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공인으로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불만이랄까 성에 차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어요. 그런 제가 어느 날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어요. 대학을 코스모스 졸업하고 8년 만에 처음으로 친구들 틈에 끼어서 나들이를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목이랑 척추를 다쳐서 두 달 정도를 입원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제 인생이 말짱 꽝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침대에 멀거니 누워 꺼벙하게 있으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명예나 돈보다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저를 헤아려보면 일을 시작한 지도 8년째로 접어드는데 아무리 결산을 해 보아도 빈주먹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아는 공인으로서의 제 모습과 실제의 저는 너무도 달랐어요. 속에서는 항상 뭔가 성에 안 차는 것이 있었지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좀 살맛 나게 사나?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마음먹고서는 오랫동안 ‘참선’을 했어요. 우연히 인연이 맞아떨어져서 내면을 관찰했어요. 그 수행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가부좌를 틀고 촛불을 켜 놓고 하루 동안의 모든 일을 반성해 보곤 했어요. 마음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없이 마취한 상태처럼 마음이 무덤덤해져요.
그러던 사이에 어떤 선배가 성경 공부하러 가는데 저를 데리고 갔어요. 성경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싫어요. 찾는 자는 찾고, 구하면 얻을 거라고 했으니 나는 내 식대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 세상에서 무엇이나 한 길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에는 다 어떤 생명의 근본과 만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내 생각을 한번 왕창 부수어버려야겠다 싶어 주변을 정리하고, 모든 일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났지요. 유럽을 죽 돌았어요. 그때 저는 티베트나 히말라야에 가서 도를 닦아 해탈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유럽에서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하면서도 매일 참선을 했어요. 길바닥이나 절벽 꼭대기에서도 하고 매일 오랫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좌선했는데 점차 제 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든 것을 이렇게 닦으면 과연 내 마음속의 번뇌가 없어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느닷없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아느냐?’ ‘아, 그거야 모르지, 내일 죽을 수도 있고, 그 흔한 교통사고에 걸릴 수도 있고…’ 오죽이나 이 세상에 사고가 잦아요? 느닷없이 가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파리 목숨이 우리 인생인데요.
생명이 어디 달려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마음을 닦는다고 앉아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지요.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이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마음이 더러운 상태로 그냥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저는 죽은 다음에 뭔가 있다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제가 열세 살 때 돌아가신 후부터는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갖고 있었지요. 만약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아주 죽은 후에도 단절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는 어떤 연결이 있는 거다 싶었어요.
종종 꿈에 아버지를 뵙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그러한 연결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테 일일이 이야기는 안 했지만, 어린 마음속에도 죽음으로 끝은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요. 그런데 마음을 덜 닦고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한심했어요.
그러던 차에 배낭여행 길에 유럽의 후배네 집에서 성경을 한 권 얻었어요. 참선하고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잤어요. 욥기 잠언 시편 등 아무 데나 펼쳐서 읽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나는 여행지를 미국으로 옮겨 바로 그 땅에서 내가 수행해온 자아 찾기가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알게 된 사건을 맞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요가나 참선이 유행이었는데, 인도의 신비한 요가 집단에서 열심히 살다가 도망 나온 독일 유명언론인의 영화를 보게 된 것이죠. 그 종교집단의 홍보를 위한 영화였고, 거의 다큐멘터리 형식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찾는 길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히말라야나 티베트로 가지 말고 집에 가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몇 번 만났던 제 친구의 언니를 작별 인사차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분은 저와 참선 공부를 같이 했던 분이었고 저로서는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지요. 그간의 여행길에서 수행한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그분이 저를 조용히 보더니만 자기는 이제 인생의 해답을 얻었다고 말을 해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그 답이 이미 성경 속에 있었다고 이야기했고 그러잖아도 제가 혼자서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하니까 성경은 함부로 읽으면 안 되고 깨달은 사람이 길잡이 노릇을 해 주면 도움이 된다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단은 한번 들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요.
저는 지금 당장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성경을 가르치는 분은 자기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저녁 시간에나 틈을 낼 수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당장 그분을 보러 가겠다고 우겼어요. 다행히 곧 연락되더군요. 그런데 성경을 가르쳐 준다는 그 사람의 첫인상부터가 못마땅하고, 그 사람이 쓰는 단어도 너무 비위가 틀리고 참 이상한 일이 다 생기더라고요. 저는 그래도 저 스스로 경위가 바르고 예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먼저 원해서 부탁했고 남의 일하고 들어와서 쉬는 시간을 통째로 빼앗으면서 도대체 웬만큼 싫다는 느낌보다도 너무나 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참 별났어요.
몇 번을 다니다가 혼자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지요. 혼자 틀어박혀서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별것 다 해보더니 막판에는 예수쟁이까지 되려는구나 하면서 비웃어요. 마음을 집중해서 끝까지 한번 듣고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제 마음을 흩어놓는 일들이 계속 생기더군요.
나중에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친구 집에서 가출해 버렸어요. 이 세상을 창조한 어떤 존재를 꼭 알고 싶어서 집을 떠나 가난한 배낭여행을 하고 있지만 여태까지 해 왔던 일이 모두 다 꽝이었으니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기분이었지요. 결국,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채로 그 선배 집에 틀어박혀 버렸어요.
그동안에, 영사관에 실종 신고도 들어가고, 납치되었다는 별의별 소문이 다 났던가 봐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이야기대로 한번 해보겠다 하고 권 목사님 오디오 테이프, 책, 비디오테이프와 매일 씨름을 했어요.
옆에서도 많은 충고를 해주시면서 네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 짐을 지고 서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라고 했으나 그게 참 잘 안 돼요.
낮은 자리, 은혜가 내리는 그 자리를 제대로 찾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제 옛 생각의 대가 너무 세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상태로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갔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다 포기하고 나중에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혼자서 그렇게 씨름을 하면서 제 양심이 얼마나 무딘지도 알겠더라고요.
성경에 의하면 엄연한 죄인인데 뼛속 깊이 크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되지를 않았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에서의 그 회개가 저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나만큼 바른 사람 나오라 해. 누구든 내 상황에서 나만큼 하고 살기도 쉽지 않을걸.’ 사람끼리 견주어 보면, 다 저마다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킬 거리만 있겠죠. 그러나 사람의 거울이 아닌, 하나님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보는 게 필요한 거예요.
성경은 시작부터 끝 가지 편을 가르는 이야기예요. 빛과 어둠, 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이렇게 편을 가르고 있어요. 나 역시 이 세상 신 밑에 있다는 것,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어요.
새 한 마리가 좁은 새장에 갇혀 있을 때는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새 한 마리를 남산만 한 데다가 풀어주고 위에 덮개를 해 놓으면 그 새는 자기가 새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3주 정도를 씨름했어요. 나중에는 반 실성한 것같이 되더라고요. 자신을 알기가 그렇게나 어려운지!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뼈저리게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어요.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죄. 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서 가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던 저 자신이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저를 보는데도 제 눈빛이 그렇게 무서워요. 성경을 통해서 가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어떤 유혹 같은 것이 간간이 있었죠. 하루에 16시간 정도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는데 잠깐 눈 붙이는 시간에 꾸는 꿈도 성경과 연관되는 것이었어요.
꿈속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제 마음 한구석에서 ‘ 아니야’ 하면서, 아주 크게 거부하고 있었어요. 꿈을 깨고 나면 식은땀이 흘러요. 제가 하나님 편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알게 되었어요.
뉴욕 허드슨강이 얼어 얼음조각이 둥둥 떠 흘러가는 그 추운 겨울에 그 집 베란다에 섰는데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강물에 떨어져 죽을 것 같아요. 여태까지는 내 의지로 산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실은 제 영혼이 죽어 있었고 살아있다고 하지만 죽어있는 자신이기에 강물에 퐁당 빠져 진짜로 죽어 버려도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일 뿐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때가 크리스마스 전이라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하고 있어요. 복음에 대한 말씀은 제가 너무 많이 듣고 읽어서 줄줄이 다 외워요. 성경에 충실하게 만든 복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벤허 등의 성경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더군요. 성경 이야기로 연결되어가고 있는 영화를 몇 편 보면서 저 자신한테 계속 진저리가 쳐졌어요
중풍 환자처럼 벌벌 떨면서 그 영화들을 봤고 며칠이 지나서 어느 날, 말씀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었어요. 이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쓰는 단어들이 모두 다 싫었어요. 사탄, 마귀, 간증, 거듭남, 구원 이런 단어들이 모두 듣기 싫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야말로 사탄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는데도 성경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요. ‘하나님이 나도 사랑하시겠지’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여태까지 저를 그렇게 총애해 마지않던 마귀는 마지막까지도 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네가 받은 구원이라는 것이 정말이냐?’라는 속삭임으로 구원의 확신을 하지 못하게 해요.
저는 진짜로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가짜 구원을 받느니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거듭나는 체험을 하고서 저는 사흘 동안 잠잠히 있었어요.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구원이 더욱 확실해졌어요.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 구원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새삼스러워요. 나 스스로 얻은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한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어요.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완전히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었어요.
참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성경을 펼치자마자 구원 받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마음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쳐다볼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는 일 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찬송 연습을 하면 그렇게 목이 메요. 저는 사실 참 감정이 메마른 편이라 잘 울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 좀 차가운 사람 축에 드는데 그렇게 목이 메요. 감사의 뜻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이런 집회에 제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때 그 감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일요일 어느 지역에 갔는데 구원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찬송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찬송가 가사의 내용이 제 삶을 통과한 것이 아니면 쉽게 불러지지가 않아요.
구원받고 난 후에 제가 그렇게 전에는 싫어했던 성경 가르치던 그 분 댁에 갔어요. 그런데 그만 저도 모르게 그 싫어하던 간증이 그냥 나오더라고요. 저는 가까운 사람한테도 별로 간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마음에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제 욕심인 것 같아서지요. 그런데 찬송이 저절로 나와서 밤새도록 찬송을 불렀어요. 그 찬송가 가사 하나하나가 정말 참된 기도요 찬양이었어요.
그 찬송은 구원받고 나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지요.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때에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찬송가 84장)
그 소경이 바로 저였어요. 저는 남은 생애 동안 제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을 끝없이 찬송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공인으로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불만이랄까 성에 차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어요. 그런 제가 어느 날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어요. 대학을 코스모스 졸업하고 8년 만에 처음으로 친구들 틈에 끼어서 나들이를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목이랑 척추를 다쳐서 두 달 정도를 입원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제 인생이 말짱 꽝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침대에 멀거니 누워 꺼벙하게 있으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명예나 돈보다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저를 헤아려보면 일을 시작한 지도 8년째로 접어드는데 아무리 결산을 해 보아도 빈주먹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아는 공인으로서의 제 모습과 실제의 저는 너무도 달랐어요. 속에서는 항상 뭔가 성에 안 차는 것이 있었지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좀 살맛 나게 사나?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마음먹고서는 오랫동안 ‘참선’을 했어요. 우연히 인연이 맞아떨어져서 내면을 관찰했어요. 그 수행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가부좌를 틀고 촛불을 켜 놓고 하루 동안의 모든 일을 반성해 보곤 했어요. 마음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없이 마취한 상태처럼 마음이 무덤덤해져요.
그러던 사이에 어떤 선배가 성경 공부하러 가는데 저를 데리고 갔어요. 성경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싫어요. 찾는 자는 찾고, 구하면 얻을 거라고 했으니 나는 내 식대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 세상에서 무엇이나 한 길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에는 다 어떤 생명의 근본과 만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내 생각을 한번 왕창 부수어버려야겠다 싶어 주변을 정리하고, 모든 일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났지요. 유럽을 죽 돌았어요. 그때 저는 티베트나 히말라야에 가서 도를 닦아 해탈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유럽에서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하면서도 매일 참선을 했어요. 길바닥이나 절벽 꼭대기에서도 하고 매일 오랫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좌선했는데 점차 제 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든 것을 이렇게 닦으면 과연 내 마음속의 번뇌가 없어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느닷없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아느냐?’ ‘아, 그거야 모르지, 내일 죽을 수도 있고, 그 흔한 교통사고에 걸릴 수도 있고…’ 오죽이나 이 세상에 사고가 잦아요? 느닷없이 가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파리 목숨이 우리 인생인데요.
생명이 어디 달려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마음을 닦는다고 앉아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지요.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이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마음이 더러운 상태로 그냥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저는 죽은 다음에 뭔가 있다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제가 열세 살 때 돌아가신 후부터는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갖고 있었지요. 만약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아주 죽은 후에도 단절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는 어떤 연결이 있는 거다 싶었어요.
종종 꿈에 아버지를 뵙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그러한 연결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테 일일이 이야기는 안 했지만, 어린 마음속에도 죽음으로 끝은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요. 그런데 마음을 덜 닦고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한심했어요.
그러던 차에 배낭여행 길에 유럽의 후배네 집에서 성경을 한 권 얻었어요. 참선하고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잤어요. 욥기 잠언 시편 등 아무 데나 펼쳐서 읽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나는 여행지를 미국으로 옮겨 바로 그 땅에서 내가 수행해온 자아 찾기가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알게 된 사건을 맞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요가나 참선이 유행이었는데, 인도의 신비한 요가 집단에서 열심히 살다가 도망 나온 독일 유명언론인의 영화를 보게 된 것이죠. 그 종교집단의 홍보를 위한 영화였고, 거의 다큐멘터리 형식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찾는 길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히말라야나 티베트로 가지 말고 집에 가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몇 번 만났던 제 친구의 언니를 작별 인사차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분은 저와 참선 공부를 같이 했던 분이었고 저로서는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지요. 그간의 여행길에서 수행한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그분이 저를 조용히 보더니만 자기는 이제 인생의 해답을 얻었다고 말을 해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그 답이 이미 성경 속에 있었다고 이야기했고 그러잖아도 제가 혼자서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하니까 성경은 함부로 읽으면 안 되고 깨달은 사람이 길잡이 노릇을 해 주면 도움이 된다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단은 한번 들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요.
저는 지금 당장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성경을 가르치는 분은 자기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저녁 시간에나 틈을 낼 수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당장 그분을 보러 가겠다고 우겼어요. 다행히 곧 연락되더군요. 그런데 성경을 가르쳐 준다는 그 사람의 첫인상부터가 못마땅하고, 그 사람이 쓰는 단어도 너무 비위가 틀리고 참 이상한 일이 다 생기더라고요. 저는 그래도 저 스스로 경위가 바르고 예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먼저 원해서 부탁했고 남의 일하고 들어와서 쉬는 시간을 통째로 빼앗으면서 도대체 웬만큼 싫다는 느낌보다도 너무나 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참 별났어요.
몇 번을 다니다가 혼자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지요. 혼자 틀어박혀서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별것 다 해보더니 막판에는 예수쟁이까지 되려는구나 하면서 비웃어요. 마음을 집중해서 끝까지 한번 듣고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제 마음을 흩어놓는 일들이 계속 생기더군요.
나중에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친구 집에서 가출해 버렸어요. 이 세상을 창조한 어떤 존재를 꼭 알고 싶어서 집을 떠나 가난한 배낭여행을 하고 있지만 여태까지 해 왔던 일이 모두 다 꽝이었으니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기분이었지요. 결국,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채로 그 선배 집에 틀어박혀 버렸어요.
그동안에, 영사관에 실종 신고도 들어가고, 납치되었다는 별의별 소문이 다 났던가 봐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이야기대로 한번 해보겠다 하고 권 목사님 오디오 테이프, 책, 비디오테이프와 매일 씨름을 했어요.
옆에서도 많은 충고를 해주시면서 네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 짐을 지고 서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라고 했으나 그게 참 잘 안 돼요.
낮은 자리, 은혜가 내리는 그 자리를 제대로 찾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제 옛 생각의 대가 너무 세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상태로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갔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다 포기하고 나중에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혼자서 그렇게 씨름을 하면서 제 양심이 얼마나 무딘지도 알겠더라고요.
성경에 의하면 엄연한 죄인인데 뼛속 깊이 크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되지를 않았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에서의 그 회개가 저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나만큼 바른 사람 나오라 해. 누구든 내 상황에서 나만큼 하고 살기도 쉽지 않을걸.’ 사람끼리 견주어 보면, 다 저마다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킬 거리만 있겠죠. 그러나 사람의 거울이 아닌, 하나님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보는 게 필요한 거예요.
성경은 시작부터 끝 가지 편을 가르는 이야기예요. 빛과 어둠, 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이렇게 편을 가르고 있어요. 나 역시 이 세상 신 밑에 있다는 것,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어요.
새 한 마리가 좁은 새장에 갇혀 있을 때는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새 한 마리를 남산만 한 데다가 풀어주고 위에 덮개를 해 놓으면 그 새는 자기가 새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3주 정도를 씨름했어요. 나중에는 반 실성한 것같이 되더라고요. 자신을 알기가 그렇게나 어려운지!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뼈저리게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어요.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죄. 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서 가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던 저 자신이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저를 보는데도 제 눈빛이 그렇게 무서워요. 성경을 통해서 가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어떤 유혹 같은 것이 간간이 있었죠. 하루에 16시간 정도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는데 잠깐 눈 붙이는 시간에 꾸는 꿈도 성경과 연관되는 것이었어요.
꿈속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제 마음 한구석에서 ‘ 아니야’ 하면서, 아주 크게 거부하고 있었어요. 꿈을 깨고 나면 식은땀이 흘러요. 제가 하나님 편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알게 되었어요.
뉴욕 허드슨강이 얼어 얼음조각이 둥둥 떠 흘러가는 그 추운 겨울에 그 집 베란다에 섰는데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강물에 떨어져 죽을 것 같아요. 여태까지는 내 의지로 산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실은 제 영혼이 죽어 있었고 살아있다고 하지만 죽어있는 자신이기에 강물에 퐁당 빠져 진짜로 죽어 버려도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일 뿐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때가 크리스마스 전이라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하고 있어요. 복음에 대한 말씀은 제가 너무 많이 듣고 읽어서 줄줄이 다 외워요. 성경에 충실하게 만든 복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벤허 등의 성경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더군요. 성경 이야기로 연결되어가고 있는 영화를 몇 편 보면서 저 자신한테 계속 진저리가 쳐졌어요
중풍 환자처럼 벌벌 떨면서 그 영화들을 봤고 며칠이 지나서 어느 날, 말씀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었어요. 이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쓰는 단어들이 모두 다 싫었어요. 사탄, 마귀, 간증, 거듭남, 구원 이런 단어들이 모두 듣기 싫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야말로 사탄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는데도 성경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요. ‘하나님이 나도 사랑하시겠지’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여태까지 저를 그렇게 총애해 마지않던 마귀는 마지막까지도 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네가 받은 구원이라는 것이 정말이냐?’라는 속삭임으로 구원의 확신을 하지 못하게 해요.
저는 진짜로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가짜 구원을 받느니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거듭나는 체험을 하고서 저는 사흘 동안 잠잠히 있었어요.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구원이 더욱 확실해졌어요.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 구원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새삼스러워요. 나 스스로 얻은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한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어요.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완전히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었어요.
참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성경을 펼치자마자 구원 받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마음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쳐다볼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는 일 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찬송 연습을 하면 그렇게 목이 메요. 저는 사실 참 감정이 메마른 편이라 잘 울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 좀 차가운 사람 축에 드는데 그렇게 목이 메요. 감사의 뜻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이런 집회에 제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때 그 감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일요일 어느 지역에 갔는데 구원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찬송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찬송가 가사의 내용이 제 삶을 통과한 것이 아니면 쉽게 불러지지가 않아요.
구원받고 난 후에 제가 그렇게 전에는 싫어했던 성경 가르치던 그 분 댁에 갔어요. 그런데 그만 저도 모르게 그 싫어하던 간증이 그냥 나오더라고요. 저는 가까운 사람한테도 별로 간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마음에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제 욕심인 것 같아서지요. 그런데 찬송이 저절로 나와서 밤새도록 찬송을 불렀어요. 그 찬송가 가사 하나하나가 정말 참된 기도요 찬양이었어요.
그 찬송은 구원받고 나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지요.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때에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찬송가 84장)
그 소경이 바로 저였어요. 저는 남은 생애 동안 제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을 끝없이 찬송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