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내 마음에 내려앉은 ‘주님’이라는 두 글자


생각의 굴레에 빠져 있던 어린 시절


나는 흔히들 말하는 모태신앙은 아니었다.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군,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났지만 1970년도 가족들의 미국 이민에 착오가 있었던 탓에 부모님은 부산으로 가려다가 대구에 정착하셨고 나는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전문직에 종사하셨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허약하셨던 탓에(우울증) 어머니가 가계와 살림을 꾸려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셨다.

 

 

금전적으로 힘들지는 않았기에 다행히 부족한 것 없이 유년 시절과 초등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중고를 겪으시는 어머니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나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부재했던 탓인지 내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어른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던 내 유년 시절의 모습,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많았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내 잠재의식은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유독 많이 물려받았나 보다. 그때 그 시절, 무슨 생각들을 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혼돈하고 공허한 인생의 마음이 그 조그마한 아이에게도 시작되었던 것일까.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면서도 그 ‘생각’이라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굴레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 시절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작은 부주의로 큰 사고를 당하셨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마음이 너무 힘드셨는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고 나름대로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리셨다. 그때부터 나는 싫지만 억지로 등 떠밀려 교회의 주일학교에 나가야 했다. 주일만 되면 교회에 가야 하는 중압감에, 자유롭게 절에 다니는 친구가 부러울 정도였다. 교회에 있어야 할 시간에 다른 장소(인근 만화방이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머니의 눈을 피해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교회에 갈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받아야 하는 복장규제와 교회의 형식적인 규율과 가식들이 어린 마음에도 많이 거북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내 교회 땜빵 레퍼토리는 대학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혼돈과 공허함은 계속되고

 

교회에서 에덴동산과,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다는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아득하고 먼 태곳적 신화의 일부가 상상이 되었고 성경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만일 이 온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사람들이 제각기 만든 조그마한 시멘트 건물에 들어앉아 복장규제나 하고, 누가 헌금함에 돈을 더 많이 내는지 잣대질하고, 행동에 형식이나 가하는 그런 시시하고 편협하신 분일 것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의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생활에서 주님을 조용히 사모하는 평온한 모습이기보다는 오로지 열심만을 보이고(새벽기도니 철야기도니) 교회의 목사를 신봉하는 모습이었다.

 

 

그때가 1980년대였다. 서울에서 약국을 하시는 이모부네가 생계가 달린 영업은 뒤로 하고 대구로 자주 내려오셨다. 아버지와 이모부가 마주 앉아 몇 시간이고 탁상공론을 하셨다. 구원받아야 지옥을 면한다고, 약국 문을 닫고 대구까지 내려와 떠들어 대는 모습이 부모님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비쳤던 것 같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한 해 재수를 한 뒤 대학생이 되었다. 그제야 뒤늦은 사춘기를 맞은 것일까. 주변의 모든 상황이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원했던 미술 전공으로 진학은 했지만 가고 싶었던 학교가 아니라는 핑계로 학업에 충실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음주 가무를 즐기며 신나게 노는 것도 거북했다. 집안 살림과 가계 모두를 신경 써야 해서 바쁘기만 하신 어머니와, 자식들 모르게 우울증에 시달려 오셨던 아버지 탓에 가족 간의 유대와 질서가 흐트러져 있어 집이라는 보금자리도 나에겐 푸근한 안락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나마 집안 정서를 다독여야 할 틈까지도 모두 다 교회에만 할애하셨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무의식의 ‘생각’의 굴레들이 또다시 슬그머니 내 인생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 깨어 있는 새벽에 자살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상상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자살할 용기도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처럼 신앙적인 열심이라도 내어보려고 철야기도에 따라가 슬픈 음률의 찬송가를 부를 때면 오히려 더 마음이 괴로워져 눈물이 펑펑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보던 다른 교인은 ‘아이고, 은혜 많이 받았나 보네.’ 하면서 되려 칭찬을 하셨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나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유일한 시간은 마음 맞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몇 시간이고, 엉덩이에 땀이 찰 때까지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며 공허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돌아서서 헤어지고 나면 역시 해결책은 없었고 또다시 공허하고 혼란하기만 했지만 말이다. 가기 싫은 교회는 이제 그만 두고 개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는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찬송과 말씀에 동한 마음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교편을 잡고 계신 둘째 이모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두서없이 써 내려가면서도 나의 무의식 속 혼돈하고 공허한, 그저 죽고만 싶은 마음을 열거해 내려가면서도 어릴 때 들었던 그 이상한 집단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편지를 이모가 받으면 분명히 나를 서울로 불러올리리라는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람 한번 쐬러 오라면서, 그 대신 꼭 정해진 날에 와야만 이모가 함께 있어 줄 시간이 된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서울에 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이미 성경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고 있었다. 겁이 나기도 했지만, 대학까지 다니고 있는 머리 큰 내 자신의 상식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정신만 바짝 차리고 한번 들어보면 그 집단이 정말로 이단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회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식견이 있다는 이모와 이모의 가족들이 다닌다던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1993년, 대학 2학년의 여름이었다. 정말 찌는 듯한 더위에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끼는 그 혹독한 여름에 용광로 같은 천막 속에서 성경 말씀을 들었다. 다행히도 저녁이 되면 시원한 소낙비가 자주 내렸다. 처음 그 집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은 어느 교회의 부흥회를 가도 그만큼 많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보이지 않고 강요되지 않는 어떤 질서가 느껴졌다. 사람이 그렇게 득실대는데도 위험한 사고 하나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각자 맡은 위치에서 집회를 조용히 이끌어가는 모습이 멋져 보여 속으로 탄복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강연을 열심히, 정말 한 마디도 흘리지 않고 등에 땀을 적시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었다. 성경 강연을 듣는 나를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시는 외할머니와 이모조차도 나를 방해하는 마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 오죽했으랴. 강연을 다 듣고 나면 나는 파김치가 되어 바닥에 뻗기 일쑤였다. 제대로 갖춰진 건물도 없이 땅을 임대해서 손수 천막을 지어 수고로이 집회를 해 나가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집회 중의 찬양대의 찬송 소리도 여느 교회에서의 성가대 합창이 아니었다. 머리가 희고 까맣고, 나이가 많고 어리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어우러져 얼굴에 이야기를 담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의상에서부터 무대 시설까지 무엇인가 허술해 보였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내 마음을 동하게 했던 것일까. 전에는 들리지 않던 찬송가 가사들이 내 마음을 두드리듯 심장이 콩닥거렸다.

 

 

하루하루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점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추상적이고 막연하기만 했던 성경 속 이야기들이 실제로 현재진행형이며 사실임을 알았다. 예전에는 힌트도 듣지 못했던 그런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문제는 구원이었다. 죄 사함, 거듭남, 영원한 속죄. 설교자가 지적해 주고 던져 주는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분 좋게 친척들에게 달려가 구원받았다고 하니 함께 기뻐해 주셨다. 이 가운데에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진 마음속 의심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다. 내 무의식 속에 의심이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죄는 자백하면 된다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는 어찌 속죄될까? 물론 그 죄까지 다 사해 주셨다고는 하셨지만 의심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 양심이라는 것도 사면초가였다. 예를 들어 내가 한 친구를 미워하는데 양심을 속이지 않고 미워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죄고, 그렇지 않은 척 살아도 죄인 것이다. 이렇게 해도 죄고 저렇게 해도 죄니 사면초가였다. 괴로웠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울고불고 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내 안의 이 피를 다 쏟아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집회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셨던 이모는 일단 나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다음 날 나를 데리고 전도하는 분에게 가셨다. 내 의심들을 쏟아내 놓고 다시 한번 조용히 말씀을 상고했다. 성경 여기저기를 펼쳐 보이시며 내 의심들을 지적해 주셨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면서 ‘주님’이라는 두 글자가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날아갈 것 같았고 온 세상이 내 손에 다 들어온 것 같았다. 철갑을 두른 듯 내 뒤엔 항상 주님이 계시기에 겁나는 것이 없었다. 내 무의식 속의 혼돈과 공허함이 어떤 것이었던 가를 감사하게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것이었다.

 

 

내게는 딱히 구원받은 어떤 말씀이나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93년 8월 9일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죄를 사하는 구절이 모두 다 내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알고 있었던 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상과 인생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힘듦과 곤고함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내가 오로지 감사하고 내 영혼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확실히 거듭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서 한 말씀을 붙들고 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실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인도함으로 구원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