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고등학교 시절의 내 꿈은 장차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선생님들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지만, 법정 스님 등이 쓴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내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불교 쪽에서 해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마음속에 내재하여 있는 그 무엇은 나를 끊임없이 옭아매어 고통스럽게 하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무언지 모를 불안 그리고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미래가 그 시절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다가도 노인들을 볼 때는 그들의 센 머리와 굽은 허리, 주름진 얼굴의 소망 없는 표정은 영락없는 4, 50년 후의 나의 모습으로만 비쳐, 이 세상 사는 일이 허망한 인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서 이런 막연한 불안이 싹트게 된 것은 내 나이 7, 8세 되던 무렵부터였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의식적으로 하게 된 최초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뻔뻔하게, 아니 두려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떨림으로 심부름을 가기 싫어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던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고 한다. 그런 거짓말에 쉬이 속아 넘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거짓말을 더욱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큰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으며, 남의 꽃밭에서 꽃을 꺾어 온 일도 있었다.
그런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도 나에게 한 가지 강한 의문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왜 마음속으로는 착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은데 정작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는 죄를 짓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었는데, 비록 시골에 살았지만 매사에 사려가 깊고 정직한 분이었다. 우리 4남매를 키우면서도 매를 들거나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어떤 부당한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특별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직접 가르치거나 강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좌우명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선을 바라는 나에게서 부정직하고 남의 물건을 탐내는 또 다른 모순된 나를 발견했을 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거운 짐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런 까닭에 나는 점점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 갔다.
거기에 나에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마을 친구 하나가 죽은 일이었다. 지금 같으면 단순한 탈장 때문인 복막염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시골 의사가 수술 시기를 놓쳐 그만 죽게 된 사건이었다. 그 아이는 딸만 많은 집의 외아들이었는데 그런 변을 당하게 되어 조용한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 아이의 죽음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실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나였다.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로서는 그 아이 가 왜 죽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다 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 아이가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이란 분이 그 아이가 너무 착했기 때문에 죄를 더 짓기 전에 미리 데려갔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아이는 시골의 어느 악동들과는 달리 예의가 발랐고, 흔히 초등학교 아이들이 쓰는 욕지거리를 하거나 못된 짓을 않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서면 속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오늘 밤 나를 꼭 데려가 주세요. 나도 더러운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지었을 때 죽는다면 좋겠어요.’ 라고.
왜냐하면, 나의 미래란 것이 앞으로도 죄나 짓고 살아갈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번번이 살아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실망스러웠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는 내가 죽은 그 친구처럼 착하지도 않고 죄도 많이 지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무척 괴로웠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까지 교회를 한 번만이라도 다녀보기는커녕 예배당 건물마저도 먼발치로나 한두 번 볼 정도였다. 내 주위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거나 들을 수 없었을뿐더러 마을과 학교 길 어디에서도 예배당마저 볼 수 없는 그런 낙후된 곳이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흘러 목포로 중학교를 가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몇몇 친구들과 중국영화인 ‘지옥문’이라는영화를보게 되었다. 가뜩이나 죄 문제로 고민 중이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니 거의 일주일 정도는 밥이 제대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상심이 되었다.
그즈음에 나는 일기를 쓰거나 잠자리에 들 때는 하루 동안의 일을 반성해 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기억보다는 어렸을 적부터 남모르게 저질렀던 잘못들이 낱낱이 떠올라서 고통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그 죄들을 씻을 수가 있을까 하여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이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했는데도 하루를 반성해 보면 오히려 잘못된 일만 많을 뿐이었다.
와중에 그런 영화를 보았을 때의 나의 생각은 오직 지옥에 갈 방도 외에는 보이는 것이라곤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이대로 영영 지옥 가는구나 싶으니까 죽음이 너무 두려웠고 날마다 사는 그 자체가 죄였고, 죽자니 지옥이 훤히 보여 정말 그야말로 하는 수 없어서 사는 꼴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 세상이란 낙이라고는 없는 쓸쓸하고 허무한 커다란 공동묘지같이 느껴졌다.
한 때는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속으로 경멸도 하며 굳이 신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경배하는 차원이 낮은 사람들 취급도 했다. 사람이 올바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예수만 믿는답시고 행동은 무신론자와 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만사형통이라니 그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는가 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가 있어 나 자신이 죽음 앞에 떳떳할 길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들을 찾아보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고 1,2 때는 이모를 따라 성당에도 나가 보기도 했지만, 경건한 모습은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몇 줄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목마른 나를 해결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 쪽에서 그 문제를 찾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 때 고등학교 2년 선배인 채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불교학 입문이니 하는 불교 서적을 끼고 다니는 나더러 성경을 권하며 성경을 최초로 선물한 사람이 그였고, 그 때문에 꿈에서도 바라던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 바로 채 선배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만 옳다고 강권하며 나를 전도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장로 교회들을 가보자고 하여 나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스스로 비교 판단하게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마저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나는 왜 불경에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하면서도 성경에는 여태 그런 관심을 두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나의 관심은 교회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래, 알려면 확실하게 알아야지 적당히는 아니다.’
알려면 철저하게 알아야겠구나 싶었다. 나는 참되자고 믿었는데,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도무지 널 모르겠다, 네가 다닌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있겠는가 싶으니까 섣불리 어느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행여 채선배가 다니는 교회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낸 기간이 5년이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로 일요일이면 채 선배를 따라 교회를 나가고 선배를 따라다니며 내 나름으로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경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긴 있구나 하는 점과 또 하나는 이 교회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보이는 어떤 확신이었다.
그러다가 전남 완도에 속한 낙도의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교통이 불편한 벽촌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도 있긴 있었지만, 그보다는 교회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불안감이었다. 더구나 육지로 나올 때마다 타야 하는 배는 늘 나를 두렵게까지 하곤 했다.
내가 성경에 관심을 두고 뭔가를 찾고자 하는 것을 아신 같은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나더러 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가 보자고 자꾸 권했다. 일요일에 그냥 있기보다는 아무 교회라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분의 권유를 못 이겨 몇 번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설교를 계속 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3주째 되던 날 교감 선생님을 만나 다니는 교회가 따로 있으니까 더는 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구원은 받지 못했지만 성경 말씀을 정확히 전하는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그 교회가 무슨 교파에 속하느냐고 물으시며 한번 잘못되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며 경고하는 것이었다.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그분에게 나는 어쩌면 도도한 투로 한마디 했다. 구원받는데 정통이면 어떻고 이단이면 어떠냐고. 지옥 가는 정통 교회보다는 천국 가는 이단을 택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일 년 뒤 주님은 극적이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로 이끈 채선배와 같이 근무하게 이끄셨고 나는 그와 함께 꾸준히 일요일 설교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교회를 알게 된 지 5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전도집회라든 자기 개인 상담도 받은 일이 없이 오직 일요일 설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구체적인 사실이고 예수 님의 행적이 부동의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다 보니 무엇이 옳은가 하고 마치 판단자 위치에 있던 뻣뻣한 목과 완악한 마음이 꺾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말할 수 없는 초라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구원받은 무리가 모두 들림 받아 떠나가면 어쩌나 하는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런 답답한 상태에서 잠언, 전도서, 로마서를 차례로 읽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에서 해결되었다.
결국, 죄로 죽었던 나의 영이 마침내 내가 가장 멸시하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두려움과 고통에 종지부를 찍고 끝이 나게 된 것이다. 또한, 주님은 출애굽기와 히브리서의 생생한 말씀으로 처음 구원을 받고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다시금 굳게 잡아 주셨다.
주님께서는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나를 느긋한 채선배로 하여금 원격 조정으로 5년간을 끈질기게 교회로 인도 하셨던 것이다.
한 때는 물질적인 이기심 때문에 세상으로 빠질 뻔한 적도 있지만, 죄밖에 지을 수 없는 나 같은 천한 인간을 긍휼히 보시고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때마다 말씀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구원을 받고 나서 말씀을 통해서 한 번 교회에 대한 확신과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생활로 인도하신 주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구원의 뿔이 되어 주셨다.
또한 신앙생활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교회의 많은 성도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도 늘 주 안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며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 본다. 또한, 우리 주변에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말씀 가운데서 사는 모습으로 비치어 그들에게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그 어떤 사람을 위해.
살아가면서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오늘도 감사한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내 꿈은 장차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선생님들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지만, 법정 스님 등이 쓴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내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불교 쪽에서 해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마음속에 내재하여 있는 그 무엇은 나를 끊임없이 옭아매어 고통스럽게 하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무언지 모를 불안 그리고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미래가 그 시절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다가도 노인들을 볼 때는 그들의 센 머리와 굽은 허리, 주름진 얼굴의 소망 없는 표정은 영락없는 4, 50년 후의 나의 모습으로만 비쳐, 이 세상 사는 일이 허망한 인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서 이런 막연한 불안이 싹트게 된 것은 내 나이 7, 8세 되던 무렵부터였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의식적으로 하게 된 최초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뻔뻔하게, 아니 두려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떨림으로 심부름을 가기 싫어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던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고 한다. 그런 거짓말에 쉬이 속아 넘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거짓말을 더욱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큰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으며, 남의 꽃밭에서 꽃을 꺾어 온 일도 있었다.
그런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도 나에게 한 가지 강한 의문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왜 마음속으로는 착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은데 정작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는 죄를 짓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었는데, 비록 시골에 살았지만 매사에 사려가 깊고 정직한 분이었다. 우리 4남매를 키우면서도 매를 들거나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어떤 부당한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특별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직접 가르치거나 강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좌우명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선을 바라는 나에게서 부정직하고 남의 물건을 탐내는 또 다른 모순된 나를 발견했을 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거운 짐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런 까닭에 나는 점점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 갔다.
거기에 나에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마을 친구 하나가 죽은 일이었다. 지금 같으면 단순한 탈장 때문인 복막염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시골 의사가 수술 시기를 놓쳐 그만 죽게 된 사건이었다. 그 아이는 딸만 많은 집의 외아들이었는데 그런 변을 당하게 되어 조용한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 아이의 죽음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실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나였다.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로서는 그 아이 가 왜 죽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다 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 아이가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이란 분이 그 아이가 너무 착했기 때문에 죄를 더 짓기 전에 미리 데려갔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아이는 시골의 어느 악동들과는 달리 예의가 발랐고, 흔히 초등학교 아이들이 쓰는 욕지거리를 하거나 못된 짓을 않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서면 속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오늘 밤 나를 꼭 데려가 주세요. 나도 더러운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지었을 때 죽는다면 좋겠어요.’ 라고.
왜냐하면, 나의 미래란 것이 앞으로도 죄나 짓고 살아갈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번번이 살아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실망스러웠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는 내가 죽은 그 친구처럼 착하지도 않고 죄도 많이 지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무척 괴로웠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까지 교회를 한 번만이라도 다녀보기는커녕 예배당 건물마저도 먼발치로나 한두 번 볼 정도였다. 내 주위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거나 들을 수 없었을뿐더러 마을과 학교 길 어디에서도 예배당마저 볼 수 없는 그런 낙후된 곳이었다.
그 뒤로 세월이 흘러 목포로 중학교를 가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몇몇 친구들과 중국영화인 ‘지옥문’이라는영화를보게 되었다. 가뜩이나 죄 문제로 고민 중이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니 거의 일주일 정도는 밥이 제대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상심이 되었다.
그즈음에 나는 일기를 쓰거나 잠자리에 들 때는 하루 동안의 일을 반성해 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기억보다는 어렸을 적부터 남모르게 저질렀던 잘못들이 낱낱이 떠올라서 고통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그 죄들을 씻을 수가 있을까 하여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이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했는데도 하루를 반성해 보면 오히려 잘못된 일만 많을 뿐이었다.
와중에 그런 영화를 보았을 때의 나의 생각은 오직 지옥에 갈 방도 외에는 보이는 것이라곤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이대로 영영 지옥 가는구나 싶으니까 죽음이 너무 두려웠고 날마다 사는 그 자체가 죄였고, 죽자니 지옥이 훤히 보여 정말 그야말로 하는 수 없어서 사는 꼴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 세상이란 낙이라고는 없는 쓸쓸하고 허무한 커다란 공동묘지같이 느껴졌다.
한 때는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속으로 경멸도 하며 굳이 신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경배하는 차원이 낮은 사람들 취급도 했다. 사람이 올바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예수만 믿는답시고 행동은 무신론자와 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만사형통이라니 그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는가 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가 있어 나 자신이 죽음 앞에 떳떳할 길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들을 찾아보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고 1,2 때는 이모를 따라 성당에도 나가 보기도 했지만, 경건한 모습은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몇 줄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목마른 나를 해결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 쪽에서 그 문제를 찾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 때 고등학교 2년 선배인 채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불교학 입문이니 하는 불교 서적을 끼고 다니는 나더러 성경을 권하며 성경을 최초로 선물한 사람이 그였고, 그 때문에 꿈에서도 바라던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 바로 채 선배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만 옳다고 강권하며 나를 전도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장로 교회들을 가보자고 하여 나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스스로 비교 판단하게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마저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나는 왜 불경에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하면서도 성경에는 여태 그런 관심을 두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나의 관심은 교회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래, 알려면 확실하게 알아야지 적당히는 아니다.’
알려면 철저하게 알아야겠구나 싶었다. 나는 참되자고 믿었는데,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도무지 널 모르겠다, 네가 다닌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있겠는가 싶으니까 섣불리 어느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행여 채선배가 다니는 교회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낸 기간이 5년이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로 일요일이면 채 선배를 따라 교회를 나가고 선배를 따라다니며 내 나름으로 얻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경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긴 있구나 하는 점과 또 하나는 이 교회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보이는 어떤 확신이었다.
그러다가 전남 완도에 속한 낙도의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교통이 불편한 벽촌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도 있긴 있었지만, 그보다는 교회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불안감이었다. 더구나 육지로 나올 때마다 타야 하는 배는 늘 나를 두렵게까지 하곤 했다.
내가 성경에 관심을 두고 뭔가를 찾고자 하는 것을 아신 같은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나더러 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가 보자고 자꾸 권했다. 일요일에 그냥 있기보다는 아무 교회라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분의 권유를 못 이겨 몇 번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설교를 계속 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3주째 되던 날 교감 선생님을 만나 다니는 교회가 따로 있으니까 더는 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구원은 받지 못했지만 성경 말씀을 정확히 전하는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그 교회가 무슨 교파에 속하느냐고 물으시며 한번 잘못되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며 경고하는 것이었다.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그분에게 나는 어쩌면 도도한 투로 한마디 했다. 구원받는데 정통이면 어떻고 이단이면 어떠냐고. 지옥 가는 정통 교회보다는 천국 가는 이단을 택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일 년 뒤 주님은 극적이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로 이끈 채선배와 같이 근무하게 이끄셨고 나는 그와 함께 꾸준히 일요일 설교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교회를 알게 된 지 5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전도집회라든 자기 개인 상담도 받은 일이 없이 오직 일요일 설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구체적인 사실이고 예수 님의 행적이 부동의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다 보니 무엇이 옳은가 하고 마치 판단자 위치에 있던 뻣뻣한 목과 완악한 마음이 꺾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말할 수 없는 초라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구원받은 무리가 모두 들림 받아 떠나가면 어쩌나 하는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런 답답한 상태에서 잠언, 전도서, 로마서를 차례로 읽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에서 해결되었다.
결국, 죄로 죽었던 나의 영이 마침내 내가 가장 멸시하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두려움과 고통에 종지부를 찍고 끝이 나게 된 것이다. 또한, 주님은 출애굽기와 히브리서의 생생한 말씀으로 처음 구원을 받고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다시금 굳게 잡아 주셨다.
주님께서는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나를 느긋한 채선배로 하여금 원격 조정으로 5년간을 끈질기게 교회로 인도 하셨던 것이다.
한 때는 물질적인 이기심 때문에 세상으로 빠질 뻔한 적도 있지만, 죄밖에 지을 수 없는 나 같은 천한 인간을 긍휼히 보시고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때마다 말씀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구원을 받고 나서 말씀을 통해서 한 번 교회에 대한 확신과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생활로 인도하신 주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구원의 뿔이 되어 주셨다.
또한 신앙생활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교회의 많은 성도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도 늘 주 안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며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 본다. 또한, 우리 주변에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말씀 가운데서 사는 모습으로 비치어 그들에게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그 어떤 사람을 위해.
살아가면서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오늘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