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학을 좋아했다. 그러던 나는 막내 누나 덕분에 중학교 2학년 때 성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른 봄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때부터 나는 복음을 듣기 시작했고, 그해 7월까지 듣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 개월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게 희미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니?’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모르겠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어떨 때는 계신 것 같고 어떨 때는 안 계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알지만,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지옥이 있다면 나는 지옥 간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혹시나 하나님이 계실까 봐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한 형제님과 상담을 하는 중에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면 구원받잖아요.”라는 말을 했다. 정말로 그 당시 내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 그 형제는 “그럼 너는 믿니?’라고 물었다. 나는 맘속에서 한참 고민 끝에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의 불안의 세월은 시작되었다. 내 입으로 믿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후 몇 개월 동안 고민이 있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거지? 

예수님을 믿으라는 건가?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도대체 예수님을 믿으라는 소리는 문법에도 안 맞잖아. 

예수님이 옛날에 살았다는 것을 믿으라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말해야지 무턱대고 믿으라는 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잖아.’ 


그래서 나는 항상 두려웠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믿어라. 그러면 구원이다.”였다. 그래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차근차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하고 그 형제와 상담하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중에 불현듯 생각이 났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나는 죄인이었는데 바로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때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이야기…. 또 내가 죄인이라는 이야기,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야기…. 모두가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외에는 전혀 연결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맘속에 ‘이젠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밤부터는 너무나 편하게 잘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서 불안한 마음과 함께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아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 다르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을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은 불안한 것일까? 

구원 이야기만 나오면 왜 신경이 써지고 구원 간증하라면 왜 이리 부담스러운가? 

이것이 만일 구원이 아니라면 지난번에 느꼈던 평안함과 깨달음은 무엇인가? 

믿어지는 것인가? 믿는 것인가? 여러 가지 질문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때에는 정말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판단해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너무 너무나 답답하고 불안한 세월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는 맘속에 한가지 불평이 생겼다. 하필이면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이런 방법으로 하신 것일까? 

차라리 천사를 보내서 ‘너는 구원받았다.’’ 하고 알려 주면 평생 안심하고 살 텐데 왜 내 마음에 따리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고 안 믿으면 지옥 가게 했을까? 

그리고 구원은 행위로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게 달려 있으니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행위가 아닌가?



어쨌든 나는 믿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의심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믿는다는 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내 의지로 조정이 안 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첫째는 감정이었다. 예를 들면 화나는 것이다. 내가 굳은 의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치밀어 오른 분노를 삭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예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나의 결심이나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떤 기분 나쁜 상황이 닥치면 우선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분노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에 내 의지가 작용해서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잡념이라고 할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죄에 대한 생각이라든지 상상이라든지 의심 등이 그것이었다. 예를 든다면 좋은 물건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훔치는 방법이 떠오르거나, 좀 야한 그림을 볼 때 떠오르는 좋지 못한 생각들도 또한 내 의지를 앞서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생각들이 떠오른 후에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하면 머리를 흔드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셋째는 육신의 요구였다. 배고프다든가 졸리다든가 아프다든가 하는 것들도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적다고 느꼈다. 지금은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내가 진짜 주인이라면 왜 내 맘대로 못 하는 것이 더 많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남들에게는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내내 불안에 떨며 생각해온 내용이다. 

결국, 나는 시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는다는 것은 내 의지나 결심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구원이 왜 은혜인가가 확실히 이해된다. 구원은 내 의지나 결심이나 희망이나 행위나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울며불며 믿게 해달라고 해도 그것은 주님 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내가 무엇을 했다든지 아니면 얼마나 간절히 바랐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주님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주님 맘이었다. 내가 어떠한 간절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 나를 구원하실 마음이 없다면 나는 지옥 가는 것이었다. 또 설사 내가 그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주님이 구원하시기로 마음먹으셨다면 나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만일 주님이 나를 지옥 보내시기로 하셨을지라도 원망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당연하였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정당하고 합당한 것인데도 나는 나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마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안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원망했던 것이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의무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서 인정될 때 나는 내게 주어진 슬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 처지가 너무 처량하고 슬플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었다. 단지 나는 나의 죄악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의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이 하시리라는 것이었다. 지옥을 보내든 천국을 보내든지 그것은 주님의 일이었다. 


내가 확인할 것은 ‘주님이 나를 어찌하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한 말씀을 문득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수십 번이나 읽었고 또 수십 번도 더 들어서 외우다시피 되었지만, 그 말씀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그 말씀은 내 평생을 뒤바꾸어 버렸다. 


주님은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셨다. 처음부터 내 의견이나 내 뜻은 전혀 관심도 없으셨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만일 주님이 나와 상의하시고 나와 계약을 맺고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는 확실히 안다. 나는 내 구원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주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내가 내 구원마저도 팔아먹을 놈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주님은 구원을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다가 놓으신 것이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나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다. 설사 내가 나의 구원을 취소하려고 심히 저주하고 욕할지라도 나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주님은 믿음을 주셨다. 예전에 믿으려고 노력했어도 불가능했던 것처럼 이제는 안 믿으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진실로 말하거니와 그것은 기적이다. 세상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꽃이 핀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롬 8:3 참조)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89년 겨울부터 90년 봄, 이 사이의 일이다. 날짜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일부러 날짜를 기억하지 않은 것 같다. 내게는 그 날짜를 기억한다거나 복음 구절을 기억한다는 게 별 의미가 없었고 또 지금도 그렇다. 


내게는 예수님이 어느 날 어디서 돌아가셨는가를 알아보는 것보다는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구원받은 특정한 구절은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