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19년간 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특별수사 검사나 마약 수사 검사로서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고, 서울중앙지검에서 부장검사로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노력하여 많은 것을 성취하고 누려 보았지만, 성경을 통하여 얻은 구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강연 말씀을 듣고 여러 날 밤을 새워 성경을 읽기도 하였으며 구원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많은 간증을 읽기도 하였지만, 오랫동안 오리무중 속에서 헤매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이 고생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저의 경험을 될수 있는 대로 자세히 써 보려고 합니다. 세상 권세나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기독교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성경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였고, 행동이나 생활에 있어서도 같은 또래의 누구보다도 정결하고 신실하다고 자부하여 왔습니다. 남들과 주먹다짐 한번 해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욕설이나 마음 상하는 말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신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에게 선하게 사는 본을 보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행동은 물론이고 마음속으로도 음욕을 품거나 나쁜 생각을 하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고 선하게 살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아 주실 것이다’
언제나 선하게 살아 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나쁜 생각이 들었고 겉으로는 거짓말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주일에 교회에 나갔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뿐, 일단 집에 돌아오면 공부나 장래 계획 등 현실적인 문제에 묻혀 버리다 보니 하나님이 저의 실생활에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성경의 내용이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6일간의 천지창조’, 온 세상을 뒤덮은 ‘노아의 홍수’, ‘홍해가 갈라진 기적’, ‘물 위를 걸어간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등은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독단적이고 인간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반감이 들었습니다. 레위 지파로 하여금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3천 명을 칼로 베도록 한 이야기나 (출 32:25-29) 토기장이의 비유 (롬 9:20-24) 등을 보면 특히 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교회의 선생님들에게 상의하면, 선생님들은 그러한 기적들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결국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신화나 설화로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래, 지식인들은 성경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야지 무지몽매한 사람들처럼 덮어놓고 전부 다 믿어서는 안 돼.’하고 스스로 경계하곤 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대학입시에서 인생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고교 시절에 항상 우수한 성적을 보여 왔기 때문에 합격을 자신했었는데,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보다 성적이 좋지 못했던 친구들이 합격한 것을 보니 더욱 참기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게만 보이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비록 후기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기는 하였지만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시험을 준비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재수할 생각을 접고 역전승하겠다는 생각으로 후기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제게 있어서 대학 시절은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적으로 뒤집어지는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하여 그저 공부만 하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종전의 긍정적인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은 참담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데도 기독교는 ‘착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라는 한가한 타령뿐이었습니다. 기독교로는 내 문제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기독교가 미워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그동안 마음속 깊이 눌러 놓았던 비판적인 생각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 목사들의 거룩한 행실 뒤에는 왜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나는지. 그들은 차별 없는 형제 사랑을 설교하면서도 왜 지위 있고 돈 많은 교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과 친절을 보이는지. 교인들은 또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교회에서는 천사처럼 사랑을 부르짖지만, 과연 속마음도 그럴까? 교회에서는 많은 헌금을 보란 듯이 내면서도 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거지에게는 그렇게 인색한가. 헌금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선한 행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목사는 헌금 기도를 하면서 왜 특별헌금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지. 이 땅의 수많은 교회는 막대한 헌금을 매주 걷어 들이고 있는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과연 얼마의 돈을 쓰고 있는지.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는 데에만 돈을 물 쓰듯이 쏟아 붓는 것은 아닌지. 일주일에 1시간씩 하는 형식적인 예배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교인이 예배를 빼먹으면 죄를 짓는 것인지. 기도는 또 왜 그리 오래 하는지. 장로님의 거창한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인지 교인들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인지. 기도할 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 하나님께 복을 더 많이 받게 되는지. 내가 내는 헌금이 과연 하나님께 바쳐지기나 하는 것인지. 선한 마음으로 내는 헌금에 어째서 아깝다는 생각이 묻어 있는지. 이런 위선적인 마음을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실지. 지금의 나는 천국과 지옥은 물론 창조주의 존재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는데 예배에만 빠짐없이 참석하면 괜찮은 것인지.
이러한 회의감에 빠져 있던 차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연히 손에 쥔 불교 서적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김일엽 스님이 쓴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이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신여성이 사랑하던 남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하여 수행하는 내용을 담은 자서전이었는데, 산사에 놀러 온 젊은 남녀를 바라보면서 허망한 사랑에 연민을 느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인생은 공허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견해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끝없는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잠재우고 인생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글을 보니 불교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에 대하여는 한껏 냉소와 조롱을 보냈습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 나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의 개념을 만들어 놓고 맹목적으로 복을 비는 어리석은 종교이고, 목사와 교인들은 배타주의와 위선에 젖어 있는 가증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서구 세력이 동양을 점령하는 전형적인 방식 -먼저 선교사가 들어와서 포교하고 다음으로 상인들이 들어오고 이어서 군대가 들어와 무력으로 점령하는 방식- 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서구 세력의 앞잡이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왔고 그 선교사에 의하여 일부 사람들이 세뇌되었는데 후에 기독교의 허구성을 자각하였으나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었으므로 자신들이 발 들여놓은 기독교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포섭의 손길을 뻗치게 된 것이라고 나름대로 이론을 구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곳의 산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심지어는 불상 앞에 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공허하고 고해라는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줄 해답이 없었습니다. 그저 막연한 교리와 뜬구름 잡는 선문답뿐이었습니다. 갈증은 더 커져갔지만 인생의 해답을 찾는 일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제게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였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모든 것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기독교와 불교, 철학과 모든 가치관과 도덕관까지.... 대신 현실적인 목표만을 세워두고 하루하루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과 입신출세를 최고의 목표로 세우고 공부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때때로 술을 즐기고 시와 소설로 위안을 삼았지만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그렇게 대학 시절을 보내고 기대했던 대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중앙청으로 가는 길은 마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우연히 참된 말씀을 접하고
1984년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여 1년 차 연수를 마치고, 그해 겨울에 대전으로 내려가 선화동에 있는 법원에서 판사시보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법원에서 동료 시보 한 사람이 다른 시보 둘에게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지적하려고 같이 들어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저와 나이 차이도 많고 연수원에서의 반도 달라서 시보 생활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권 선배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그때까지 제가 들었던 어느 설교와도 달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목사님들에게 들어온 설교에 따르면, 가인은 수확한 농작물 중에서 좋지 않은 것을 골라서 무성의한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기름진 양의 새끼를 아낌없이 바쳐 정성스런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권 선배는 전혀 다르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가인도 역시 땀을 흘려 농사를 짓고 정성을 다하여 농작물을 바쳤으나 그의 제물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이고, 아벨의 제사는 생명 있는 양을 잡아 피 흘려 바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것이라면서 우리의 정성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이 받으시는지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대신 죽은 양은 예수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설명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았습니다.
권 선배는 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장 참조)를 이야기하면서, 재산을 허비한 청지기가 쫓겨나게 되자 주인의 채무자를 모두 불러서 채무를 탕감하여 주는 부당한 방법으로 살 길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청지기의 행위는 법률적으로 볼 때 분명히 업무상배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인데, 예수께서 어째서 칭찬하였는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들어왔던 설교들은 모두 상식에 부합하는 내용이었고, 이와 같이 상식과 도덕에 어긋나는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도덕에 어긋나는 내용의 설교를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이나 도덕과는 다르다면서, 성경은 그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이, 만약 성경이 도덕 교과서라면 소돔 성의 음란한 행위,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육체 관계를 가져 자손을 얻은 이야기,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자식을 얻은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을 리 없을 테니까요. 성경을 찾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들을수록 성경에는 제가 모르는 비밀들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권 선배는 성경을 깨닫게 되면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고 전체가 꿰어져 해석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어려운 성경이 한꺼번에 이해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빨리 깨달아서 주변의 예수쟁이들의 잘난 체하는 입을 막고 그들 앞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동안에 선배의 소개로 병원을 운영하는 이 원장님을 만나서 성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개월간 거의 매일 찾아가서 여러 시간에 걸쳐 들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도 다양하고 정확한 말씀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이전에 저는 교회에 다니며 설교를 들었고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다니며 성경 과목을 공부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유명한 교회나 많은 부흥회에 가 보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잘 알려진 교회나 기도원에도 찾아가 통성기도나 산기도를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가 방한하였을 때 여의도 광장에도 가 보았고, 남산에서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에도 여러 번 가 보았습니다. 그 어떤 설교로도 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해 주장한 것처럼 아무리 이름 있는 목사의 거창한 설교라도 인생의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장 참조)
그때까지 저는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참으로 인생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 인생이 고해라고 정의하는 줄 알았는데 성경에는 그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한 성경 말씀을 들을수록 제 지식과 자존심이 무참히 꺾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서 내가 바로 탕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기다리던 깨달음인가 하는 마음에 밤을 새우며 로마서 등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막히는 곳이 없이 이해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당시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같은 의미로 구원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의미가 기적적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은 거창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함께 말씀을 듣던 동료 시보가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조바심이 났습니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듯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성경을 보는 데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조바심에 겨워서 점점 더 잡다한 질문을 늘어놓았고, 이 원장님은 제게 “당신은 열쇠를 찾아 금고 문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금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위 칸에는 무엇이 있고 아래 칸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이아몬드 반지는 왜 아래 칸에 두지 않고 위 칸에 두었는지 등의 주변에 대한 질문만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의문이 해소된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죄가 눈을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 죄를 걷어내면 눈앞이 보일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죄를 걷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근원적인 문제이고 그 죄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하셨다는 말씀까지 들었지만, 저에게는 죄가 왜 문제인지 여전히 불분명하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간 대전에서 말씀을 들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내가 죄를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예수께서 내 죄를 지고 가셨으니 앞으로는 지옥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애써 위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간 대전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평온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 비하여 제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하였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후 1985년 3월경 권 선배의 권유에 따라 서울 교회에서 열린 전도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며 옳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제 마음에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였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사람은 일어나 보라고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으면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있다고 하던데,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어쨌든 무시무시한 지옥은 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5년간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1986년에 검사로 임관되어 부산과 제천에서 근무하면서 오로지 세상 일에만 관심을 두고서 세상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간혹 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이 떠올랐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회개조차도 못 하는 인간입니다
1989년에 서울 북부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후 5개월간은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위도 안정되고 생활여건도 나아졌지만, 저에게 인생은 여전히 고달프고 공허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래전, “검사가 되어서 당분간은 폼도 재고 대접도 받고 재미가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닐 거요” 라고 하셨던 이 원장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1990년 2월 어느 날 퇴근하여 아내와 우연히 성경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절 달걀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도중에 신기하게도 스스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깨어나는 것을 보면 세상에 ‘부화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세상에 그러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달걀에 온도와 시간 등의 조건을 맞추어 주면 반드시 병아리가 부화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 사람이 부활하는 법칙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조건만 맞으면 실제로 부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깨우침에 고무되어 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을 다시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에 대전에서 말씀을 들으며 녹음하여 두었던 테이프를 꺼내어 일주일간 다시 들었습니다. 그동안 왜 이 귀한 말씀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지 후회되었고, 5년 전에 갔었던 서울 교회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 보니 교회는 여전히 기둥이 가득하여 어수선하고 초라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므로.... 집회가 끝난 시간이라서 설교는 듣지 못하였지만, 설교 테이프를 구하여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시간에 맞게 찾아가 뒷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창세기 14장을 설교하였는데 아브람이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해 내는 이야기였습니다. 지루해 보이는 구절인데도 2시간이 넘도록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여 돌아왔을 때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전리품을 모두 취하고 사람은 자신에게 보내라고 제의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를 ‘네게 속한 것은 실이나 신들메라도 받지 않겠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는데, 여기서 소돔 왕은 영적으로 사탄을 의미하고 그에게서 실과 신들메를 받는 것은 세상과 하나로 묶이는 의미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옛날이야기 속에 그렇게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정확한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후 다음 주부터 전도집회가 열린다는 광고를 듣고 이번에야말로 확실치 않았던 구원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도 구원받은 것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구원받은 것 같다가도 다른 때에는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피 흘리셔서 죄가 사해졌다고 되어 있고 저 스스로도 이를 믿고 있으므로 더 이상 구원을 찾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구원받으면 무언가 확실한 변화가 있다고 하던데...’ 하는 의구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구원에 대해 분명히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도집회에 참석하려니 첫날부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집회 첫날이 바로 직장에서의 당직 근무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직 근무 검사는 경찰에서 보내오는 구속영장을 검토하고 많은 수사지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어야만 합니다. 당직 때문에 첫날은 포기하고 둘째 날부터 참석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첫날에 빠지면 뒤처지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당직을 다른 검사와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끝에 바꿀 수 있었습니다.
첫날 말씀 중에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이 지구의 생성 모습을 직접 본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수십 수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과 관계가 맺어지는데, 예수와 사람들이 연결된 모습이 마치 땅속의 죽은 밀알과 결실한 밀알이 밀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그래, 이러한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을 보면 구원받은 것이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집회 4일째에 제가 구원받지 않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펴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라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속에 두려움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옥 불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제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제 안에 있는 이 두려움은 심판 날에 그대로 드러나서 저를 지옥으로 이끌어 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지옥에 갈 것이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분명히 알고 나니 차라리 마음은 홀가분하였습니다. 적어도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있다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집회가 계속되면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빠짐없이 정확하게 성취되고 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7일째 오후에 어느 전도하시는 분으로부터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세요.’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년 전에도 전도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열심히 들었지만 구원받지 못하였던 것을 보면 제 노력과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집회에서 하라는 대로 모두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여 교회로 출발하였는데 예상외로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날 상계동에서 서울 교회로 가는 길은 유난히 교통체증이 심하였고 또 무려 11차례나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집회기간 동안 직장 사정으로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모두 해결하고 잘 참석해 왔는데, 오늘 중요한 말씀을 놓치게 되어 수포로 돌아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모든 것을 저의 계획대로 해왔습니다. 이번 집회에도 제 뜻에 따라 참석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이 제 계획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제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유 있게 직장에서 출발할지라도 도중에 교통사고가 난다든가 심장마비가 온다면 결코 집회에 참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나 구원받는 일이나 이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날 결국 40분가량 늦게 교회에 도착하니 목사님은 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라디아서 5:19-21)
제가 이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시인이 되었지만, 그러한 죄가 부끄럽다거나 괴롭게 느껴지지 않고 덤덤할 뿐이었습니다. 남들은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무감각한가. 정말 나는 구제불능인가.... 하기야 5년 전에도 도무지 죄가 실감나지 않아서 고민하지 않았던가. 내가 죄를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조차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목사님 말씀에 따라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자 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로마서 1장 28장에서 32절의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는 말씀을 설명하신 후에, 집에 돌아가거든 이 구절 중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성경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저에게 해당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순간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정말 내 마음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할 만큼 절실한지 궁금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죄 짐을 싸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입으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시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제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마음 한편에서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라면 너의 가장 부끄러운 죄를 가정과 직장에 공개해 보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목숨처럼 생각하는 명예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장 부끄러운 죄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제 이 부끄러운 죄를 가족과 직장 동료들에게 공표하기로 결심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고, 밤새도록 두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했습니다.
다음 날 직장에 출근하여 퇴근할 시간이 다 되도록 갈피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말해 버릴까?’, ‘안 돼’하는 두 마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회개조차도 할 수 없는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저는 회개조차도 못하는 인간입니다. 이제 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옥에 가라 하신다면 지옥에 가겠습니다.’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개 또한 하나님이 하게 해 주신다는 로마서 2장 4절의 말씀(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9일째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제는 ‘저들’이 아닌 ‘우리’가 되어
목사님은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기둥을 하나님의 말씀에 박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에 순종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어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듣고 있는 바로 이 성경 말씀이 곧 성령이고 그 성경을 전하는 목사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는 구절을 읽으며 ‘세상 죄’에는 바로 ‘나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죄 곧 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로 바꾸어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엇인가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 말씀만 받아들이면 사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안타깝고 답답하였습니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굶어 죽어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이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였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예수께서 내 죄를 지고 가셨다면 내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속 다른 한 편에서 ‘내가 왜 지금까지 가정만을 하고 있지? 이 순간만은 가정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를 실제 받아들이자’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그 말씀이 제 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가정은 저에게 실제가 되었고 그토록 저를 억누르던 죄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저의 죄를 모두 해결하신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1990년 4월 3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동안 제 주위를 맴돌 뿐이었는데 이제야 제 속에 들어와 저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수없이 읽거나 외운다고 할지라도 거듭날 수 없고,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이나 참된 가치 등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제 인생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탕자를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영원한 천국을 떠올리며 기쁨의 눈물을 애써 참았습니다. 세상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고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말씀 내가 믿고 거기 굳게 서겠네. 생명의 말씀 내가 믿고서 거기 굳게 서겠네” 라는 찬송이 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저들’이 아닌 ‘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19년간 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특별수사 검사나 마약 수사 검사로서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고, 서울중앙지검에서 부장검사로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노력하여 많은 것을 성취하고 누려 보았지만, 성경을 통하여 얻은 구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강연 말씀을 듣고 여러 날 밤을 새워 성경을 읽기도 하였으며 구원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많은 간증을 읽기도 하였지만, 오랫동안 오리무중 속에서 헤매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이 고생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저의 경험을 될수 있는 대로 자세히 써 보려고 합니다. 세상 권세나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기독교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성경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였고, 행동이나 생활에 있어서도 같은 또래의 누구보다도 정결하고 신실하다고 자부하여 왔습니다. 남들과 주먹다짐 한번 해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욕설이나 마음 상하는 말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신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에게 선하게 사는 본을 보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행동은 물론이고 마음속으로도 음욕을 품거나 나쁜 생각을 하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고 선하게 살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아 주실 것이다’
언제나 선하게 살아 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나쁜 생각이 들었고 겉으로는 거짓말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주일에 교회에 나갔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뿐, 일단 집에 돌아오면 공부나 장래 계획 등 현실적인 문제에 묻혀 버리다 보니 하나님이 저의 실생활에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성경의 내용이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6일간의 천지창조’, 온 세상을 뒤덮은 ‘노아의 홍수’, ‘홍해가 갈라진 기적’, ‘물 위를 걸어간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등은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독단적이고 인간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반감이 들었습니다. 레위 지파로 하여금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3천 명을 칼로 베도록 한 이야기나 (출 32:25-29) 토기장이의 비유 (롬 9:20-24) 등을 보면 특히 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교회의 선생님들에게 상의하면, 선생님들은 그러한 기적들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결국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신화나 설화로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래, 지식인들은 성경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야지 무지몽매한 사람들처럼 덮어놓고 전부 다 믿어서는 안 돼.’하고 스스로 경계하곤 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대학입시에서 인생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고교 시절에 항상 우수한 성적을 보여 왔기 때문에 합격을 자신했었는데,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보다 성적이 좋지 못했던 친구들이 합격한 것을 보니 더욱 참기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게만 보이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비록 후기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기는 하였지만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시험을 준비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재수할 생각을 접고 역전승하겠다는 생각으로 후기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제게 있어서 대학 시절은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적으로 뒤집어지는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하여 그저 공부만 하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종전의 긍정적인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은 참담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데도 기독교는 ‘착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라는 한가한 타령뿐이었습니다. 기독교로는 내 문제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기독교가 미워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그동안 마음속 깊이 눌러 놓았던 비판적인 생각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 목사들의 거룩한 행실 뒤에는 왜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나는지. 그들은 차별 없는 형제 사랑을 설교하면서도 왜 지위 있고 돈 많은 교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과 친절을 보이는지. 교인들은 또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교회에서는 천사처럼 사랑을 부르짖지만, 과연 속마음도 그럴까? 교회에서는 많은 헌금을 보란 듯이 내면서도 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거지에게는 그렇게 인색한가. 헌금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선한 행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목사는 헌금 기도를 하면서 왜 특별헌금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지. 이 땅의 수많은 교회는 막대한 헌금을 매주 걷어 들이고 있는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과연 얼마의 돈을 쓰고 있는지.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는 데에만 돈을 물 쓰듯이 쏟아 붓는 것은 아닌지. 일주일에 1시간씩 하는 형식적인 예배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교인이 예배를 빼먹으면 죄를 짓는 것인지. 기도는 또 왜 그리 오래 하는지. 장로님의 거창한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인지 교인들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인지. 기도할 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 하나님께 복을 더 많이 받게 되는지. 내가 내는 헌금이 과연 하나님께 바쳐지기나 하는 것인지. 선한 마음으로 내는 헌금에 어째서 아깝다는 생각이 묻어 있는지. 이런 위선적인 마음을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실지. 지금의 나는 천국과 지옥은 물론 창조주의 존재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는데 예배에만 빠짐없이 참석하면 괜찮은 것인지.
이러한 회의감에 빠져 있던 차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연히 손에 쥔 불교 서적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김일엽 스님이 쓴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이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신여성이 사랑하던 남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하여 수행하는 내용을 담은 자서전이었는데, 산사에 놀러 온 젊은 남녀를 바라보면서 허망한 사랑에 연민을 느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인생은 공허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견해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끝없는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잠재우고 인생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글을 보니 불교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에 대하여는 한껏 냉소와 조롱을 보냈습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 나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의 개념을 만들어 놓고 맹목적으로 복을 비는 어리석은 종교이고, 목사와 교인들은 배타주의와 위선에 젖어 있는 가증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서구 세력이 동양을 점령하는 전형적인 방식 -먼저 선교사가 들어와서 포교하고 다음으로 상인들이 들어오고 이어서 군대가 들어와 무력으로 점령하는 방식- 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서구 세력의 앞잡이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왔고 그 선교사에 의하여 일부 사람들이 세뇌되었는데 후에 기독교의 허구성을 자각하였으나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었으므로 자신들이 발 들여놓은 기독교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포섭의 손길을 뻗치게 된 것이라고 나름대로 이론을 구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곳의 산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 불교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심지어는 불상 앞에 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공허하고 고해라는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줄 해답이 없었습니다. 그저 막연한 교리와 뜬구름 잡는 선문답뿐이었습니다. 갈증은 더 커져갔지만 인생의 해답을 찾는 일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제게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였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모든 것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기독교와 불교, 철학과 모든 가치관과 도덕관까지.... 대신 현실적인 목표만을 세워두고 하루하루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과 입신출세를 최고의 목표로 세우고 공부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때때로 술을 즐기고 시와 소설로 위안을 삼았지만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그렇게 대학 시절을 보내고 기대했던 대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중앙청으로 가는 길은 마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우연히 참된 말씀을 접하고
1984년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여 1년 차 연수를 마치고, 그해 겨울에 대전으로 내려가 선화동에 있는 법원에서 판사시보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법원에서 동료 시보 한 사람이 다른 시보 둘에게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지적하려고 같이 들어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저와 나이 차이도 많고 연수원에서의 반도 달라서 시보 생활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권 선배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그때까지 제가 들었던 어느 설교와도 달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목사님들에게 들어온 설교에 따르면, 가인은 수확한 농작물 중에서 좋지 않은 것을 골라서 무성의한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기름진 양의 새끼를 아낌없이 바쳐 정성스런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권 선배는 전혀 다르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가인도 역시 땀을 흘려 농사를 짓고 정성을 다하여 농작물을 바쳤으나 그의 제물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이고, 아벨의 제사는 생명 있는 양을 잡아 피 흘려 바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것이라면서 우리의 정성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이 받으시는지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대신 죽은 양은 예수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설명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았습니다.
권 선배는 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장 참조)를 이야기하면서, 재산을 허비한 청지기가 쫓겨나게 되자 주인의 채무자를 모두 불러서 채무를 탕감하여 주는 부당한 방법으로 살 길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청지기의 행위는 법률적으로 볼 때 분명히 업무상배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인데, 예수께서 어째서 칭찬하였는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들어왔던 설교들은 모두 상식에 부합하는 내용이었고, 이와 같이 상식과 도덕에 어긋나는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도덕에 어긋나는 내용의 설교를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이나 도덕과는 다르다면서, 성경은 그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이, 만약 성경이 도덕 교과서라면 소돔 성의 음란한 행위,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육체 관계를 가져 자손을 얻은 이야기,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자식을 얻은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을 리 없을 테니까요. 성경을 찾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들을수록 성경에는 제가 모르는 비밀들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권 선배는 성경을 깨닫게 되면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고 전체가 꿰어져 해석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어려운 성경이 한꺼번에 이해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빨리 깨달아서 주변의 예수쟁이들의 잘난 체하는 입을 막고 그들 앞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동안에 선배의 소개로 병원을 운영하는 이 원장님을 만나서 성경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개월간 거의 매일 찾아가서 여러 시간에 걸쳐 들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도 다양하고 정확한 말씀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이전에 저는 교회에 다니며 설교를 들었고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다니며 성경 과목을 공부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유명한 교회나 많은 부흥회에 가 보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잘 알려진 교회나 기도원에도 찾아가 통성기도나 산기도를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가 방한하였을 때 여의도 광장에도 가 보았고, 남산에서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에도 여러 번 가 보았습니다. 그 어떤 설교로도 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해 주장한 것처럼 아무리 이름 있는 목사의 거창한 설교라도 인생의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장 참조)
그때까지 저는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참으로 인생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 인생이 고해라고 정의하는 줄 알았는데 성경에는 그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한 성경 말씀을 들을수록 제 지식과 자존심이 무참히 꺾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서 내가 바로 탕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기다리던 깨달음인가 하는 마음에 밤을 새우며 로마서 등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막히는 곳이 없이 이해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당시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같은 의미로 구원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의미가 기적적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은 거창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함께 말씀을 듣던 동료 시보가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조바심이 났습니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듯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성경을 보는 데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조바심에 겨워서 점점 더 잡다한 질문을 늘어놓았고, 이 원장님은 제게 “당신은 열쇠를 찾아 금고 문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금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위 칸에는 무엇이 있고 아래 칸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이아몬드 반지는 왜 아래 칸에 두지 않고 위 칸에 두었는지 등의 주변에 대한 질문만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의문이 해소된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죄가 눈을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 죄를 걷어내면 눈앞이 보일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죄를 걷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근원적인 문제이고 그 죄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하셨다는 말씀까지 들었지만, 저에게는 죄가 왜 문제인지 여전히 불분명하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간 대전에서 말씀을 들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내가 죄를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예수께서 내 죄를 지고 가셨으니 앞으로는 지옥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애써 위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간 대전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평온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 비하여 제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하였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후 1985년 3월경 권 선배의 권유에 따라 서울 교회에서 열린 전도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며 옳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제 마음에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였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사람은 일어나 보라고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으면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있다고 하던데,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어쨌든 무시무시한 지옥은 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5년간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1986년에 검사로 임관되어 부산과 제천에서 근무하면서 오로지 세상 일에만 관심을 두고서 세상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간혹 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이 떠올랐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회개조차도 못 하는 인간입니다
1989년에 서울 북부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후 5개월간은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위도 안정되고 생활여건도 나아졌지만, 저에게 인생은 여전히 고달프고 공허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래전, “검사가 되어서 당분간은 폼도 재고 대접도 받고 재미가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닐 거요” 라고 하셨던 이 원장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1990년 2월 어느 날 퇴근하여 아내와 우연히 성경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절 달걀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도중에 신기하게도 스스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깨어나는 것을 보면 세상에 ‘부화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세상에 그러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달걀에 온도와 시간 등의 조건을 맞추어 주면 반드시 병아리가 부화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 사람이 부활하는 법칙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조건만 맞으면 실제로 부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깨우침에 고무되어 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을 다시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에 대전에서 말씀을 들으며 녹음하여 두었던 테이프를 꺼내어 일주일간 다시 들었습니다. 그동안 왜 이 귀한 말씀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지 후회되었고, 5년 전에 갔었던 서울 교회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 보니 교회는 여전히 기둥이 가득하여 어수선하고 초라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므로.... 집회가 끝난 시간이라서 설교는 듣지 못하였지만, 설교 테이프를 구하여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시간에 맞게 찾아가 뒷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창세기 14장을 설교하였는데 아브람이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해 내는 이야기였습니다. 지루해 보이는 구절인데도 2시간이 넘도록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여 돌아왔을 때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전리품을 모두 취하고 사람은 자신에게 보내라고 제의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를 ‘네게 속한 것은 실이나 신들메라도 받지 않겠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는데, 여기서 소돔 왕은 영적으로 사탄을 의미하고 그에게서 실과 신들메를 받는 것은 세상과 하나로 묶이는 의미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옛날이야기 속에 그렇게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정확한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후 다음 주부터 전도집회가 열린다는 광고를 듣고 이번에야말로 확실치 않았던 구원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도 구원받은 것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구원받은 것 같다가도 다른 때에는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피 흘리셔서 죄가 사해졌다고 되어 있고 저 스스로도 이를 믿고 있으므로 더 이상 구원을 찾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구원받으면 무언가 확실한 변화가 있다고 하던데...’ 하는 의구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구원에 대해 분명히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도집회에 참석하려니 첫날부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집회 첫날이 바로 직장에서의 당직 근무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직 근무 검사는 경찰에서 보내오는 구속영장을 검토하고 많은 수사지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어야만 합니다. 당직 때문에 첫날은 포기하고 둘째 날부터 참석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첫날에 빠지면 뒤처지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당직을 다른 검사와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끝에 바꿀 수 있었습니다.
첫날 말씀 중에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이 지구의 생성 모습을 직접 본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수십 수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과 관계가 맺어지는데, 예수와 사람들이 연결된 모습이 마치 땅속의 죽은 밀알과 결실한 밀알이 밀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그래, 이러한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을 보면 구원받은 것이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집회 4일째에 제가 구원받지 않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펴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라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속에 두려움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옥 불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제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제 안에 있는 이 두려움은 심판 날에 그대로 드러나서 저를 지옥으로 이끌어 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지옥에 갈 것이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분명히 알고 나니 차라리 마음은 홀가분하였습니다. 적어도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있다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집회가 계속되면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빠짐없이 정확하게 성취되고 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7일째 오후에 어느 전도하시는 분으로부터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세요.’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년 전에도 전도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열심히 들었지만 구원받지 못하였던 것을 보면 제 노력과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집회에서 하라는 대로 모두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여 교회로 출발하였는데 예상외로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날 상계동에서 서울 교회로 가는 길은 유난히 교통체증이 심하였고 또 무려 11차례나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집회기간 동안 직장 사정으로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모두 해결하고 잘 참석해 왔는데, 오늘 중요한 말씀을 놓치게 되어 수포로 돌아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모든 것을 저의 계획대로 해왔습니다. 이번 집회에도 제 뜻에 따라 참석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이 제 계획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제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유 있게 직장에서 출발할지라도 도중에 교통사고가 난다든가 심장마비가 온다면 결코 집회에 참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나 구원받는 일이나 이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날 결국 40분가량 늦게 교회에 도착하니 목사님은 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라디아서 5:19-21)
제가 이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시인이 되었지만, 그러한 죄가 부끄럽다거나 괴롭게 느껴지지 않고 덤덤할 뿐이었습니다. 남들은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무감각한가. 정말 나는 구제불능인가.... 하기야 5년 전에도 도무지 죄가 실감나지 않아서 고민하지 않았던가. 내가 죄를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조차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목사님 말씀에 따라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자 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로마서 1장 28장에서 32절의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는 말씀을 설명하신 후에, 집에 돌아가거든 이 구절 중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성경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저에게 해당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순간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정말 내 마음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할 만큼 절실한지 궁금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죄 짐을 싸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입으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시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제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마음 한편에서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라면 너의 가장 부끄러운 죄를 가정과 직장에 공개해 보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목숨처럼 생각하는 명예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장 부끄러운 죄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제 이 부끄러운 죄를 가족과 직장 동료들에게 공표하기로 결심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고, 밤새도록 두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했습니다.
다음 날 직장에 출근하여 퇴근할 시간이 다 되도록 갈피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말해 버릴까?’, ‘안 돼’하는 두 마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회개조차도 할 수 없는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저는 회개조차도 못하는 인간입니다. 이제 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옥에 가라 하신다면 지옥에 가겠습니다.’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개 또한 하나님이 하게 해 주신다는 로마서 2장 4절의 말씀(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9일째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제는 ‘저들’이 아닌 ‘우리’가 되어
목사님은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기둥을 하나님의 말씀에 박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에 순종하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어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듣고 있는 바로 이 성경 말씀이 곧 성령이고 그 성경을 전하는 목사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는 구절을 읽으며 ‘세상 죄’에는 바로 ‘나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죄 곧 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로 바꾸어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엇인가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 말씀만 받아들이면 사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안타깝고 답답하였습니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굶어 죽어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이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였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예수께서 내 죄를 지고 가셨다면 내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속 다른 한 편에서 ‘내가 왜 지금까지 가정만을 하고 있지? 이 순간만은 가정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를 실제 받아들이자’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그 말씀이 제 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가정은 저에게 실제가 되었고 그토록 저를 억누르던 죄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저의 죄를 모두 해결하신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1990년 4월 3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동안 제 주위를 맴돌 뿐이었는데 이제야 제 속에 들어와 저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수없이 읽거나 외운다고 할지라도 거듭날 수 없고,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이나 참된 가치 등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제 인생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탕자를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영원한 천국을 떠올리며 기쁨의 눈물을 애써 참았습니다. 세상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고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말씀 내가 믿고 거기 굳게 서겠네. 생명의 말씀 내가 믿고서 거기 굳게 서겠네” 라는 찬송이 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저들’이 아닌 ‘우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