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 있던 두려움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하며 교회에 다닐 것을 권하셨고, 나는 위로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풍족하지 못하던 때라 교회에서 헌금을 걷을 때마다 마음이 떳떳하지 못했고 그래서 교회에는 잘 다니지 않았다.
정작 위로는 다른 데서 받게 되었다. 일이 끝나면 항상 성경을 보던 회사 동료의 어깨너머로 나 또한 띄엄띄엄 성경을 보았는데 그녀를 통해 회사에서 몇 사람이 모여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연결되어 개인 전도를 받았고 나는 이사야 44장 22절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1974년, 내가 21살 때였다.
그때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펜팔로 알게 된 남자에게 전도를 했고 그를 만나 결혼을 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남편보다 복음을 먼저 알았고 남편에게 전도도 했지만 살아가며 문득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은 어쩌지 못했다.
결혼 후 남편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지를 물었고 나는 그 말이 너무 섭섭했다. 대화를 해 보려 해도 내 쪽에서 먼저 말이 막히곤 했다. 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간증을 하라고 하면 하기가 싫었고 성경 말씀을 듣다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나는 들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때때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받은 구원이 정말로 확실한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내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생각은 그 순간뿐, 자주 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묻어놓고 살았다. 자식 셋을 키워야 했고 가족 안에서 인간적인 행복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득 찾아드는 두려움과 외로움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의 삶 속에 묻혀 있었는데 확 드러나게 된 일이 있었다. 부산에서 경산으로, 그곳에서 전주로 거처를 옮기다 한 대학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게 되면서 다시 경산으로 오게 되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 살고 있던 집의 전세금을 뺐지만 대신 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때 동업하게 된 사람이, 사정이 있어 아무도 살지 않는 자신의 집에 우리 가족을 기거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동업자가 교회 사람이어서 더욱 문제가 복잡했다.
돈 문제가 연관되면서 나는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속에 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악이 가득했던지 동업하는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눈빛만 봐도 싫었고 걸음걸이마저 얄밉게 보였다.
그런데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밤낮이 바뀌어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돈 문제, 집 문제가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니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다. 어지럼증을 자주 느꼈고 몇 번은 쓰러질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몸무게가 54kg에서 44kg까지 내려갈 정도로 살도 많이 빠졌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자꾸 마르나 싶어 딸아이가 일하는 병원에 가 보니 갑상선 항진증이라고 했다.
몸이 아프니 비로소 나를 제대로 돌아보게 되었다. 병에 걸릴 만한 생활이기는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형제를 미워한 나의 악독한 마음이 진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서 얽힌 문제로 그 형제를 미워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산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니 하나님께 두려움이 생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5월, 고성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한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교통사고를 당했던 형제도 있었다. 그는 비가 오면 사고를 당해 피가 통하지 않는 부위가 너무 아파 고통스럽지만 말씀이 아니었다면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나는 도저히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정말 교제가 하고 싶어 모인 이들인데 그 자리에 있는 나는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내게 거듭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껏 살면서 그때만큼 조급했던 적이 없었다. 구원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해 여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는 내 마음은 여느 때와 달랐다.
하지만 육신은 마음과는 달랐다. 오랫동안 밤낮이 바뀌어 생활해 왔기 때문이었는지 설교를 듣는데 잠이 쏟아져서 첫날부터 금요일 전날까지 듣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설교 내용이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영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는데도 잠이 왔다. 일부러 서서 보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설교가 끝나고 밖에서 남편을 만났다.
“해결 되었나?”
“안 되었다.”
구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졸다 나왔을 뿐더러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그 질문에, 무슨 마음인지 당당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니는 아직 마음 고생 더 해야 한다.”
남편은 매정하게 이야기하고는 등을 휙 돌려 먼저 가버렸다. 밥 먹었냐는 소리도, 다시 한번 잘 들어보자며 위로해 주는 말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너무 야속하고 섭섭했다. 하지만 그때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더라면 찾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요일이었다. 공식적인 설교는 모두 끝났다. 저녁 설교가 끝난 후에도 교제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나는 참석을 했다. 수지에서 동물병원을 한다는 형제가 앞에 나와 자신이 장운동을 꾸준히 하여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간증을 하는 와중에 찬송가 361장을 다 같이 부르자고 했다.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그 순간 내 눈앞에 산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이 제사가, 주님이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모임이 끝나고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나는 잠자러 들어가지 않고 밖에 나와 혼자 찬송가를 계속 다시 보았다.
다음날 한 형제님에게 달려갔다. 어제 내가 찬송가 361장을 부르는데 주님이 나를 위해 산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분은 미가서 7장 19절을 보여 주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아. 모든 말씀이 내게 꼭 맞았다. 내 죄는 발로 밟히고 깊은 바다에 던져진 것이었다. 나는 해결되었다. 남편은 지금껏 삼십 몇 년을 속아왔는데 안 믿는다며, 경상도 남자다운 우스갯소리를 무뚝뚝하게 던졌다. 정확히 33년 만이었다. 나는 마치 38년을 병자로 살았던 성경 속 그 사람처럼 기적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평화로운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교제 가운데 거하며
지금은 확실하게 내 마음에서 주님이 나를 거두어주신 것이 믿어지니 생활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나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주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일도 즐겁게 하고 있다. 포장마차 일을 하면서 주말에 선교센터에서 모이는 교제에 참석하기는 쉽진 않지만 가능하면 참석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남들보다 수입은 줄겠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더 좋다. 주말이 기다려져 금요일이 되면 마음이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요즘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먹고 살만큼은 보살펴 주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이 이렇게까지 좋아지니 몸도 많이 회복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살이 많이 붙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마음이 급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성경책을 마구 보았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33년을 그저 그렇게 살다가 내가 구원받지 않았음을 깨우친 계기가 되었던 것은 형제와 얽힌 돈 문제였다. 처음에는 왜 형제와 함께 장사를 해서 이런 문제를 겪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후회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로 인해 아팠던 심신의 고통이 없었다면 내가 구원받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함께 사업을 했던 그 형제와 지금은 자연스럽게 지낸다. 이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내 마음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형제와 그의 처도 몸이 좋지 않고 또 이 교제에서 조금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데, 앞으로 이분들을 다시 교제 속으로 이끄는 것이 내 숙제이자 기도이다. 내가 해결되지 않아서 가까이 챙기지 못했던 자식들의 구원 문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 또한 내게 남은 숙제이자 기도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는 말씀을.
묻혀 있던 두려움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하며 교회에 다닐 것을 권하셨고, 나는 위로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풍족하지 못하던 때라 교회에서 헌금을 걷을 때마다 마음이 떳떳하지 못했고 그래서 교회에는 잘 다니지 않았다.
정작 위로는 다른 데서 받게 되었다. 일이 끝나면 항상 성경을 보던 회사 동료의 어깨너머로 나 또한 띄엄띄엄 성경을 보았는데 그녀를 통해 회사에서 몇 사람이 모여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연결되어 개인 전도를 받았고 나는 이사야 44장 22절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1974년, 내가 21살 때였다.
그때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펜팔로 알게 된 남자에게 전도를 했고 그를 만나 결혼을 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남편보다 복음을 먼저 알았고 남편에게 전도도 했지만 살아가며 문득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은 어쩌지 못했다.
결혼 후 남편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지를 물었고 나는 그 말이 너무 섭섭했다. 대화를 해 보려 해도 내 쪽에서 먼저 말이 막히곤 했다. 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간증을 하라고 하면 하기가 싫었고 성경 말씀을 듣다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나는 들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때때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받은 구원이 정말로 확실한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내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생각은 그 순간뿐, 자주 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묻어놓고 살았다. 자식 셋을 키워야 했고 가족 안에서 인간적인 행복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득 찾아드는 두려움과 외로움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의 삶 속에 묻혀 있었는데 확 드러나게 된 일이 있었다. 부산에서 경산으로, 그곳에서 전주로 거처를 옮기다 한 대학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게 되면서 다시 경산으로 오게 되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 살고 있던 집의 전세금을 뺐지만 대신 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때 동업하게 된 사람이, 사정이 있어 아무도 살지 않는 자신의 집에 우리 가족을 기거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동업자가 교회 사람이어서 더욱 문제가 복잡했다.
돈 문제가 연관되면서 나는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속에 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악이 가득했던지 동업하는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눈빛만 봐도 싫었고 걸음걸이마저 얄밉게 보였다.
그런데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밤낮이 바뀌어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돈 문제, 집 문제가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니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다. 어지럼증을 자주 느꼈고 몇 번은 쓰러질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몸무게가 54kg에서 44kg까지 내려갈 정도로 살도 많이 빠졌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자꾸 마르나 싶어 딸아이가 일하는 병원에 가 보니 갑상선 항진증이라고 했다.
몸이 아프니 비로소 나를 제대로 돌아보게 되었다. 병에 걸릴 만한 생활이기는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형제를 미워한 나의 악독한 마음이 진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서 얽힌 문제로 그 형제를 미워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산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니 하나님께 두려움이 생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5월, 고성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한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교통사고를 당했던 형제도 있었다. 그는 비가 오면 사고를 당해 피가 통하지 않는 부위가 너무 아파 고통스럽지만 말씀이 아니었다면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나는 도저히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정말 교제가 하고 싶어 모인 이들인데 그 자리에 있는 나는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내게 거듭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껏 살면서 그때만큼 조급했던 적이 없었다. 구원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해 여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는 내 마음은 여느 때와 달랐다.
하지만 육신은 마음과는 달랐다. 오랫동안 밤낮이 바뀌어 생활해 왔기 때문이었는지 설교를 듣는데 잠이 쏟아져서 첫날부터 금요일 전날까지 듣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설교 내용이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영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는데도 잠이 왔다. 일부러 서서 보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설교가 끝나고 밖에서 남편을 만났다.
“해결 되었나?”
“안 되었다.”
구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졸다 나왔을 뿐더러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그 질문에, 무슨 마음인지 당당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니는 아직 마음 고생 더 해야 한다.”
남편은 매정하게 이야기하고는 등을 휙 돌려 먼저 가버렸다. 밥 먹었냐는 소리도, 다시 한번 잘 들어보자며 위로해 주는 말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너무 야속하고 섭섭했다. 하지만 그때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더라면 찾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요일이었다. 공식적인 설교는 모두 끝났다. 저녁 설교가 끝난 후에도 교제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나는 참석을 했다. 수지에서 동물병원을 한다는 형제가 앞에 나와 자신이 장운동을 꾸준히 하여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간증을 하는 와중에 찬송가 361장을 다 같이 부르자고 했다.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그 순간 내 눈앞에 산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이 제사가, 주님이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모임이 끝나고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나는 잠자러 들어가지 않고 밖에 나와 혼자 찬송가를 계속 다시 보았다.
다음날 한 형제님에게 달려갔다. 어제 내가 찬송가 361장을 부르는데 주님이 나를 위해 산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분은 미가서 7장 19절을 보여 주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아. 모든 말씀이 내게 꼭 맞았다. 내 죄는 발로 밟히고 깊은 바다에 던져진 것이었다. 나는 해결되었다. 남편은 지금껏 삼십 몇 년을 속아왔는데 안 믿는다며, 경상도 남자다운 우스갯소리를 무뚝뚝하게 던졌다. 정확히 33년 만이었다. 나는 마치 38년을 병자로 살았던 성경 속 그 사람처럼 기적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평화로운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교제 가운데 거하며
지금은 확실하게 내 마음에서 주님이 나를 거두어주신 것이 믿어지니 생활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나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주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일도 즐겁게 하고 있다. 포장마차 일을 하면서 주말에 선교센터에서 모이는 교제에 참석하기는 쉽진 않지만 가능하면 참석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남들보다 수입은 줄겠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더 좋다. 주말이 기다려져 금요일이 되면 마음이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요즘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먹고 살만큼은 보살펴 주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이 이렇게까지 좋아지니 몸도 많이 회복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살이 많이 붙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마음이 급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성경책을 마구 보았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33년을 그저 그렇게 살다가 내가 구원받지 않았음을 깨우친 계기가 되었던 것은 형제와 얽힌 돈 문제였다. 처음에는 왜 형제와 함께 장사를 해서 이런 문제를 겪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후회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로 인해 아팠던 심신의 고통이 없었다면 내가 구원받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함께 사업을 했던 그 형제와 지금은 자연스럽게 지낸다. 이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내 마음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형제와 그의 처도 몸이 좋지 않고 또 이 교제에서 조금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데, 앞으로 이분들을 다시 교제 속으로 이끄는 것이 내 숙제이자 기도이다. 내가 해결되지 않아서 가까이 챙기지 못했던 자식들의 구원 문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 또한 내게 남은 숙제이자 기도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는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