히나 나같이 의심 많고 자칭 의인이고 원칙주의자들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구원받기 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참 꽉 막힌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구제 불능의 상태!
순해 보이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미련해 보일 정도로.
구원받은 이후로도 삶의 굴곡이야 많았지만, 나도 모르는 방법으로, 생각지도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실감한다.
한참 후, 아주 한참 후 나는 말한다.
하나님 참 엉뚱하세요!
사실은 내가 엉뚱해서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굴까?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전부 합해 놓은 사람이 나 아닐까?
나의 불행을 합해 놓으면 저 하늘까지 닿을 텐데.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를 지켜준 것이 바로 나의 자존심이었다.
어떤 이는 힘들면 힘들수록 신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데 나는 힘들면 힘들수록 나 자신을 의지하고 신을 저주하면서 살았다.
‘도대체 신이 나에게 해준 게 무어냐?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불행은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소중한 것을 늘 빼앗기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세상 사는 낙도 없고, 굳이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때가 있었다.
어찌 됐든 아무리 힘들어도 자존심에 의지해서 그럭저럭 적응하며 사는 한 불쌍한 인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둘째 누나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를 갔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누나였기에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그곳은 성경 말씀을 듣는 곳이었다.
나는 맨 뒤 전도인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씀을 들었다. 별로 앞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을 들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건성으로 말씀 듣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은 들을 것은 다 듣고 있었다.
누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 죄 있니? 너 천국 못 가면 어쩌니? 죄 있으면 지옥 가.”
그때 나는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했다.
그리고 내가 죄 있다면 그 죗값을 받겠다고 했다.
며칠간 들으면서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인데 죄인을 천국 보내고 의인을 지옥 보내지는 않으시겠지. 죄가 있다면 죗값을 받고, 죄 없으면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한 거지’
“하나님이 죄 있다고 하면 지옥에 가서 죗값을 받겠다.”는 내 말에 얼마나 누나가 답답했었을까?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분명 죄인인데, 철저하게 나는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우겼다. (마음속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나는 의인인 체했었다.)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무서울 게 없었다.
데려감이고 뭐고 죗값을 받겠다는 인간이 무서울 게 있을 리가 만무한 일 아닌가!
복음을 풀던 날, 나는 자칭 의인인 고로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하며 침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침례 이후로 나의 찜찜함은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성찬식이 시작되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고, 목사님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던 중, 나는 세례 요한을 만났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하라” (눅 3:7-8 참조)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구나.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얼마나 가증한 이중인격자인가! 세상의 모든 죄를 합해도 나만 한 죄인이 있겠나!’ 싶었다.
죄들이 나에게 몰려오는데 나는 죄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버렸다.
남들은 성찬식 때 죄 사함을 받아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때야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옆에는 둘째 매형. 둘째 누나, 막내 누나가 있었는데 모두 울고 있었다.
내 속도 모르고 둘째 누나는 내 등까지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누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에 나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가 보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날 저녁 나는 나의 마음 상태를 얘기하고 다음 날 상담을 받으러 아침 첫차를 타고 떠났다.
나의 마음속에 한 가닥 희망은 창조주도 하나님이시오, 나를 살리고 죽이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제발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참회하면 구원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상담실에 가보니 대기자가 많이 있었다. 뒤에서 기다리면서 제 앞에 계신 분이 상담하던 말씀을 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아!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한참 기다린 후 상담을 받았다.
나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 걸까요?” 하고 딱 한 가지 질문했다.
전도인이 그때 이사야 44장 22절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아, 이미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를 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나는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그냥 그렇군요! 믿어져 버리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선.
특히나 나같이 의심 많고 자칭 의인이고 원칙주의자들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구원받기 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참 꽉 막힌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구제 불능의 상태!
순해 보이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미련해 보일 정도로.
구원받은 이후로도 삶의 굴곡이야 많았지만, 나도 모르는 방법으로, 생각지도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실감한다.
한참 후, 아주 한참 후 나는 말한다.
하나님 참 엉뚱하세요!
사실은 내가 엉뚱해서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