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

 나는 목포에서 육 남매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 남매를 둔 가장의 책임을 지기보다는 화투 하는 노름에 더 열중하셨기에 우리 가족은 무지와 무관심 속에 버려졌다.

 끼니 때울 걱정으로 일관된 가난한 살림살이를 아버지 대신 꾸려 나오시던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변까지 받아내야 할 정도로 중증이어서 이사를 할 때도 등에 업혀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어머니를 돌봐야 했던 나는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글자도 온전히 터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화책을 좋아한 나머지 만화책을 자꾸 들여다보는 중에 한글을 깨칠 수는 있었다. 고향에 있는 친척 중에 정란이라고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학교에 가고 싶어 애가 탔다. 그 당시에 오빠들은 자수성가하여 돈을 잘 벌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학비를 대는 일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관심을 두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은 심한 상처를 받았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나는 어머니의 병시중하는 일에 진력이 나 무작정 상경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와 함께 난생처음 서울역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막막할 뿐이었다. 어리고 학력이 없다시피 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세파에 밀려 떠다니며 서른 살에 남편을 만나기까지 땅속의 두더지처럼 어두운 인생을 살아왔다.


 내 마음속에는 늘 하나의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차츰 악화하여 나중에는 정신쇠약으로 심한 공포증을 느끼게 되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운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 안간힘을 쓰다가 얻은 일종의 신경증세였다.


 처녀 시절에는 한 많은 인생살이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술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 하나의 위안거리가 되어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온갖 세상만사를 잊을 수 있었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운명은 나를 그토록 심하게 혹사한 것이다.


 삼각지에는 내가 자주 찾아가는 단골 술집이 있었다. 그 술집의 여주인은 다른 사람 같지 않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정과 순수한 마음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술에 많이 취해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지 않도록 그 언니는 푸짐한 안주를 우선 먹게 한 후 정량의 술을 주고는 많은 이야기로써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물론 나는 그 언니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듣기에 좋았다. 그 핵심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랑은 내가 갈구하고 있는 어떤 것과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언니네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토록 진심 어린 말들을 나에게 건네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었던가? 나에게 인생에 대해,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만큼 상세히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언니네 부부는 성경을 알고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음식점 겸 술집을 경영하던 차에 내가 그 사람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내 생에서 그들과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다.


 나는 그 당시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가 기독교의 원뿌리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성당에 나가 고해 성사를 할 때 신부에게 내 지은 죄를 고하면 인제 그만하라고 할 정도로 죄목이 많았다. 죄를 물처럼 먹고 마시는 생활을 하면서도 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언니 집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언니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성경 이야기를 듣고 내 죄를 생각할 때 가장 큰 죄로 떠오른 것이 우상 숭배한 죄였다. 나는 수없이 마리아상 앞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사실을 고했다. 신부 앞에서 고해 성사할 때 고백해야 했던 그 무수한 죄보다는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죄가 그제야 뚜렷이 알게 된 것이다.


 죄를 알고 구원받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중 나는 환상 속에서 내 죄 덩어리가 바닷속에 집어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안심을 하고 남편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몸은 계속 아프고 정신력이 약해져서 많은 환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남편은 내가 성경을 알고 죄에서 사함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환상에 시달리고 악몽을 꾸는 것을 보고 ‘왜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그러느냐?’면서 남편은 구원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보아야겠다고 상담실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그도 죄에서 해방을 받고 온 것이었다.


 남편은 구원받은 후에 잠깐 세상에 휩쓸려 살았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른 후 세상 풍파에 질린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나 또한 구원받은 후 5년이 지나기까지도 의심과 두려움과 무서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다가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는 말씀으로 확실한 평안을 찾았다. 


 5년 동안 ‘내가 구원받았을까? 구원받았으면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하는 의심 속에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뚜렷이 새겨진 것을 알고부터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구나’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 가지 잊지 못할 슬픔은 친정어머니께서 병상 중에서 복음 테이프를 듣기 원하셨으나, 내 사는 일에 바빠서 그 테이프를 전달해 드리지 못한 채 어머니가 세상을 운명하신 것이다. 나는 비로소 뼛속 깊이 흐르는 눈물로 회개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나는 내 어머니의 영혼에 대해 그토록 무심했는가? 내가 살려고 어머니를…….’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으나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그 일로 인해 나는 나머지 가족들의 영혼 문제에 관한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나섰다. 우리 가족도 이제 조카들까지 일곱 명이 구원을 받았다. 오직 주께 감사할 뿐이다. 이 구더기 같은 인생에 빛을 주시고, 더 나은 광명 속으로 인도해가실 주님께 한없는 찬송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