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을 지배한 수많은 의문들
나는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천안(天安)에서 6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만 여섯이라 어렸을 적 밥 먹을 때면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 경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형들의 위세 속에서 나는 조금 내성적인 성격에 그리 튼튼하지 못한 체력으로 마른 체질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집에서만 지낼 정도로 차분했고, 사색과 산책하기를 즐기고, 음악을 감상하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실향민이시라 일가친척이 없어 방학이 되어도 친척집에 가 보지도 못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몸은 주로 집에 있었지만 마음에는 무언가 욕구불만과 호기심이 많아서 늦은 밤이면 홀로 책상에 앉아 창밖의 달을 쳐다보며 시를 쓰고 인생의 고민들을 일기장에 계속 써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이 지구가 없다면, 즉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는 어떠할까? 나도 앞으로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늙어서 노인이 될까? 별별 망상과 생각들이 항상 떠나지 않았고 밖에 나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인생을 조금 더 조망, 조우하고 싶어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고민아였다. 남들처럼 그저 편하게 마음대로 행동하고 마음껏 즐기고 싶기도 한데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세상 걱정을 혼자 다 끌어안듯이 고민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었고 궁금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는 것은 좋아해서 그때가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때였다.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로마 시대의 전쟁 영화와 성서 영화(십계, 천지창조, 소돔과 고모라, 벤허 등),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 등을 특히 좋아했다. 영화를 보면서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구나’라는 생각도 하면서 내가 지금처럼 편안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신가? 바다가 갈라지는 웅장한 장면은 정말 사실일까?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왕이며 구세주인 예수를 미워하여 죽였을까? 유대 종교를 왜 동양인인 우리까지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기가 택한 민족인 유대인을 히틀러가 600만 명씩이나 학살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왜 지금까지 하나님을 계속 믿으며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전에서 메시야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까? 등등 영화를 보면 볼수록 궁금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신나는 전투 장면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지만 아리송한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책을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 골수 예수쟁이 집안이 있어서 찬송가와 통곡하는 기도를 지겨울 정도로 들었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이 노래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어째서 예수쟁이들은 날마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 이야기하고 노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후세계만 기다리면서, 지금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는 조금 맞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은 못살고 구질하게 보였고 실제로 광신적으로 미쳐서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기독교를 믿는다면 저들처럼은 안 믿겠다, 조금 더 차분히 알아보고 잘 믿겠다는 막연한 신앙론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받기 위해 형들과 어울려서 1년에 한 번은 예배당에 갔는데 예배당 맨 앞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이 왠지 무섭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서 십자가 형틀에 돌아가셨나? 에덴동산 이야기는 신화겠지? 물 위를 걷고 부활하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은 정말 가능했을까? 등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어느 날, 아버지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렇게 든든히 우리 여섯 형제를 키워 주시고 한국전쟁 때 어머니와 함께 무일푼으로 남한으로 피난 오셔서 쌀 장사에 떡 방앗간 등을 해 가며 그래도 살아갈 만큼은 돈도 버셨는데, 일 때문에 너무 고민하고 신경 쓰셔서 그만 쓰러지신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신 적이 없어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죽음이라는 것이 내 가까이에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주위에 친척이 없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등 웃어른들이 돌아가시는 것도 보지 못한 터라 더욱 죽음이 생소하고 허망하고 황당하기만 하였다.
언젠가는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죽음 후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영혼은 죽지 않고 어떤 곳에서 영원히 사는 걸까? 사랑하는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곤 했다.
쇠약한 몸으로 보낸 혼돈의 시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제는 나도 인생을 조금 즐기고 싶고 한번 멋지게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젊음과 낭만을 만끽하는 즐거운 대학 1년생이 되자고 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취하도록 마셔보고 미팅도 하고 대학 서클의 엠티도 가보고 머리도 장발로 멋들어지게 길러보고 기숙사에서 선배들과 밤새도록 담배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인생 토론도 해 보고, 고등학교 때까지 매어 살다가 이제 살 판 난 듯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아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몸이 쇠약해지고 몸이 아프게 되었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닌데다가 연일 연탄불 피우는 기숙사 방에서 담배 연기 자욱하게 피워대며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휴학계를 내고 2년간 천안 집에서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휴식을 취했다.
몸은 점점 호전되어 갔지만 이렇게 몸이 아파보니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고 의욕도 사라졌고, 절망과 회의에 젖어 방황과 혼돈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도 남들처럼 멋지게 한번 살고 싶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뒤쳐지고 나약하고, 바보처럼 이렇게 아파서 집에 틀어박혀 살아야 하나 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했다.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슬픈 영혼의 혼돈의 글들을 써 내려갔다. ‘어머니는 왜 날 낳으셔서 이런 고생을 시키시나.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도 갈등도 없었을 텐데....’ 하고 부모님도 원망해 보았다. 신이 계시다면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고 불평불만만 쌓여갔다.
그러나 이렇게만 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나는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들었다. 특히 해외 팝송을 즐겨 듣곤 했다. 데비 분이라는 가수의 “You light up my life”(당신은 내 인생의 불을 밝혀 주었습니다) 라는 노래는 정말 많이 들었다. 나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내 인생에 등불을 환히 밝혀줄 사람은 없는가? 그런 연인이 있을까? 아니면 절대자인 조물주가 그럴 수 있나?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무언지 모를 위로자가, 인생의 해결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어떤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을 텐데....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그 어떤 진리, 그것이 무엇일까? 밤이면 인생의 해답이나 진리를 찾고자 갈망하고 열망하게 되었다.
혹시나 유명한 철학책이나 소설책에 그 해답이나 진리가 있을까 하여 형들이 전집류로 사 놓은 책 중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 <죄와 벌>, <여자의 일생>, <정신분석학 입문>, <좁은 문> 등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성, 한을 그렸지만 근본적인 인생의 해답은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도 하였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교회에 가서 한번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진리를 찾아 헤매며
천안에서 제일 크고 멋있는 예배당을 찾았다. 전자 오르간도 있는 제일 큰 교회를 찾아 몰래 살짝 일요일에 가 보았다. 부흥회도 참석하고 대규모 부흥연합집회도 가 보았다. 기도 시간에 남들처럼 길게 중얼중얼 기도하고 싶어서 해 보았지만 금방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저 몸과 마음이 좋아지고 또 인생의 참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바라는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무얼 잘못했고 무얼 어떻게 해달라고 하고 무슨 답답한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쥐어짜는 내용의 한탄스런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통곡하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런 예배당은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졸라대고 잘못 살았다고 통성 기도나 하는 곳 같아 정말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단지 나는 예배당에서 전자 오르간의 웅장하고 거룩한 음악 소리가 좋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는 시간이 위로가 되었고 잠시나마 편안했기에 가곤 했었다. 다니던 대학교가 미션스쿨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예배) 시간이 있고 교양과목으로 성서학 개론를 배우고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1학년 시절 인생에 대해 토론을 할 때에도 나는 주위 친구들에게 기독교를 믿고 싶어도 믿기 어려운 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인데, 내 마음에는 자유함이 없었고 믿으려고 하면 더욱더 갈등만 생겼다. 율법을 지키려면 젊은 시절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친구들에게 “젊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쫀쫀해져서 못쓴다.” 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곤 해서 답답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라는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은 젊은 시절에 더욱 지키기 어려운 율법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진리를 듣고 자유로워질 수 있고 여자를 보고도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절에 다니셨는데 다른 가족들은 무신론이었지만 어머니가 절에 다니시니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만약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 가족들이 반대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당장 아버지의 제사에 절을 할 수 없게 되어 분쟁의 씨앗이 될 것 같아 그것도 두려웠다.
휴학하기 전 1학년일 때는 각종 기독교 서클에도 많이 가 보았다. 제자 선교회, 형제 교회, 영어로 설교한다는 조이 선교회 등 친구들과 선배들이 권하는 선교 단체를 참 많이 접해 보았다. 조이 선교회에 열심인 한 선배가 어느 날 나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버스 안에서 내 손을 잡고서는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 해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기로 지금 결심하였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아멘” 그러면서 이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것이니 열심히 믿으라고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무런 반응도 느낌도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그 뒤로도 대부흥집회에도 가 보았지만 정말 무당 푸닥거리와 다름이 없어 보여 점점 실망만 했고 조용히 진리를 찾고 마음에 평안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답답해져만 갔다.
휴학하는 2년 동안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2학년에 복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휴학 마지막 해인 1979년의 마지막 날, 남들은 연말연시라고 망년회하러 시내 유흥가로, 천안 명동 거리로 나가 밤새 마시고 노는 날, 70년대가 지나고 대망의 80년대가 시작된다고 다들 난리이던 그날, 나는 조용히 올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다가올 1980년 새해의 각오도 다질 겸 재야의 종 치는 그 시간에 있는 영시(0시)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헌금채에 약간의 돈을 헌금하고 진정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면 그때 잠깐은 믿음이 있는 것 같았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믿음이 약해지곤 합니다. 내년에는 정말 제게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잘 믿게 하시던지, 그렇지 않으시면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평안하게 믿음을 갖고 살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죄의식 없이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내년에는 기도의 응답이 꼭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주께서 내 마음 문을 여시고
정말 기도의 응답을 주신 것이었을까? 1980년 3월 새 학기를 맞아 복학해서 천안에서 서울 노량진에 있는 대학까지 완행열차로 통학하고 있을 때였다. 천안역에서 걸어서 집으로 가는 중에 전봇대에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제목의 집회 광고를 보았다. 그 광고에는 이스라엘과 구 소련에 대한 표현이 있었다. 집에 와 보니 신문 전단지에도 똑같은 내용의 집회 광고가 있었다. 속으로 ‘참으로 희한하다. 성경에 이런 현실적인 정치 내용이 있는 것인가?’ 호기심도 생기고 처음 들어보는 집회 광고라 한번 가보고 싶었다.
집회는 1980년 3월 10일부터 4일까지 5일간이었다. 처음 3일간은 학교 수업 때문에 저녁 집회에만 참석했는데 점점 흥미진진해져서 마지막 이틀은 학교도 가지 않고 낮 집회부터 저녁 집회까지 모두 들었다. 권 목사님이 쩌렁쩌렁하는 목소리로 힘차게 세계 정세와 그 모든 것이 모두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지금 세상이 이렇게 불안전하고 혼란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한 세계로 창조해가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굉장히 공감이 갔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진정 계시다면 이런 세상을 목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맞아! 온전한 하늘나라를 위해 지금은 창조의 완성이 아닌 과정인 것이야!’ 마음에 무언가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계속 말씀에 빨려 들어갔다.
낮 집회를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 사항을 열 가지 정도 메모해서 질문할 준비를 했다. 옛날 사람, 즉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지 등을 질문했는데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 주셨다. 모든 질문의 해답이 다 성경에 있었다. 선민인 유대인의 수난의 역사가 이해되었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표본으로 삼아 세계 역사를 끌어가시는 것을 듣고는 ‘그렇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성경은 정말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지금 현실 정치적으로나, 모든 인류의 문제가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권 목사님은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천국도 있고 지옥도 사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짓는 죄에 대해 계속 나열하셨다. 그리고 그 죄에 하나라도 걸리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서(지옥)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이쿠, 나도 큰일 났구나.’ 싶었다. 마음속으로 지은 죄가 많은데다 모두 성경에 기록된 죄목에 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죄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고는 마지막에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하셨는데, 나도 정말 죄 용서를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다는 기도가 마음에 가득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밤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데 큰일 났다. 이번 기회에 이 문제도 해결하고 확고한 믿음도 가져야지.’ 하고 굳은 다짐을 했다.
집회 마지막 날, 권 목사님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라는 말씀을 읽으셨다. ‘어? 인간의 죄를 다 해결해 놓으셨다고? 그럼 내 죄는 어떻게 된 거지?’ 오후 설교를 듣는데 어떤 분은 얼굴이 환해지면서 좋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내 죄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고 하지만 나에게 믿음은 언제 생기는 것인지, 무언가 마음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회에서 권 목사님은 히브리서 9장 12절 말씀을 읽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셨구나, 그런데 나는 언제 믿는 거지?’ 하고 마음에 바짝 긴장을 하고 온 귀를 말씀에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설교자가 발로 바닥을 쾅 내리치면서, “단번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시는데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아, 단번에, 내 죄가 지금 용서되었구나!!’ 그 사실이 믿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고 기쁘고 행복했다. 이젠 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 하였다. 아! 내 의지로, 열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열어 주시는구나. 작년 연말, 영시 예배에서 진정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했는데 이제 응답을 주신 것이다.
인생의 모든 숙제가 풀렸다. 더 이상 삶의 갈등과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화평함과 은혜를 얻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늘나라 가는 길과 참진리와 새 생명을 발견한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집에 있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런 행복감과 자유로움과 평안함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영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정말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찬송가 209장)
그 진리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인도하셨다. 더군다나 아무런 인도자 없이 혼자 이 진리를 만난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3-4)
청소년 시절을 지배한 수많은 의문들
나는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천안(天安)에서 6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만 여섯이라 어렸을 적 밥 먹을 때면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 경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형들의 위세 속에서 나는 조금 내성적인 성격에 그리 튼튼하지 못한 체력으로 마른 체질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집에서만 지낼 정도로 차분했고, 사색과 산책하기를 즐기고, 음악을 감상하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실향민이시라 일가친척이 없어 방학이 되어도 친척집에 가 보지도 못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몸은 주로 집에 있었지만 마음에는 무언가 욕구불만과 호기심이 많아서 늦은 밤이면 홀로 책상에 앉아 창밖의 달을 쳐다보며 시를 쓰고 인생의 고민들을 일기장에 계속 써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이 지구가 없다면, 즉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는 어떠할까? 나도 앞으로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늙어서 노인이 될까? 별별 망상과 생각들이 항상 떠나지 않았고 밖에 나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인생을 조금 더 조망, 조우하고 싶어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고민아였다. 남들처럼 그저 편하게 마음대로 행동하고 마음껏 즐기고 싶기도 한데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세상 걱정을 혼자 다 끌어안듯이 고민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었고 궁금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는 것은 좋아해서 그때가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때였다.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로마 시대의 전쟁 영화와 성서 영화(십계, 천지창조, 소돔과 고모라, 벤허 등),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 등을 특히 좋아했다. 영화를 보면서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구나’라는 생각도 하면서 내가 지금처럼 편안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신가? 바다가 갈라지는 웅장한 장면은 정말 사실일까?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왕이며 구세주인 예수를 미워하여 죽였을까? 유대 종교를 왜 동양인인 우리까지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기가 택한 민족인 유대인을 히틀러가 600만 명씩이나 학살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왜 지금까지 하나님을 계속 믿으며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전에서 메시야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까? 등등 영화를 보면 볼수록 궁금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신나는 전투 장면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지만 아리송한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책을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 골수 예수쟁이 집안이 있어서 찬송가와 통곡하는 기도를 지겨울 정도로 들었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이 노래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어째서 예수쟁이들은 날마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 이야기하고 노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후세계만 기다리면서, 지금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는 조금 맞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은 못살고 구질하게 보였고 실제로 광신적으로 미쳐서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기독교를 믿는다면 저들처럼은 안 믿겠다, 조금 더 차분히 알아보고 잘 믿겠다는 막연한 신앙론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받기 위해 형들과 어울려서 1년에 한 번은 예배당에 갔는데 예배당 맨 앞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이 왠지 무섭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서 십자가 형틀에 돌아가셨나? 에덴동산 이야기는 신화겠지? 물 위를 걷고 부활하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은 정말 가능했을까? 등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어느 날, 아버지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렇게 든든히 우리 여섯 형제를 키워 주시고 한국전쟁 때 어머니와 함께 무일푼으로 남한으로 피난 오셔서 쌀 장사에 떡 방앗간 등을 해 가며 그래도 살아갈 만큼은 돈도 버셨는데, 일 때문에 너무 고민하고 신경 쓰셔서 그만 쓰러지신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신 적이 없어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죽음이라는 것이 내 가까이에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주위에 친척이 없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등 웃어른들이 돌아가시는 것도 보지 못한 터라 더욱 죽음이 생소하고 허망하고 황당하기만 하였다.
언젠가는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죽음 후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영혼은 죽지 않고 어떤 곳에서 영원히 사는 걸까? 사랑하는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곤 했다.
쇠약한 몸으로 보낸 혼돈의 시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제는 나도 인생을 조금 즐기고 싶고 한번 멋지게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젊음과 낭만을 만끽하는 즐거운 대학 1년생이 되자고 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취하도록 마셔보고 미팅도 하고 대학 서클의 엠티도 가보고 머리도 장발로 멋들어지게 길러보고 기숙사에서 선배들과 밤새도록 담배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인생 토론도 해 보고, 고등학교 때까지 매어 살다가 이제 살 판 난 듯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아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몸이 쇠약해지고 몸이 아프게 되었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닌데다가 연일 연탄불 피우는 기숙사 방에서 담배 연기 자욱하게 피워대며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휴학계를 내고 2년간 천안 집에서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휴식을 취했다.
몸은 점점 호전되어 갔지만 이렇게 몸이 아파보니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고 의욕도 사라졌고, 절망과 회의에 젖어 방황과 혼돈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도 남들처럼 멋지게 한번 살고 싶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뒤쳐지고 나약하고, 바보처럼 이렇게 아파서 집에 틀어박혀 살아야 하나 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했다.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슬픈 영혼의 혼돈의 글들을 써 내려갔다. ‘어머니는 왜 날 낳으셔서 이런 고생을 시키시나.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도 갈등도 없었을 텐데....’ 하고 부모님도 원망해 보았다. 신이 계시다면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고 불평불만만 쌓여갔다.
그러나 이렇게만 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나는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들었다. 특히 해외 팝송을 즐겨 듣곤 했다. 데비 분이라는 가수의 “You light up my life”(당신은 내 인생의 불을 밝혀 주었습니다) 라는 노래는 정말 많이 들었다. 나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내 인생에 등불을 환히 밝혀줄 사람은 없는가? 그런 연인이 있을까? 아니면 절대자인 조물주가 그럴 수 있나?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무언지 모를 위로자가, 인생의 해결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어떤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을 텐데....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그 어떤 진리, 그것이 무엇일까? 밤이면 인생의 해답이나 진리를 찾고자 갈망하고 열망하게 되었다.
혹시나 유명한 철학책이나 소설책에 그 해답이나 진리가 있을까 하여 형들이 전집류로 사 놓은 책 중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 <죄와 벌>, <여자의 일생>, <정신분석학 입문>, <좁은 문> 등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성, 한을 그렸지만 근본적인 인생의 해답은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도 하였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교회에 가서 한번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진리를 찾아 헤매며
천안에서 제일 크고 멋있는 예배당을 찾았다. 전자 오르간도 있는 제일 큰 교회를 찾아 몰래 살짝 일요일에 가 보았다. 부흥회도 참석하고 대규모 부흥연합집회도 가 보았다. 기도 시간에 남들처럼 길게 중얼중얼 기도하고 싶어서 해 보았지만 금방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저 몸과 마음이 좋아지고 또 인생의 참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바라는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무얼 잘못했고 무얼 어떻게 해달라고 하고 무슨 답답한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쥐어짜는 내용의 한탄스런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통곡하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런 예배당은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졸라대고 잘못 살았다고 통성 기도나 하는 곳 같아 정말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단지 나는 예배당에서 전자 오르간의 웅장하고 거룩한 음악 소리가 좋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는 시간이 위로가 되었고 잠시나마 편안했기에 가곤 했었다. 다니던 대학교가 미션스쿨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예배) 시간이 있고 교양과목으로 성서학 개론를 배우고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1학년 시절 인생에 대해 토론을 할 때에도 나는 주위 친구들에게 기독교를 믿고 싶어도 믿기 어려운 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인데, 내 마음에는 자유함이 없었고 믿으려고 하면 더욱더 갈등만 생겼다. 율법을 지키려면 젊은 시절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친구들에게 “젊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쫀쫀해져서 못쓴다.” 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곤 해서 답답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라는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은 젊은 시절에 더욱 지키기 어려운 율법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진리를 듣고 자유로워질 수 있고 여자를 보고도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절에 다니셨는데 다른 가족들은 무신론이었지만 어머니가 절에 다니시니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만약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 가족들이 반대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당장 아버지의 제사에 절을 할 수 없게 되어 분쟁의 씨앗이 될 것 같아 그것도 두려웠다.
휴학하기 전 1학년일 때는 각종 기독교 서클에도 많이 가 보았다. 제자 선교회, 형제 교회, 영어로 설교한다는 조이 선교회 등 친구들과 선배들이 권하는 선교 단체를 참 많이 접해 보았다. 조이 선교회에 열심인 한 선배가 어느 날 나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버스 안에서 내 손을 잡고서는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 해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기로 지금 결심하였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아멘” 그러면서 이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것이니 열심히 믿으라고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무런 반응도 느낌도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그 뒤로도 대부흥집회에도 가 보았지만 정말 무당 푸닥거리와 다름이 없어 보여 점점 실망만 했고 조용히 진리를 찾고 마음에 평안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답답해져만 갔다.
휴학하는 2년 동안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2학년에 복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휴학 마지막 해인 1979년의 마지막 날, 남들은 연말연시라고 망년회하러 시내 유흥가로, 천안 명동 거리로 나가 밤새 마시고 노는 날, 70년대가 지나고 대망의 80년대가 시작된다고 다들 난리이던 그날, 나는 조용히 올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다가올 1980년 새해의 각오도 다질 겸 재야의 종 치는 그 시간에 있는 영시(0시)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헌금채에 약간의 돈을 헌금하고 진정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면 그때 잠깐은 믿음이 있는 것 같았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믿음이 약해지곤 합니다. 내년에는 정말 제게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잘 믿게 하시던지, 그렇지 않으시면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평안하게 믿음을 갖고 살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죄의식 없이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내년에는 기도의 응답이 꼭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주께서 내 마음 문을 여시고
정말 기도의 응답을 주신 것이었을까? 1980년 3월 새 학기를 맞아 복학해서 천안에서 서울 노량진에 있는 대학까지 완행열차로 통학하고 있을 때였다. 천안역에서 걸어서 집으로 가는 중에 전봇대에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제목의 집회 광고를 보았다. 그 광고에는 이스라엘과 구 소련에 대한 표현이 있었다. 집에 와 보니 신문 전단지에도 똑같은 내용의 집회 광고가 있었다. 속으로 ‘참으로 희한하다. 성경에 이런 현실적인 정치 내용이 있는 것인가?’ 호기심도 생기고 처음 들어보는 집회 광고라 한번 가보고 싶었다.
집회는 1980년 3월 10일부터 4일까지 5일간이었다. 처음 3일간은 학교 수업 때문에 저녁 집회에만 참석했는데 점점 흥미진진해져서 마지막 이틀은 학교도 가지 않고 낮 집회부터 저녁 집회까지 모두 들었다. 권 목사님이 쩌렁쩌렁하는 목소리로 힘차게 세계 정세와 그 모든 것이 모두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지금 세상이 이렇게 불안전하고 혼란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한 세계로 창조해가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굉장히 공감이 갔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진정 계시다면 이런 세상을 목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맞아! 온전한 하늘나라를 위해 지금은 창조의 완성이 아닌 과정인 것이야!’ 마음에 무언가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계속 말씀에 빨려 들어갔다.
낮 집회를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 사항을 열 가지 정도 메모해서 질문할 준비를 했다. 옛날 사람, 즉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지 등을 질문했는데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 주셨다. 모든 질문의 해답이 다 성경에 있었다. 선민인 유대인의 수난의 역사가 이해되었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표본으로 삼아 세계 역사를 끌어가시는 것을 듣고는 ‘그렇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성경은 정말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지금 현실 정치적으로나, 모든 인류의 문제가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권 목사님은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천국도 있고 지옥도 사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짓는 죄에 대해 계속 나열하셨다. 그리고 그 죄에 하나라도 걸리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서(지옥)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이쿠, 나도 큰일 났구나.’ 싶었다. 마음속으로 지은 죄가 많은데다 모두 성경에 기록된 죄목에 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죄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고는 마지막에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하셨는데, 나도 정말 죄 용서를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다는 기도가 마음에 가득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밤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데 큰일 났다. 이번 기회에 이 문제도 해결하고 확고한 믿음도 가져야지.’ 하고 굳은 다짐을 했다.
집회 마지막 날, 권 목사님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라는 말씀을 읽으셨다. ‘어? 인간의 죄를 다 해결해 놓으셨다고? 그럼 내 죄는 어떻게 된 거지?’ 오후 설교를 듣는데 어떤 분은 얼굴이 환해지면서 좋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내 죄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고 하지만 나에게 믿음은 언제 생기는 것인지, 무언가 마음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회에서 권 목사님은 히브리서 9장 12절 말씀을 읽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셨구나, 그런데 나는 언제 믿는 거지?’ 하고 마음에 바짝 긴장을 하고 온 귀를 말씀에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설교자가 발로 바닥을 쾅 내리치면서, “단번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시는데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아, 단번에, 내 죄가 지금 용서되었구나!!’ 그 사실이 믿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고 기쁘고 행복했다. 이젠 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 하였다. 아! 내 의지로, 열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열어 주시는구나. 작년 연말, 영시 예배에서 진정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했는데 이제 응답을 주신 것이다.
인생의 모든 숙제가 풀렸다. 더 이상 삶의 갈등과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화평함과 은혜를 얻었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늘나라 가는 길과 참진리와 새 생명을 발견한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집에 있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런 행복감과 자유로움과 평안함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영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정말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찬송가 209장)
그 진리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인도하셨다. 더군다나 아무런 인도자 없이 혼자 이 진리를 만난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