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대학교 교수 집안의 6남매 중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항상 형의 그늘에 묻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욕심과 불만이 많은 아이라고 했는데 특히 먹는 것을 나누어 줄 때 가장 심했다고 말했다.
그 시대에는 어느 집이든 장손 우대 사상이 아주 심했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형보다 못한 가방을 사 주셨고 유치원에도 보내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형에 대해서는 경기중학교에 못 가고 서울중학교에 간다며 안타까워하셨고, 형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매일 영어를 가르치셨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표를 보자는 말을 부모님께 들은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도, 대학 진학 상담을 할 때도, 초등학교에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항상 혼자였다. 특히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가 어린 마음에 가장 슬펐던 것 같다. 울며 집에 오다 슬픔을 그냥 혼자 삭이고 말았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자립심이 크다. 누구를 의지해 본 기억이 없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공주로 내려간 것도 가족에 대한 내적인 불만과 반항심의 발로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 왔으며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고민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결국, ‘재미있게 살아야지. 어차피 한평생인 것을, 인생에 대해 생각하면 무엇 하나. 술도 많이 먹고 친구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렇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재미있는 친구라 하였다. 그러나 늦은 밤 개천 길을 걷는 걸음에는 눈물이 있었다. 아무리 즐겁게 지내려 해도 나를 누르는 허무함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4학년 겨울이던 11월 중순. 졸업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공주에 내려가 가장 친한 친구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의 학교가 데모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져 그는 고향에 가고 없었고 그의 형이 있었는데 오랜만이라며 잠깐 들어오라고 했다. 형과 나는 1년 정도 서로 옆방에서 하숙한 경험이 있어 무척 친했다.
형과 마주 앉은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형의 얼굴은 내가 예전에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밝고 희망에 차 있었다. 나의 찌푸려진 얼굴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형은 내게 대뜸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성경 안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하였다. 삶의 의미. 그것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갈망하며 찾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았다니.... 나는 크게 놀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곳에서 율법에 대해 배웠고 죄가 무엇인지도 배웠으며 선과 악,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래서 아무리 술을 마시며 놀아도 율법을 어기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고,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여름, 합창단 선배의 권유로 오랜만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는데 이미 나 자신이 어릴 때와는 너무 변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판단 없이 무조건 믿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나는 설교하는 목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따지고 비판하고 있었다. 결국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그 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교회이고, 그곳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귀가 확 뚫렸다. ‘아니, 어디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다는 것인가?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것을....’ 무작정 무엇이냐고, 알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형은 곧바로 가르쳐 주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 서너 번은 형을 찾아갔던 것 같다. 그렇게 방문했던 마지막 날, 형은 내게 구원받아야 한다며 복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내게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했지 복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형은 마지막으로 권신찬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에 찾아가라고 권했다. 그곳에 가면 상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상담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즉시 바로 그 교회를 찾았으나 권신찬 목사라는 분은 없었다. 다른 분이 설교를 하는데 들어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뿐이었다.
크게 실망하고 돌아온 후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과 동생과 함께 탁구장에 갔는데 탁구장 벽면에 권신찬 목사의 전도집회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인에게 그 전도집회에 대해 물었고, 바로 그 교회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설교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못하면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죄에 대한 강한 설교였다.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설교 후 고 형제와 상담을 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침 일찍 권신찬 목사님을 찾아가 뵙고 상황을 말씀 드리니 한 형제를 소개해 주었고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씀이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형제가 한문으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크게 쓰고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에게 복을 주는 말씀이라고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어떤 복을 주셨는지를 설명하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 이야기,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이야기, 전에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자신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동안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벗었음을 느꼈다. 기뻐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인사를 드리고 방송국을 나서는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날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변했다. 담배도 바로 끊었다. 아니 끊은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이 가치 없는 것이 되었으니 그저 피울 마음이 없어졌다. 물론 술도 친구도 다 잊어 버렸다. 그렇게 활달하고 놀기 좋아하고 어디 놀러 가면 항상 앞장서던 나는 사라지고, 조용히 성경만 붙들고 사는 샌님이 되었다.
나는 과거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노래하라고 하면 곤욕스러워하는 사람, 사람들 앞에 나와 말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내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인가 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형제자매들이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우리의 만남도 순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만남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를 의논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딸과 아들도 모두 성장하여 우리의 대화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대화가 있는 즐거운 가족이다.
나는 지금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도 있었고 오르막을 걸을 때도 있었고 내리막을 힘들이지 않고 내려올 때도 있었으며, 한눈을 팔 때도 있었고 잠시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항상 나를 지켜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을 믿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의지하고, 불기둥으로 유대인들을 인도해 주셨던 주님을 믿으며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나는 몰라도 더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기쁨을 가지고 산다.
나는 서울대학교 교수 집안의 6남매 중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항상 형의 그늘에 묻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욕심과 불만이 많은 아이라고 했는데 특히 먹는 것을 나누어 줄 때 가장 심했다고 말했다.
그 시대에는 어느 집이든 장손 우대 사상이 아주 심했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형보다 못한 가방을 사 주셨고 유치원에도 보내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형에 대해서는 경기중학교에 못 가고 서울중학교에 간다며 안타까워하셨고, 형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매일 영어를 가르치셨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표를 보자는 말을 부모님께 들은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도, 대학 진학 상담을 할 때도, 초등학교에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항상 혼자였다. 특히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가 어린 마음에 가장 슬펐던 것 같다. 울며 집에 오다 슬픔을 그냥 혼자 삭이고 말았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자립심이 크다. 누구를 의지해 본 기억이 없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공주로 내려간 것도 가족에 대한 내적인 불만과 반항심의 발로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 왔으며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고민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결국, ‘재미있게 살아야지. 어차피 한평생인 것을, 인생에 대해 생각하면 무엇 하나. 술도 많이 먹고 친구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렇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재미있는 친구라 하였다. 그러나 늦은 밤 개천 길을 걷는 걸음에는 눈물이 있었다. 아무리 즐겁게 지내려 해도 나를 누르는 허무함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4학년 겨울이던 11월 중순. 졸업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공주에 내려가 가장 친한 친구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의 학교가 데모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져 그는 고향에 가고 없었고 그의 형이 있었는데 오랜만이라며 잠깐 들어오라고 했다. 형과 나는 1년 정도 서로 옆방에서 하숙한 경험이 있어 무척 친했다.
형과 마주 앉은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형의 얼굴은 내가 예전에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밝고 희망에 차 있었다. 나의 찌푸려진 얼굴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형은 내게 대뜸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성경 안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하였다. 삶의 의미. 그것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갈망하며 찾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았다니.... 나는 크게 놀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곳에서 율법에 대해 배웠고 죄가 무엇인지도 배웠으며 선과 악,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래서 아무리 술을 마시며 놀아도 율법을 어기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고,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여름, 합창단 선배의 권유로 오랜만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는데 이미 나 자신이 어릴 때와는 너무 변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판단 없이 무조건 믿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나는 설교하는 목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따지고 비판하고 있었다. 결국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그 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교회이고, 그곳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귀가 확 뚫렸다. ‘아니, 어디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다는 것인가?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것을....’ 무작정 무엇이냐고, 알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형은 곧바로 가르쳐 주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 서너 번은 형을 찾아갔던 것 같다. 그렇게 방문했던 마지막 날, 형은 내게 구원받아야 한다며 복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내게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했지 복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형은 마지막으로 권신찬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에 찾아가라고 권했다. 그곳에 가면 상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상담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즉시 바로 그 교회를 찾았으나 권신찬 목사라는 분은 없었다. 다른 분이 설교를 하는데 들어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뿐이었다.
크게 실망하고 돌아온 후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과 동생과 함께 탁구장에 갔는데 탁구장 벽면에 권신찬 목사의 전도집회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인에게 그 전도집회에 대해 물었고, 바로 그 교회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설교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못하면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죄에 대한 강한 설교였다.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설교 후 고 형제와 상담을 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침 일찍 권신찬 목사님을 찾아가 뵙고 상황을 말씀 드리니 한 형제를 소개해 주었고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씀이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형제가 한문으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크게 쓰고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에게 복을 주는 말씀이라고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어떤 복을 주셨는지를 설명하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 이야기,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이야기, 전에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자신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동안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벗었음을 느꼈다. 기뻐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인사를 드리고 방송국을 나서는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날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변했다. 담배도 바로 끊었다. 아니 끊은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이 가치 없는 것이 되었으니 그저 피울 마음이 없어졌다. 물론 술도 친구도 다 잊어 버렸다. 그렇게 활달하고 놀기 좋아하고 어디 놀러 가면 항상 앞장서던 나는 사라지고, 조용히 성경만 붙들고 사는 샌님이 되었다.
나는 과거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노래하라고 하면 곤욕스러워하는 사람, 사람들 앞에 나와 말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내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인가 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형제자매들이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우리의 만남도 순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만남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를 의논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딸과 아들도 모두 성장하여 우리의 대화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대화가 있는 즐거운 가족이다.
나는 지금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도 있었고 오르막을 걸을 때도 있었고 내리막을 힘들이지 않고 내려올 때도 있었으며, 한눈을 팔 때도 있었고 잠시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항상 나를 지켜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을 믿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의지하고, 불기둥으로 유대인들을 인도해 주셨던 주님을 믿으며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나는 몰라도 더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기쁨을 가지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