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주님 안의 즐거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힘든 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경매에 넘어가는 집을 겨우 살려 놓으니 여기저기서 가압류가 들어오고, 사업하는 남편이 음주 단속에 걸려 손발이 묶이고, 이 빚 갚고 나면 저 빚이 터지고, 부도 때문에 쫓기고 쫓는 불편한 인간관계들, 신용을 잃어 거래처마저 등을 돌리니 일이 있어도 자재 구매마저 힘든 상황들… 

경제적인 난관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열심히 일하다 보면 해결이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남편과의 잦은 다툼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고생을 해도 해도 몰라 주고,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자기 힘들다고 술이나 마시고, 원망하는 미움이 독이 되어 갈등은 커져만 갔습니다. 행동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서 성경을 가까이 하는 모습도 가식으로 보였습니다. 


봄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적적하게 계시던 어머니께서 학교 갔다 오면 혼자 있을 손녀딸을 위해 집에 와 계셨습니다. 편안한 딸네 집에 오셔서 호강은 못 하셔도 마음고생은 안 시켜 드려야 하는데 남편과의 불화를 번번이 보여 드렸습니다.


그 전날도 남편과 다투어 뜬 눈으로 날을 새고 주방으로 나가보니 어머니께서 다리를 주무르고 계셨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다리 아프세요?” 하고 걱정스러운 인사를 건넸을 텐데, 편치 않은 마음이라 소홀히 보고 등교 준비하는 딸애 머리를 감기고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모습으로 대성통곡을 하시며 “너희 아버지가 왜 쓰러졌는지 아느냐? 네가 허리 다쳐 집에 왔을 때 그 충격으로 풍이 왔다.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네가 아버지 잡아먹었다.” 뇌성벽력이 떨어졌습니다.


딸을 보고 아버지 잡아먹었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현기증을 겨우 참으며 “이 사람하고는 더 이상은 못 살겠고,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보지 않을 거예요.” 모진 말을 남기고 딸애 손을 잡고 현관을 나와 계단을 한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안 가도 돼!” 하시면서 놀라운 힘으로, 칠순노인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기력으로 저를 끌어올렸습니다. 젊은 사람도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을 위로 끌어 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출근 시간이라 많은 사람이 보는데도 소리소리 지르시면서 “너희 집에서 일해 준 수고비 주고 가라.” 하시는 거였습니다.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어머니가 늘 감사하고 존경해 온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21살에 조상 대대로 유교 사상이 뿌리박힌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오셔서 조상 잘 모시고 순종하시며 평생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살아오신 분인데… 아버지께서 사업을 시작해 실패는 반복되고, 며느리 잘못 들어와 살림 망했다는 억울한 원망까지 묵묵히 감당하시며 당신 배 아파 낳지 않은 자식도 더 큰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소리 없이 잘 키워 주신 분인데… 그렇게 고생하셔도 끝이 없어 할머님이 병환(노망)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셔서 3년을 대소변 받아 내시니 돌아가시면서 모진 시집살이에 고생 많았다며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시고 눈 감으셨답니다. 


아직도 고생이 남았던지 아버지께서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자식들 많아도 당신 혼자 병시중하시며 수족도 못 움직이는 분을 이틀이 멀다하고 목욕시켜서 건강한 분들보다 더  깨끗하게 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시며 모진 세월 사랑으로 살아오신 분인데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니 같지 않았습니다. 혼자 조용히 머리를 식히고 싶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전화를 거니 형부가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여기저기 알려서 오빠, 언니, 형부가 다 오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딸이 어머니를 떠밀어 놓고 나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 나는 어디에 서야 하나 다리 아픈 거 안 물어본 게 화근이 되어, 이렇게 문제가 커지다니!’


태풍이 지나고 조용해졌을 때 우리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특히 어머니께서는 당신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하셨습니다. 11월 9일 아침에 눈을 뜨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구나.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 찾는 마음이었습니다. 몸속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 건조할 대로 건조해져서 작은 불씨만 지펴도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았습니다. 순간 남편에게 “당신 교회 전도 집회 언제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당황해하며 방학 때 하므로 지금은 없을 거라며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기회가 주어지려고 그랬는지 그날 오후 2시부터 근처 지역에서 집회를 시작한다는 거였어요. 전날 밤까지도 아무 계획도 준비도 없었는데 무조건 가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내일부터 한다고 해도 그사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좋은 기회가 없다며 성경책과 간단한 준비물을 챙겨두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학교 다니는 애 때문에, 사무실 때문에 갈 수가 없어, 할 수가 없어’ 늘 때문에를 입애 달고 살았는데 그날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님을 조상으로 모시고 계신 어머니라 반대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도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일 보러 가시는 어머니도 차에 태우고 안산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보이지 않던 차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브레이크를 커다란 경음과 함께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밟아대는 거였습니다. 차와 차 사이가 종이 한 장 사이로 부딪치지 않았다면 믿어지십니까? 눈앞에 벌어진 놀라움과 기적에 꼼짝할 수가 없었답니다. 

어머니께서는 불길한 징조라며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편안한 안도의 웃음으로 “우리가 이긴 거예요. 마귀가 끝까지 안 보내려고 막은 거요.” 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번 전도집회에서 사람이 주는 상처에 고통받고 신음하던 어리석은 나를 던져버리고 갈 거라고 다짐하였습니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이형제 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왜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속으로 ‘인간의 목숨은 한 정적이고 세대교체는 영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2세들을 건강하게 키우고 교육 잘해서 훌륭한 세대교체를 하는 것, 그것만 이 인간의 보람이고 목적이라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날 윤형제 님이 슬라이드를 보여 주시면서 23시간 20분 동안 궤도 정지가 됐던 사실과 지구 역행 때문인 40분의 행방을 말씀하시면서 여호수아 10장과 열왕기 20장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수수께끼가 성경 속에 답이 있었다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해 놓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저주가 내려져 황폐해진 것과 2000년 동안 핍박과 고난으로 흩어 놓으셨지만, 약속을 주셨기에 한날한시에 비둘기같이 날아와 독립하는 모습. 현재 이스라엘의 축복까지 너무나 선명하였습니다. 저희 조상 공자님이 가르쳐 주지 못한 진실을 성경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실인지를 깨닫는 순간 두려움과 놀라움에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계신 걸 너무나 잘 아니까 마음 놓고 죄짓느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서 왜 선악과라는 장치를 두어 인간을 시험하느냐? 

선악과는 인간을 훈련한 시금석이냐? 

예수님은 자기 목숨 하나 바친 걸 가지고 몇 세기를 두고 생색내느냐? 

남편에게도 공격을 위한 질문을 수없이 하였는데…. 이 교만한 입술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휴식을 취하느라 다들 자리를 비웠는데도 저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시간에 

장인순 박사님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설하시는 것을 듣고 만유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생성과 인간관계, 질서의 정연함. 어떤 수학 공식보다 더 정확한 논리, 그분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일들. 저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은 죄의 역사라고 단정 짓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는 뜻을 오해했었습니다. 저주의 땅에서 나온 곡식들이 죄의 산물이었다는 걸 몰랐던 거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오히려 큰 소리로 반문했는데 그것은 바로 너무나 부끄러운 제 모습이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왔었으니까요. 성경을 알아갈수록, 죄 문제에 눈을 떠갈수록 더욱 캄캄한 어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1월 12일 마지막 복음만 남겨 놓은 오후 시간엔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한 혹시라도 남겨 놓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데? 그 뜨거운 유황불은 어떻게 감당할까? 내 죄를 하나라도 놓칠까 봐 공책에 기록해 나갔습니다. 쭉 써 내려가다 보니 한 장이 모자랄 정도로 빽빽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사느라고 노력했는데 착하다.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내 죄가 이렇게 크다니 더욱 답답하고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죄가 너무 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어떡하나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채 매달렸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사 외면하시지 마시고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럴수록 더욱 고통스러워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하늘을 보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뵐 수 있을 것 같은 욕심에 더 간절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매달렸습니다. 드디어 저녁 시간! 아무리 태연함을 가장해도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외면하시면? 구원 못 받으면? 이렇게 무거운 큰 죄를 지고 평생 어떻게 살아가나? 차라리 눈먼 시각장애인으로 계속 살았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텐데….’


그러나 탕아의 말씀을 듣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옥 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분의 큰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 새 옷과 반지, 새 신을 준비하고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을까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겼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면 나도 구원해 주시겠구나.’ 


그때 히브리서 9장 12절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너무 감사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죄인이 뭐길래 당신의 그 귀하신 피를 바치셨나! 목이 메면서 더욱 죄스러웠습니다. 얼마 후 진정 자유의 시간이 왔습니다. 저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지워 없앴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빽빽한’ 그 단어에 견딜 수 없이 답답했는데 이렇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그랬구나. 하나님 뜻 안에는 우연은 없구나. 용서만으로. 구원만으로도 너무 벅찬데 구속까지 하시겠답니다. 이렇게 크고 행복한 구속에 빠져 저의 매일은 기쁨으로 새로워질 겁니다.


늘 즐거운 모습으로 식당에서 수고하신 자매님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돌려준다며 전도하신 형제님들. 어려운 여건에도 한 사람의 구원자를 위해서라도 전도 집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했던 유형제님, 이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여러 형제자매님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었기에 새 생명의 기쁨도 가능했을 겁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제가 구원받고 3주 후 12월 3일에 어머니께서도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유교 사상의 시조인 공자 자손, 종가댁 며느리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가정의 분란 때문에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 감사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겠지요. 


그동안 귀신을 섬기고 살아온 게 억울하다며 오빠와 동생에게 "제사는 이제 나는 모른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선전 포고를 하시고, 3월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이 사실을 알고 용서받고 가셨을 텐데 이제 당신과 내가 갈 곳이 틀리니 영영 만날 수가 없겠다’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


남편도 잠에서 깨어나 술도 멀리하고 갓 구원받은 두 자매의 좋은 오빠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어머니이지만 새 목숨 받은 것을 생각하면 제가 언니라고 농담하는, 주님 안의 즐거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주님! 새길 가라고 주신 새 신발, 처음에 불편하여 벗고 싶더라도 참고 굳은살이 생기고 물집이 고여도 편안한 제 신발 되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인내와 사랑으로 새길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