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고 거짓된 자신을 깨닫다
배재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성경을 대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습니다. 감리교 계통의 중학교에 다녔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담당 교목 선생님의 창세기부터의 구약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2학년부터는 선생님도 바뀌고 신약의 이야기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상급 학년에 올라가 과학을 배우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도 신화나 만든 이야기라고 치부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성경에 대한 인상은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유약하고 겁 많은 성격으로 남과 다투거나 특별한 잘못을 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교활한 거짓말, 속인 일들이 종종 마음에 걸렸습니다. 눈에 띄는 뚜렷한 죄나 흠은 없이 지내왔지만, 남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양심에 걸리는 몇 가지 사건들을 종종 생각하면 얼굴을 찌푸리게 되곤 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이성 교제도 없고 이에 대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던 상황에서 속에서 흘러나오는 죄성은 내 마음에 심각한 문제를 주었습니다. 내 속에 이렇게 추악한 욕심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내가 여유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목사들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설교를 듣는 중에도 혼자서 지난 한 주일의 생활을 속으로 반성하며 일요일을 보냈고, 청년들과의 건전한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 성경암송대회에 참석하여 여러 번 상을 타기도 했고, 잠언 2장부터 5장까지와 산상보훈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외우곤 했습니다. 그 후 혼자 할 일이 없거나 하면 별생각 없이 산상보훈을 반복하여 외우고 생각하여 보곤 했습니다. 또 답답하고 외롭고 주위에 아무런 재미있는 일이 없을 때 성경을 읽었고, 군대 생활 중에는 주로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내 자신이 정말로 거짓되고 비겁하고 저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경 말씀의 영향인 줄은 몰랐습니다.
구원받으려는 계속된 노력
대학교 2학년 시절 영어 강의 중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배웠는데, 담당 교수님의 반기독교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사상을 접하고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 기독교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중세의 기독교적이고 봉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많은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일들이 생겨났고 동정녀 탄생, 구약의 신화 같은 이야기 등이 생겨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짓 것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동정녀 탄생이나 기타 기적들을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출석하던 교회에서 일부 신도들의 위선과 신도들 간의 갈등을 보며 염증이 나서, 집을 이사했다는 핑계로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이성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에 대하여도 이것은 당연한 본능일 뿐 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내 속의 저질성에 대하여 양심에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오랜 교인 생활을 해왔던 터라, 또 사람들을 만나고 또래 청년들과, 이성과도 사귀고 싶었으므로 신앙은 제쳐놓고라도 이런 건전한 사귐을 위하여 조금 더 큰 다른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때 한 젊은 목사의 반정부적인 선동적 설교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복음을 정확히 깨달은 대학 친구를 통하여 한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교회에 헌금을 내는 의례적인 순서가 없는 것, 인정적인 허례와 부담이 없는 것이 좋아서 다니다가 그 교회 사람들의, 특히 젊은 사람들의 경건한 태도와 단정한 몸가짐 등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2, 3개월 정도 일요일에 설교를 들었는데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신앙은 아주 올바르게 보였고, 그 후 알게 된 몇 사람들과 면담을 하고 목사님과도 상담을 하면서 점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곳 사람들이 성경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 면담을 할수록 그들의 신앙이 확고한 것을 알게 되었고, 성경이 사실이라는 설명에 반증할 수 없었으며, 죄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자신의 죄악성은 더 분명해졌고 지옥이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의심도 생겼습니다. 내가 너무 성경을 모르니까 이 사람들이 꿰맞추는 성경 이야기만 듣다가 이단에 빠지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남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들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시 가장 믿기 어려웠던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인류의 역사가 6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주장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고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그동안 막연히 배워 왔던 진화론과 인류의 기원 등이 성경보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은 놀라웠습니다. 그들의 말이 훨씬 더 사실 같았습니다.
그 후엔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계속 상담을 했지만,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죄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절감하게 되었고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분명 심각한 죄인이며 성경은 분명 사실인 것 같은데,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 이상으로 성경이 사실로 여겨지는데, 또한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로 인해 내 죄가 사하여졌는데, 왜 이렇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까. 기쁘지도 않고 감동도 없고 계시된 믿음이 오지 않을까. 분명히 사실인데 이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활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생각도 해 보고,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조금 더 고생을 해야 된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죽지 않으려면 교통사고도 조심해야 했기에, 우연한 사고도 조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구절들을 모아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찬찬히 여러 번 읽어보곤 했지만, 분명히 내 죄는 씻음을 받았고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내가 이 모양인지 알 수 없어서 정말로 어렵기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
그러다가 한번은 나보다 5, 6세 정도 많은 한 청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의 어린 딸이 장난으로 내게 ‘바보’라고 한 말을 듣고는 정말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상담을 계속 받았는데 상담 중에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 내 죄는 씻어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고 성경도 사실인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반복되는 이야기에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만큼 나도 성경이 사실인 것을 믿는다. 내 죄도 씻어졌고 나도 구원받았다.” 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며, “구원받아도 다시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 속에 있는 문제는 죄사함 받은 것과는 상관없다.” 는 말도 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상담하던 분이 죄 씻음을 확실히 받았다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나도 되었다’ 라고 대답하고 그 사람을 보니, 그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의심하느냐고 물어보고는 구원받았는데 내 마음에 왜 기쁨이 없느냐고 하자,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며 먼저 구원받은 것을 알고 난 후에 기쁨이 온다는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자신도 구원받았을 때 그 순간은 기쁘지 않았다며 꼭 기쁨이 곧바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죄가 십자가의 피로써 하나님 앞에서 가려진 것이라고 하며, 죄라고 붉은 글씨로 쓰고 그 위를 붉은색으로 칠해서 ‘죄’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속죄의 사실은 내 마음의 기쁨과도 상관없고, 내가 의심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도 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을까? 도대체 나는 이젠가 저젠가 하며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가? 마음이 뭉클해지고 갑자기 눈물이 나며 신앙고백이 쏟아져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신비로운 계시 같은 것을 기다렸던 제 자신이 바보 같았습니다. 그런 것은 내 마음의 생각이고 육신의 감동이지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순간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북받치는 기쁨과 감동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던가? 이 복음을 들어야 할 동생들이,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상담하던 형제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서 정거장으로 내달았습니다.
그다음의 생활은 지금 생각해 보면 천방지축이었습니다. 내 잘못된 좁은 소견, 실생활에서의 무지, 게으름에다가 무기력으로 일어난 파란만장의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롬 8:13) 를 넘어서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며, 내 신앙생활은 살아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자동차만 운전하면 잘 졸고 무수히 많은 자동차 여행을 했으면서도 아직도 사지가 멀쩡하답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겁하고 거짓된 자신을 깨닫다
배재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성경을 대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습니다. 감리교 계통의 중학교에 다녔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담당 교목 선생님의 창세기부터의 구약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2학년부터는 선생님도 바뀌고 신약의 이야기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상급 학년에 올라가 과학을 배우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도 신화나 만든 이야기라고 치부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성경에 대한 인상은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유약하고 겁 많은 성격으로 남과 다투거나 특별한 잘못을 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교활한 거짓말, 속인 일들이 종종 마음에 걸렸습니다. 눈에 띄는 뚜렷한 죄나 흠은 없이 지내왔지만, 남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양심에 걸리는 몇 가지 사건들을 종종 생각하면 얼굴을 찌푸리게 되곤 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이성 교제도 없고 이에 대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던 상황에서 속에서 흘러나오는 죄성은 내 마음에 심각한 문제를 주었습니다. 내 속에 이렇게 추악한 욕심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내가 여유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목사들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설교를 듣는 중에도 혼자서 지난 한 주일의 생활을 속으로 반성하며 일요일을 보냈고, 청년들과의 건전한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 성경암송대회에 참석하여 여러 번 상을 타기도 했고, 잠언 2장부터 5장까지와 산상보훈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외우곤 했습니다. 그 후 혼자 할 일이 없거나 하면 별생각 없이 산상보훈을 반복하여 외우고 생각하여 보곤 했습니다. 또 답답하고 외롭고 주위에 아무런 재미있는 일이 없을 때 성경을 읽었고, 군대 생활 중에는 주로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내 자신이 정말로 거짓되고 비겁하고 저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경 말씀의 영향인 줄은 몰랐습니다.
구원받으려는 계속된 노력
대학교 2학년 시절 영어 강의 중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배웠는데, 담당 교수님의 반기독교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사상을 접하고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 기독교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중세의 기독교적이고 봉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많은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일들이 생겨났고 동정녀 탄생, 구약의 신화 같은 이야기 등이 생겨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짓 것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동정녀 탄생이나 기타 기적들을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출석하던 교회에서 일부 신도들의 위선과 신도들 간의 갈등을 보며 염증이 나서, 집을 이사했다는 핑계로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이성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에 대하여도 이것은 당연한 본능일 뿐 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내 속의 저질성에 대하여 양심에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오랜 교인 생활을 해왔던 터라, 또 사람들을 만나고 또래 청년들과, 이성과도 사귀고 싶었으므로 신앙은 제쳐놓고라도 이런 건전한 사귐을 위하여 조금 더 큰 다른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때 한 젊은 목사의 반정부적인 선동적 설교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복음을 정확히 깨달은 대학 친구를 통하여 한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교회에 헌금을 내는 의례적인 순서가 없는 것, 인정적인 허례와 부담이 없는 것이 좋아서 다니다가 그 교회 사람들의, 특히 젊은 사람들의 경건한 태도와 단정한 몸가짐 등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2, 3개월 정도 일요일에 설교를 들었는데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신앙은 아주 올바르게 보였고, 그 후 알게 된 몇 사람들과 면담을 하고 목사님과도 상담을 하면서 점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곳 사람들이 성경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 면담을 할수록 그들의 신앙이 확고한 것을 알게 되었고, 성경이 사실이라는 설명에 반증할 수 없었으며, 죄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자신의 죄악성은 더 분명해졌고 지옥이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의심도 생겼습니다. 내가 너무 성경을 모르니까 이 사람들이 꿰맞추는 성경 이야기만 듣다가 이단에 빠지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남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들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시 가장 믿기 어려웠던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인류의 역사가 6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주장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고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그동안 막연히 배워 왔던 진화론과 인류의 기원 등이 성경보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은 놀라웠습니다. 그들의 말이 훨씬 더 사실 같았습니다.
그 후엔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계속 상담을 했지만,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죄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절감하게 되었고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분명 심각한 죄인이며 성경은 분명 사실인 것 같은데,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 이상으로 성경이 사실로 여겨지는데, 또한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로 인해 내 죄가 사하여졌는데, 왜 이렇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까. 기쁘지도 않고 감동도 없고 계시된 믿음이 오지 않을까. 분명히 사실인데 이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활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생각도 해 보고,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조금 더 고생을 해야 된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죽지 않으려면 교통사고도 조심해야 했기에, 우연한 사고도 조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구절들을 모아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찬찬히 여러 번 읽어보곤 했지만, 분명히 내 죄는 씻음을 받았고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내가 이 모양인지 알 수 없어서 정말로 어렵기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
그러다가 한번은 나보다 5, 6세 정도 많은 한 청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의 어린 딸이 장난으로 내게 ‘바보’라고 한 말을 듣고는 정말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상담을 계속 받았는데 상담 중에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 내 죄는 씻어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고 성경도 사실인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반복되는 이야기에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만큼 나도 성경이 사실인 것을 믿는다. 내 죄도 씻어졌고 나도 구원받았다.” 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며, “구원받아도 다시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 속에 있는 문제는 죄사함 받은 것과는 상관없다.” 는 말도 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상담하던 분이 죄 씻음을 확실히 받았다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나도 되었다’ 라고 대답하고 그 사람을 보니, 그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의심하느냐고 물어보고는 구원받았는데 내 마음에 왜 기쁨이 없느냐고 하자,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며 먼저 구원받은 것을 알고 난 후에 기쁨이 온다는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자신도 구원받았을 때 그 순간은 기쁘지 않았다며 꼭 기쁨이 곧바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죄가 십자가의 피로써 하나님 앞에서 가려진 것이라고 하며, 죄라고 붉은 글씨로 쓰고 그 위를 붉은색으로 칠해서 ‘죄’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속죄의 사실은 내 마음의 기쁨과도 상관없고, 내가 의심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도 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을까? 도대체 나는 이젠가 저젠가 하며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가? 마음이 뭉클해지고 갑자기 눈물이 나며 신앙고백이 쏟아져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신비로운 계시 같은 것을 기다렸던 제 자신이 바보 같았습니다. 그런 것은 내 마음의 생각이고 육신의 감동이지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순간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북받치는 기쁨과 감동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던가? 이 복음을 들어야 할 동생들이,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상담하던 형제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서 정거장으로 내달았습니다.
그다음의 생활은 지금 생각해 보면 천방지축이었습니다. 내 잘못된 좁은 소견, 실생활에서의 무지, 게으름에다가 무기력으로 일어난 파란만장의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롬 8:13) 를 넘어서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며, 내 신앙생활은 살아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자동차만 운전하면 잘 졸고 무수히 많은 자동차 여행을 했으면서도 아직도 사지가 멀쩡하답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혤세”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