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처럼 혹독했던 유도부 생활
제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도라는 소금이 많이 나는 섬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1970년 가을에 5남 1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는 항구 도시 목포에서 자랐지요.
5살 어린 시절에 볼거리에 걸려 벙어리가 될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말더듬이 왔고 한참 말할 나이에 말을 못 해 항상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공부보다는 몸으로 하는 운동을 좋아했고 특히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야구하면 제 이름이 불릴 정도로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일 동네 아이들과 산과 바다, 들로 놀러 다니는 것만 좋아해서 공부 안한다고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학교에서는 숙제를 안 해왔다고 기합을 받고 회초리를 맞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제가 공부보다는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일찌감치 저를 운동선수로 키우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감독으로 계시는 중학교에 유도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키신 것입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했기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특기 장학생으로 가려고 3차 테스트까지 합격해 놓은 상태였고 형이 그 중학교의 야구 선수였기에 학교생활도 편하리라는 생각에 야구를 고집했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야구하는 학교로 가면 자식으로 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까지 엄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공부도 잘하고 착실했던 형이 야구부에 들어간 후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은 야구부가 창설되면서 야구부에 들어갔는데, 그 후 선배들의 폭행 및 금품갈취 등으로 과격해졌고 잦은 가출로 비행청소년이 되어 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자식을 둘이나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심한 반대와 엄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도부의 군기는 야구부에 못지않았습니다. 특히 ‘굳히기’ 시간에는 누르기, 조르기, 꺾기 등으로 고문 당하는 듯했고, 상급생의 금품갈취와 구타는 중학생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다른 아이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럽던지 유도부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옥이 어디에 있는 것 같냐?”
“죽으면 가지 않겠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세상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는 것이 지옥이다.”
그 정도로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그 힘든 나날 동안 저도 지방에 시합하러 갈 때 부모님이 주신 여비로 몇 번에 걸쳐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부모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지요.
중학교 1, 2학년 때는 코치가 없어서 선배들에게 유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우는 유도는 기합 받고 힘 기르기, 매 맞고 맷집 키우기 등 선배의 말은 하늘이라는 식의 규율뿐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코치 없는 유도부에서 이제 우리가 하늘이 되려니 했는데, 대낮에 날벼락처럼 굳히기 일인자, 독종으로 소문난 국가 대표 출신의 코치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당한 만큼 후배들을 괴롭히는 것이 전통이고 우리의 한을 푸는 기회인데 공교롭게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어서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코치님이 오신 후 기본기가 제대로 안 된 우리는 하루하루 힘든 지옥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유도로써의 지옥 훈련이었습니다. 코치님의 주특기가 굳히기인지라 매일 누르기, 조르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유도부원 중에 악바리가 없다며 저만을 붙잡고 혹독하게 지도하셨습니다. 저는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르기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잠을 자다가 같이 자던 동생의 목을 잡고 조르기를 하다가 어머님이 “야, 이놈아! 동생 죽겠다.” 하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동생 목을 놓아 준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렵고 견디기 힘든 훈련이었지만 사실은 유도를 몸에 익힌 값진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유도부 생활을 잘 보내고 아버지와 둘째 형이 졸업한 유도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동기들이 12명 정도였는데 고등학교에는 5명의 동기들만이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다시 지옥의 시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승사자 같은 무서운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 2명은 입학 후 유도부를 그만두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중학교 코치님이 고등학교에 코치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 많은 위안을 받았지요. 코치님은 힘들고 혹독하게 운동을 시키셨지만 마음으로 많이 의지했고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유도부에서 견디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의 유도가 기본기 유도라면 고등학교의 유도는 실전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입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몸 관리, 체력 관리, 성적 관리 등등 상당히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예민한 시기에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동기들의 숫자만으로는 유도부 단체가 형성되지 않았기에 다른 운동을 하던 아이들 중에서 힘 좋고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들을 뽑아 함께 운동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지옥에 들어온 것이다.’
유도를 새로 시작하는 동기들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만두라고, 그냥 하던 것을 하든지 공부를 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는데 혹독한 훈련으로 인한 피곤함이 컸습니다. 그리고 전국 대회에서 메달을 따야만 대학에 갈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공부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코치님은 대학을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학교 뒤편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찻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굳히기’ 시간에 조르기를 당해 기절한 적이 있는데, 꿈속에서 내가 석탄을 실은 시커먼 기차 위에 앉아 어두운 터널 속으로 가는 중에 옆의 언덕에서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손짓하며 가지 말라고 하여 기차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깨어나 보니 저는 누워 있고 선배가 제 위에 올라타 정신 차리라며 제 뺨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픈 것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없었지만 기분은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기절하거나 기절 직전까지 자주 몰리기도 했습니다. 기절하는 순간에는 황홀했지만 기절 전까지의 고통은 고문 그 자체였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벗어나와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고 그 충격으로 인해 부모님은 당뇨병을 얻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님이 서울로 가시고 저와 동생만 목포에 남아 친척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였습니다.
저는 종교 생활은 특별하게 하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성스럽게 보이는 천주교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간혹 성당에도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 무렵에 비록 성당에는 가지 못해도 신을 의지하고 신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영성체를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영성체를 받으려면 주말마다 성당에 가서 공부도 해야 하고 외울 것도 많다는데 운동 때문에 그런 자리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공부도 하기 싫고 잘 외우지도 못할 것 같아 천국에는 가고 싶지만 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잘 봐주시겠지 하는 생각에 율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운동부원들과는 달리 후배들과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나쁜 짓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유도부는 단체 생활을 하는지라 선배의 말을 듣고 움직여야 했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같이 해야만 했기에 때론 나쁜 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었고 종교인도 아니면서 착한 척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이모님 댁에 놀러 갔는데 이모님이 성경과 요한계시록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나서 집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성체만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고 착하게만 살면 될 것이라는 제 생각과는 달리 구원받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오는 세상과 영원한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과 구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운동을 할 때마다 잦은 기절로 저승을 왔다갔다하는 저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유도는 체급별 운동인지라, 유도부원은 시합 일주일이나 십일 전에 보통 5kg에서 10kg 정도 살을 뺍니다. 약을 먹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한증탕에 들어가기도 해서 억지로 살을 뺍니다. 한증탕에 들어갈 때는 반 강제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수차례 반복하는데 선배들은 출입문을 잠그고 가두기도 합니다.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다 문을 부수고 나온 뒤 엄청나게 맞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런 한증탕에서도 1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데, 죽지도 않고 영원히 지옥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한증탕에만 들어가면 더 괴로웠고 지옥 생각에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굳히기’를 연습하며 수십 수백 번 기절했다가 깨어날 때마다, 이렇게 기절했다가 깨어나지 않으면 바로 지옥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절망에 빠졌습니다.
점점 더 운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계속 한다고 해도 금메달 따기는 힘들 것 같고 잘해야 운동 코치나 형사, 그도 못하면 험악한 세계에 빠져 살다 지옥이나 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고된 훈련으로 인한 무릎 부상, 가정 문제 등으로 인해 고심 끝에 운동을 접고 서울로 전학을 가기로 했었습니다.
그 무렵 목포에서 전도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생은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해서 참석할 수도 없었고 유도부원 신분으로도 매일 야간 훈련, 합숙 훈련을 하기 때문에 어차피 참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유도부라고 계속 속이며 오전 수업만 받고 유도부원들과 같이 교문을 빠져 나왔고, 유도부원들은 훈련장으로 갈 때 저는 목포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길은 마치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처럼 즐겁고 환한 길이었습니다. 운동을 안 한다는 자체로도 좋았습니다. 비록 유도부라고 속이며 수업을 빼먹은 불량 학생이었지만, 그 많은 학생중 전도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학생은 저 혼자라고 생각하니 그 집회가 저를 위한 것인양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집회장 맨 앞좌석에서 권 목사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전에 비디오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었지만 구원받지 못했던 터라 비디오테이프로만 접했던 권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어 기쁨은 두 배가 되었습니다. 지옥과 죽음을 많이 생각하며 구원받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저는 졸지도 않고 열심히 들었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을 하며 잘 들었기에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지옥에서 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흘리신 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6) 라는 말씀에서 확실히 믿게 되었고, 제가 죄와 영원한 지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성체를 받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피 흘림으로 내 죄가 사해졌고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 이루어졌습니다. 내 행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분이 이루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믿어져 버렸습니다. 운동하면서 겪었던 고통들과 지옥 같은 나날들이 한순간에 기쁨의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매우 감사하여 엉엉 울었습니다. 1987년 3월 14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쁨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지금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증탕에도 잘 들어가고 들어갈 때마다 지옥을 연상하며 괴로워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더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교포 2세들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유도 수업을 하고 있고 그를 계기로 도장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물도 좋은, 분위기 있는 산속에 통나무로 된 아름다운 도장을 운영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의 이 현실에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옥처럼 혹독했던 유도부 생활
제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도라는 소금이 많이 나는 섬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1970년 가을에 5남 1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는 항구 도시 목포에서 자랐지요.
5살 어린 시절에 볼거리에 걸려 벙어리가 될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말더듬이 왔고 한참 말할 나이에 말을 못 해 항상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공부보다는 몸으로 하는 운동을 좋아했고 특히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야구하면 제 이름이 불릴 정도로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일 동네 아이들과 산과 바다, 들로 놀러 다니는 것만 좋아해서 공부 안한다고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학교에서는 숙제를 안 해왔다고 기합을 받고 회초리를 맞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제가 공부보다는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일찌감치 저를 운동선수로 키우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감독으로 계시는 중학교에 유도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키신 것입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했기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특기 장학생으로 가려고 3차 테스트까지 합격해 놓은 상태였고 형이 그 중학교의 야구 선수였기에 학교생활도 편하리라는 생각에 야구를 고집했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야구하는 학교로 가면 자식으로 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까지 엄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공부도 잘하고 착실했던 형이 야구부에 들어간 후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은 야구부가 창설되면서 야구부에 들어갔는데, 그 후 선배들의 폭행 및 금품갈취 등으로 과격해졌고 잦은 가출로 비행청소년이 되어 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자식을 둘이나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심한 반대와 엄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도부의 군기는 야구부에 못지않았습니다. 특히 ‘굳히기’ 시간에는 누르기, 조르기, 꺾기 등으로 고문 당하는 듯했고, 상급생의 금품갈취와 구타는 중학생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다른 아이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럽던지 유도부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옥이 어디에 있는 것 같냐?”
“죽으면 가지 않겠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세상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는 것이 지옥이다.”
그 정도로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그 힘든 나날 동안 저도 지방에 시합하러 갈 때 부모님이 주신 여비로 몇 번에 걸쳐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부모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지요.
중학교 1, 2학년 때는 코치가 없어서 선배들에게 유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우는 유도는 기합 받고 힘 기르기, 매 맞고 맷집 키우기 등 선배의 말은 하늘이라는 식의 규율뿐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코치 없는 유도부에서 이제 우리가 하늘이 되려니 했는데, 대낮에 날벼락처럼 굳히기 일인자, 독종으로 소문난 국가 대표 출신의 코치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당한 만큼 후배들을 괴롭히는 것이 전통이고 우리의 한을 푸는 기회인데 공교롭게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어서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코치님이 오신 후 기본기가 제대로 안 된 우리는 하루하루 힘든 지옥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유도로써의 지옥 훈련이었습니다. 코치님의 주특기가 굳히기인지라 매일 누르기, 조르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유도부원 중에 악바리가 없다며 저만을 붙잡고 혹독하게 지도하셨습니다. 저는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르기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잠을 자다가 같이 자던 동생의 목을 잡고 조르기를 하다가 어머님이 “야, 이놈아! 동생 죽겠다.” 하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동생 목을 놓아 준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렵고 견디기 힘든 훈련이었지만 사실은 유도를 몸에 익힌 값진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유도부 생활을 잘 보내고 아버지와 둘째 형이 졸업한 유도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동기들이 12명 정도였는데 고등학교에는 5명의 동기들만이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다시 지옥의 시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승사자 같은 무서운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 2명은 입학 후 유도부를 그만두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중학교 코치님이 고등학교에 코치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 많은 위안을 받았지요. 코치님은 힘들고 혹독하게 운동을 시키셨지만 마음으로 많이 의지했고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유도부에서 견디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의 유도가 기본기 유도라면 고등학교의 유도는 실전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입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몸 관리, 체력 관리, 성적 관리 등등 상당히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예민한 시기에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동기들의 숫자만으로는 유도부 단체가 형성되지 않았기에 다른 운동을 하던 아이들 중에서 힘 좋고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들을 뽑아 함께 운동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지옥에 들어온 것이다.’
유도를 새로 시작하는 동기들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만두라고, 그냥 하던 것을 하든지 공부를 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는데 혹독한 훈련으로 인한 피곤함이 컸습니다. 그리고 전국 대회에서 메달을 따야만 대학에 갈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공부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코치님은 대학을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학교 뒤편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찻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굳히기’ 시간에 조르기를 당해 기절한 적이 있는데, 꿈속에서 내가 석탄을 실은 시커먼 기차 위에 앉아 어두운 터널 속으로 가는 중에 옆의 언덕에서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손짓하며 가지 말라고 하여 기차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깨어나 보니 저는 누워 있고 선배가 제 위에 올라타 정신 차리라며 제 뺨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픈 것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없었지만 기분은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기절하거나 기절 직전까지 자주 몰리기도 했습니다. 기절하는 순간에는 황홀했지만 기절 전까지의 고통은 고문 그 자체였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벗어나와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고 그 충격으로 인해 부모님은 당뇨병을 얻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님이 서울로 가시고 저와 동생만 목포에 남아 친척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였습니다.
저는 종교 생활은 특별하게 하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성스럽게 보이는 천주교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간혹 성당에도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 무렵에 비록 성당에는 가지 못해도 신을 의지하고 신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영성체를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영성체를 받으려면 주말마다 성당에 가서 공부도 해야 하고 외울 것도 많다는데 운동 때문에 그런 자리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공부도 하기 싫고 잘 외우지도 못할 것 같아 천국에는 가고 싶지만 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잘 봐주시겠지 하는 생각에 율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운동부원들과는 달리 후배들과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나쁜 짓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유도부는 단체 생활을 하는지라 선배의 말을 듣고 움직여야 했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같이 해야만 했기에 때론 나쁜 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었고 종교인도 아니면서 착한 척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이모님 댁에 놀러 갔는데 이모님이 성경과 요한계시록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나서 집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성체만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고 착하게만 살면 될 것이라는 제 생각과는 달리 구원받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오는 세상과 영원한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과 구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운동을 할 때마다 잦은 기절로 저승을 왔다갔다하는 저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유도는 체급별 운동인지라, 유도부원은 시합 일주일이나 십일 전에 보통 5kg에서 10kg 정도 살을 뺍니다. 약을 먹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한증탕에 들어가기도 해서 억지로 살을 뺍니다. 한증탕에 들어갈 때는 반 강제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수차례 반복하는데 선배들은 출입문을 잠그고 가두기도 합니다.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다 문을 부수고 나온 뒤 엄청나게 맞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런 한증탕에서도 1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데, 죽지도 않고 영원히 지옥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한증탕에만 들어가면 더 괴로웠고 지옥 생각에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굳히기’를 연습하며 수십 수백 번 기절했다가 깨어날 때마다, 이렇게 기절했다가 깨어나지 않으면 바로 지옥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절망에 빠졌습니다.
점점 더 운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계속 한다고 해도 금메달 따기는 힘들 것 같고 잘해야 운동 코치나 형사, 그도 못하면 험악한 세계에 빠져 살다 지옥이나 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고된 훈련으로 인한 무릎 부상, 가정 문제 등으로 인해 고심 끝에 운동을 접고 서울로 전학을 가기로 했었습니다.
그 무렵 목포에서 전도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생은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해서 참석할 수도 없었고 유도부원 신분으로도 매일 야간 훈련, 합숙 훈련을 하기 때문에 어차피 참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유도부라고 계속 속이며 오전 수업만 받고 유도부원들과 같이 교문을 빠져 나왔고, 유도부원들은 훈련장으로 갈 때 저는 목포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길은 마치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처럼 즐겁고 환한 길이었습니다. 운동을 안 한다는 자체로도 좋았습니다. 비록 유도부라고 속이며 수업을 빼먹은 불량 학생이었지만, 그 많은 학생중 전도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학생은 저 혼자라고 생각하니 그 집회가 저를 위한 것인양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집회장 맨 앞좌석에서 권 목사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전에 비디오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었지만 구원받지 못했던 터라 비디오테이프로만 접했던 권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어 기쁨은 두 배가 되었습니다. 지옥과 죽음을 많이 생각하며 구원받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저는 졸지도 않고 열심히 들었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을 하며 잘 들었기에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지옥에서 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흘리신 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6) 라는 말씀에서 확실히 믿게 되었고, 제가 죄와 영원한 지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성체를 받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피 흘림으로 내 죄가 사해졌고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 이루어졌습니다. 내 행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분이 이루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믿어져 버렸습니다. 운동하면서 겪었던 고통들과 지옥 같은 나날들이 한순간에 기쁨의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매우 감사하여 엉엉 울었습니다. 1987년 3월 14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쁨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지금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증탕에도 잘 들어가고 들어갈 때마다 지옥을 연상하며 괴로워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더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교포 2세들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유도 수업을 하고 있고 그를 계기로 도장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물도 좋은, 분위기 있는 산속에 통나무로 된 아름다운 도장을 운영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의 이 현실에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