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지난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명문가나 큰 갑부는 아니었지만, 농촌에서 머슴을 부리며 조부모님까지 계시는 다복한 가정에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어린 제게는 왠지 모를 공허함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신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 했습니다. 교회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계속 다녔습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좋은 대학,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런 대학에 가느니 차라리 진학을 포기하고 말지.’ 했던 지방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고, 오빠의 떠밀림에 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인생을 뒤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내 욕심대로, 내 계획대로 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나는 무엇이고 내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라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행여 해답이 있을까 싶어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젊은 날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천재 작가 전혜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그녀의 인생 전부를 사랑하게 되었고 닮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가 아닌 이상 그녀처럼 살다 가는 것은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해답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그 속에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밖의 여러 철학 서적을 읽어보아도 어떤 해답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차원에서 나를 찾으면 무언가 보일 것 같아 종전과는 다르게 좀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내에 있는 기독교 동아리들을 찾아다니며 성경 속에서 나를 찾고자 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당에 다녀도 무언가 벽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교회에는 계속 다니면서 주일학교에서 아이들도 가르쳤고, 일요일에는 율법 가운데 행하며 늘 자신을 비롯한 성도들의 안녕과 복을 빌며 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 내용과 나 자신을 연관 지어 보려 애썼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잘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정말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듣는 설교에도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이셨던 분이 떠올랐고, 그 선생님께서 다니던 교회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남학생들이 일주일간의 입영 훈련을 가 수업이 없는 틈을 타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서울에 있는, 선생님께서 다니는 교회로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고속버스와 전철을 타고 교회를 찾아가 보니,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어떤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내 안에 내재하여 있는 나에 대한 근본 문제를 성경 안에서 찾고 싶은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편한 크기의 성경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집회 중에 일러주는 성구를 불편 없이 같이 찾으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에서 저는 과거도, 현재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역사 속에 존재하며 나 또한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내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삶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예수님의 보혈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9)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주관해야 한다는 마음의 큰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정말 홀가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나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을 따라 교제 가운데 섞이기도 하고, 여러 집회에 참석해 보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형제와 결혼해서 생활하면 무언가 신앙에 대해서 알게 될까 해서 결혼도 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답답함의 원인을 하나님과 남편에게 돌리면서 원망하는 시간을 보냈고, 7~8시간의 목등뼈 염증 제거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 신세를 지는 등 여러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아파서 건강하지 못한 내 몸을 미처 돌볼 수 없는 고통도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 지내다 어떤 자매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 목사님이 쓰신 책들을 읽으며 교회 가운데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양식을 얻으며 교제 가운데 거할 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우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필리핀,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크신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교제 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교회가 가는 길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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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지난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명문가나 큰 갑부는 아니었지만, 농촌에서 머슴을 부리며 조부모님까지 계시는 다복한 가정에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어린 제게는 왠지 모를 공허함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신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 했습니다. 교회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계속 다녔습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좋은 대학,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런 대학에 가느니 차라리 진학을 포기하고 말지.’ 했던 지방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고, 오빠의 떠밀림에 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인생을 뒤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내 욕심대로, 내 계획대로 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나는 무엇이고 내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라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행여 해답이 있을까 싶어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젊은 날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천재 작가 전혜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그녀의 인생 전부를 사랑하게 되었고 닮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가 아닌 이상 그녀처럼 살다 가는 것은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해답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그 속에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밖의 여러 철학 서적을 읽어보아도 어떤 해답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차원에서 나를 찾으면 무언가 보일 것 같아 종전과는 다르게 좀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내에 있는 기독교 동아리들을 찾아다니며 성경 속에서 나를 찾고자 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당에 다녀도 무언가 벽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교회에는 계속 다니면서 주일학교에서 아이들도 가르쳤고, 일요일에는 율법 가운데 행하며 늘 자신을 비롯한 성도들의 안녕과 복을 빌며 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 내용과 나 자신을 연관 지어 보려 애썼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잘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정말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듣는 설교에도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이셨던 분이 떠올랐고, 그 선생님께서 다니던 교회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남학생들이 일주일간의 입영 훈련을 가 수업이 없는 틈을 타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서울에 있는, 선생님께서 다니는 교회로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고속버스와 전철을 타고 교회를 찾아가 보니,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어떤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내 안에 내재하여 있는 나에 대한 근본 문제를 성경 안에서 찾고 싶은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편한 크기의 성경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집회 중에 일러주는 성구를 불편 없이 같이 찾으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에서 저는 과거도, 현재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역사 속에 존재하며 나 또한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내 존재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삶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예수님의 보혈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9)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주관해야 한다는 마음의 큰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정말 홀가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나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을 따라 교제 가운데 섞이기도 하고, 여러 집회에 참석해 보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형제와 결혼해서 생활하면 무언가 신앙에 대해서 알게 될까 해서 결혼도 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답답함의 원인을 하나님과 남편에게 돌리면서 원망하는 시간을 보냈고, 7~8시간의 목등뼈 염증 제거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 신세를 지는 등 여러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 아이들이 아파서 건강하지 못한 내 몸을 미처 돌볼 수 없는 고통도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 지내다 어떤 자매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 목사님이 쓰신 책들을 읽으며 교회 가운데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양식을 얻으며 교제 가운데 거할 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우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필리핀,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크신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교제 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교회가 가는 길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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