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가득한 마음에 평안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당시 저는 엄한 대가족의 맏며느리였습니다. 큰살림의 맏며느리로 지내면서 마음으로 오는 문제가 참 많았습니다. 처녀 때는 참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힘든 시집살이를 하게 되면서 분노, 복수심과 같은 마음들이 생겨났고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피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몇 년 동안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권사이시고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가면 내 육체가 잠깐 쉼을 얻는 것일 뿐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님이 장로님이시다 보니 심방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심방 오실 때마다 목사님은 나를 가리키며 참 착하고 악의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기만 하고 참 평안해 보였지만 제 마음속에는 항상 분노가 가득했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를 짓밟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에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평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 나는 이중인격자다. 이런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무조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주님
어느 날 한 친구가 저에게 성경을 무척 잘 가르치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 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몰랐지만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말 한마디에 친구를 따라가 보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회개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다녀온 이후 제게는 ‘내가 타려던 차를 놓치면 그 차는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지금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만약 사고라도 당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텐데’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집회가 있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갔는데 사람들이 제게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구원은 죽고 난 다음에 받는 거지, 지금 어떻게 구원을 논한다는 말인가? 참 교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저희 집에 전도하는 분을 한 분 모시고 와도 되는지 물어 왔습니다. 정말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 사람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 생각에는 교만해 보이기는 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무언가 내가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분을 모시라고 했습니다. 전도하는 분은 오셔서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저를 인도했던 친구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는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며 구원받았다고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감사함을 표현하니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의 표정을 따라 하려고 했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친구가 또 그분을 모시고 와서 성경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조금 제 마음과 귀가 열렸는지 예수께서 내 대신 내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는데 비가 올 때 나를 대신해서 우산이 비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대신해서 예수께서 내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의문이 드는 것이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죄는 담당하셨다지만 정확하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 전도하는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2천 년 전에 유대인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지금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구나. 내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며,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담당하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제 마음에 끼었던 구름이 벗겨지고 제 마음은 밝아졌습니다.
그때는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에는 매일 시어머니께서 성경을 보라고 성화하셔서 오히려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읽으니 성경의 내용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성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읽어 보려고 했지만, 한 절도 제대로 읽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읽히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 조금 의심이 생겨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그것으로 인해 다시 마음이 밝아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내가 무엇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고 했으니, 우선은 이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무언가 알아야 할 것은 알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읽었지만, 평소에 알고 있던 구절들만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성경 구절들도 읽으며 참 감사했지만 내가 무엇에서 구원받았다고 내 자신을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구절을 읽고는 ‘되었다’ 싶었습니다. 이 성경에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이 확실히 있는데 걱정할 것이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도 달라지고 감사함이 더해지며 말씀을 더 열심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유혹이 와도 흔들려도 구원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친구가 침례를 받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침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잖아. 너나 받고 와.”했는데, 친구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침례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 마음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는 가운데 침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4)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21)
이 말씀을 읽고 침례를 거부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순종함으로 따라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침례의 참 의미를 깨닫고, 침례를 받고 싶어서 권 목사님께 침례를 받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 수성못에서 침례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갈 때 동행해 줄 사람이 없이 혼자 가야 했는데, 무언가 마음이 외롭기도 했지만 ‘그래, 나에게 사람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혼자 가야 할 길이라면 어서 가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언지 모르게 내 마음이 세상과 구원에 각각 한 발을 딛고 서 있는 상태였는데 침례를 받고 물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감정인지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세상과는 이별이다. 두 다리 걸치고 살았던 내 생애가 하나로 모여서 가는 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말씀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살지는 모르지만, 이 마음이 평생 변치 않기를 원합니다.
분노 가득한 마음에 평안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당시 저는 엄한 대가족의 맏며느리였습니다. 큰살림의 맏며느리로 지내면서 마음으로 오는 문제가 참 많았습니다. 처녀 때는 참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힘든 시집살이를 하게 되면서 분노, 복수심과 같은 마음들이 생겨났고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피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몇 년 동안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권사이시고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가면 내 육체가 잠깐 쉼을 얻는 것일 뿐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님이 장로님이시다 보니 심방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심방 오실 때마다 목사님은 나를 가리키며 참 착하고 악의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기만 하고 참 평안해 보였지만 제 마음속에는 항상 분노가 가득했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를 짓밟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에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평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 나는 이중인격자다. 이런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무조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주님
어느 날 한 친구가 저에게 성경을 무척 잘 가르치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 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몰랐지만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말 한마디에 친구를 따라가 보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회개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다녀온 이후 제게는 ‘내가 타려던 차를 놓치면 그 차는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지금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만약 사고라도 당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텐데’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집회가 있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갔는데 사람들이 제게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구원은 죽고 난 다음에 받는 거지, 지금 어떻게 구원을 논한다는 말인가? 참 교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저희 집에 전도하는 분을 한 분 모시고 와도 되는지 물어 왔습니다. 정말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 사람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 생각에는 교만해 보이기는 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무언가 내가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분을 모시라고 했습니다. 전도하는 분은 오셔서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저를 인도했던 친구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는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며 구원받았다고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감사함을 표현하니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의 표정을 따라 하려고 했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친구가 또 그분을 모시고 와서 성경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조금 제 마음과 귀가 열렸는지 예수께서 내 대신 내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는데 비가 올 때 나를 대신해서 우산이 비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대신해서 예수께서 내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의문이 드는 것이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죄는 담당하셨다지만 정확하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 전도하는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2천 년 전에 유대인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지금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구나. 내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며,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담당하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제 마음에 끼었던 구름이 벗겨지고 제 마음은 밝아졌습니다.
그때는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에는 매일 시어머니께서 성경을 보라고 성화하셔서 오히려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읽으니 성경의 내용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성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읽어 보려고 했지만, 한 절도 제대로 읽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읽히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 조금 의심이 생겨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그것으로 인해 다시 마음이 밝아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내가 무엇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고 했으니, 우선은 이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무언가 알아야 할 것은 알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읽었지만, 평소에 알고 있던 구절들만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성경 구절들도 읽으며 참 감사했지만 내가 무엇에서 구원받았다고 내 자신을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구절을 읽고는 ‘되었다’ 싶었습니다. 이 성경에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이 확실히 있는데 걱정할 것이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도 달라지고 감사함이 더해지며 말씀을 더 열심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유혹이 와도 흔들려도 구원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친구가 침례를 받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침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잖아. 너나 받고 와.”했는데, 친구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침례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 마음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는 가운데 침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4)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21)
이 말씀을 읽고 침례를 거부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순종함으로 따라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침례의 참 의미를 깨닫고, 침례를 받고 싶어서 권 목사님께 침례를 받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 수성못에서 침례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갈 때 동행해 줄 사람이 없이 혼자 가야 했는데, 무언가 마음이 외롭기도 했지만 ‘그래, 나에게 사람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혼자 가야 할 길이라면 어서 가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언지 모르게 내 마음이 세상과 구원에 각각 한 발을 딛고 서 있는 상태였는데 침례를 받고 물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감정인지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세상과는 이별이다. 두 다리 걸치고 살았던 내 생애가 하나로 모여서 가는 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말씀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살지는 모르지만, 이 마음이 평생 변치 않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