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믿음으로의 여정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까?

어려서부터 주위의 사랑이나, 부모님의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으며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난히 살아온 것에 대해 나는 누군가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무난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반문을 할 때면 나 혼자의 답은 늘 나의 사주팔자라고 종결짓곤 했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승리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며, 승리자의 승리를 위한 방법을 보면 영광스러운 그 이면에는 비열하고 비굴한 면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정의로운 승리자에게는 기쁨의 영광이 있지만, 비굴한 승리자는 병들고 오염된 씨앗들을 뿌리고 다니며 그것으로 이 세상을 마비시킨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그를 옹호하고, 두둔하는 무리가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양면성 속에서 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까’라는 질문에 늘 ‘내일이 있기 때문에’라고 답을 했었다. 내일은 미래이고, 미래는 희망과 꿈을 그리는 인간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또 옷을 입고, 품위를 갖추며 내 행동과 말투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내가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면서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고 답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산다는 것은 내일이 있고, 동고동락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참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군상들 대부분은 욕심이 죄인 것도 모르고, 내일의 더 많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혼돈된 종교와 참신앙

학창 시절 칼 마르크스 등의 공산주의 이론을 많이 접했다. 이 이론들의 요점은 평등이다. 인간의 능력이 무시되고, 단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천국이라고 한다. 어떤 한 사람의 절대적인 권력 하에서 즐거움이나 슬픔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어떤 종교는 수천 명이 절대적인 권위자에 의해 이국적 합동결혼식을 하는가 하면 어떤 종교는 데려감이라는 명목으로 다수 사람을 우롱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느 산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운영해볼까, 아니면 내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교주로서 행세를 해보면 어떨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것은 사회 혼란이요,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종교란 인간이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만들고 허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어느 사찰의 누군가가, 어느 교회의 어떤 목사가 신문 일 면의 머리기사에서 지탄받고 있는 내용의 기사를 볼 때면 속이 느글거리고 구역질이 날 때도 있었다. 


내 친구 하나는 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재검을 받는 과정에서 엄청난 심리적 갈등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 몹쓸 병에 걸렸을까?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초조해지고 자기를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고 한다. 그는 정말 자기가 참된 신앙을 가졌더라면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었고,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재검 결과에서 1차 검진이 오진이란 판정을 받았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바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인위적인 종교가 이렇듯 회의적이라면, 신앙은 참 진리를 비추는 빛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진정한 믿음이 싹트지 않을까! 인위적인 것과 참 진리의 차이를 종교와 참 신앙으로 구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진리의 깨달음

그러던 어느 날, 업무적으로 만나게 된 신앙심이 두터운 어떤 자매로부터 진화와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 진화론뿐이었는데 그 자매는 창조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자매는「진화냐, 창조냐」라는 책을 한 권 나에게 주었다. 내가 그것을 재미있게 읽으며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들 무렵, 그 자매는 또 나에게「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책을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철학책처럼 딱딱하고 이해가 어렵고 읽으면서도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야.' 하는 등 마음의 갈등이 심하게 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몇 번 더 마음을 집중하여 읽어보았으나 신앙에 대한 갈등만 더 증폭되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부터 죄가 들어오고 그의 후손들의 살인 행위가 시작되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부정, 하녀와의 부정, 또 하녀에서 태어난 자의 새로운 종교의 창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편애, 형의 자리를 넘보던 아우의 장자권 탈취 등등의 사건들이 나의 신앙에 대한 갈등을 증폭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같은 갈등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참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무척이나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성경에는 그 어떤 참 진리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리라.' 라는 생각을 하던 중 전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월 13일 저녁 설교 때 “사람과 짐승은 죽어 땅으로 가지만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자기의 집으로 간다"는 말씀에 '참진리란 이런 것이구나, 이것이 신앙의 목적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예수님의 손에 못 박힌 자국을 확인해야겠다는 도마의 말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참조)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음,맞아! 바로 이거야. 신앙이란 믿는 것이 보는 것이야. 믿으면 모든 참된 것이 보여.’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큰 진리의 말씀이었다. 의심과 부정을 더해 결국은 의심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믿음이 증폭될 때 참 신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면서부터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림과 부활, 또 닥쳐올 환란과 재림 등의 말씀에서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 현재까지도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6-7)


여기에서 나는 ‘기이히’라는 말에 대하여 또 다른 고민을 했다. ‘구원이란 게 무슨 신비성이 있구나, 그러니까 성경에도 기이히라고 말씀하셨지 ’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신 것이나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거나,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처럼 구원이 나의 육신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권 목사님의 기이히란 그런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서 문제가 해결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 38:17 참조)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이 말씀에서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았다. 나는 믿음과 죄 사함의 구원을 받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4 참조) 그 즐거움과 희열은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신령한 젖을 먹고, 또 튼튼히 자라가기 위해서 나보다 앞서 구원받은 이들과 교제를 나누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나를 주님이 인도해주셨고,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줄 믿는다. 그동안 저를 구원받기까지 보살펴준 형제자매들께도 이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