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내가 경험한 진정한 구원


캐나다로의 이민은 제 구원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분들은 출생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 구원과의 연결고리를 찾을지 모르지만요. 어쩌면 일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구원으로 가는 발걸음인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요?

 

 

부모님이 캐나다로 이주하면 가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결정했을 때 제 나이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저희 세 남매를 데리고 고국을 떠나 캐나다를 새로운 고국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겪은 삶에의 몸부림은 제게 있어 삶에 대한 학습곡선이 되었습니다.

 


캐나다로 간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제 여동생은 혼자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으로 겪은 죽음과의 대면이었습니다. 저는 여동생이 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 남동생과 저는 종교가 없이 자랐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믿지도, 기독교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상당히 미신적이었고 종종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17살 정도였던 어느 날 어머니는 저를 곁에 두고, 무언가 엄청난 것을 발견하셨다는 것과 저도 그것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에 의해 쓰인 성경이라는 책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게 매우 흥미로웠는데 전에는 어머니가 그런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사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경건한’ 사람들을 조롱하곤 하셨습니다.

 


그 전까지 부모님의 삶은 상당히 소란스러운 동시에 피상적이었기 때문에 저는 어머니가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을 들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일하고 먹고 마시고 다시 일했습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생활이었습니다. 또한 항상 말다툼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고민을 잊어버리기 위해 매일 밤 술을 마셨고 항상 싸웠는데, 제 생각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그 싸움이 너무 심해져서 저는 침대에 누워 울면서 어떤 신이든지 존재한다면 제발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다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평화를 가져다주시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겠노라고 하나님께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말을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분명 전도집회에 갔다 오셨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 선생님이라는 분이 뉴욕에서 전도하는 분을 초청하여 사람들을 모아 집에서 전도집회를 열었고 거기에 참석하신 부모님은 구원받으셨고 이 교제와 연결되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서로 의논을 하며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성경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새겨들었습니다. 무엇이 부모님을 이렇게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까요? 어머니는 아담과 이브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였습니다. 이런 개념은 제게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이것은 너는 죄인이니 지옥에 간다고 사람들을 겁주는 종교적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나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많은 질문을 했는데 어머니는 본인이 모두 답변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발견한 것을 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 교제 가운데 영어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영어를 주 언어로 만들기 위해 시간을 보낸 결과 저는 모국어를 잊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70년대 초반에는 모국어를 지킬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따라서 교사들이나 사회 사업가들은 저희에게 영어로만 말하고 한국어는 잊어버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어떻게 찾았는지 복음을 아는 듯한 캐나다의 작은 침례교회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몇 번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제게 와서 구원에 관해 자기 아내와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저희는 저녁에 교회의 작은 방에 들어갔는데 목사님의 아내 되시는 분은 성경에 있는 몇 구절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제 생각에는, 어머니께서 전에 아담의 죄에 관해 제게 들려주셨던 것 때문에 이 구절들이 제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미친듯이 울기 시작했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구절들을 보여 주셨지만, 그 당시엔 제게 아무 구절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분은 제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어리석은 짓이었겠지요.

 

 

그래서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에 감사 드리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다시 울었습니다.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이 죄송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구원받고 싶다고 했는데, 그분은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므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몰랐고 혼란스러웠으나 그 말을 기꺼이 믿었습니다. 어쨌든 목사의 사모님이었으니까요.

 


그 날부터 저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도할 것이라고는 제 죄에 대해 죄송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기도를 하는 동안 울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제 자신이 낮고 무력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원기왕성하고 발랄한 십대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제 안에 있는 죄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설교 중에 저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영적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예수님과 그 죽음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이때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이사야의 한 구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 59:1-2) 목사님은 어떻게 제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저를 멀어지게 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사야의 다른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그리고 목사님이 모든 사람에게 다 외우라고 하셨던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 3:16) 이제야 이해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어깨에 지고 있던 큰 짐을 벗은 느낌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수치와 슬픔의 눈물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처음으로 울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대신 놀라운 기쁨이 마음을 채웠습니다. 이것이 제 행복의 시작이었습니다.

 


몇 달 후 권 목사님이 이끄는 토론토 수양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으로 전도집회에 참석해 말씀을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강연은 한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설교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이 집회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설교들은 며칠간 계속 되었고 영어 통역이 없었기에 듣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수양회 후반부에 권 목사님은 그림으로 죄사함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그것을 보니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권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 빚을 졌는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그로서는 갚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예로 들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친절한 사람이 그 돈을 갚아 주어서 빚을 졌던 사람은 완전히 탕감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빚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이었습니다. 죄나 빚진 것 없이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마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에야 이곳 교회가 바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견뎌야 하는 많은 난관-중요한 교제를 가지기 힘들게 하는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있을지라도 진정한 복음을 아는 교회에 몸을 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저는 언어 장벽 때문에 캐나다 교회에서 가질 수 없었던 교제가 가능할 수 있도록 다시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그들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던 목사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 교제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날을 제가 구원받은 날로 여겼을 것입니다. 모임이 아니었다면 제 부모님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구원받아 교제 가운데 있은 지 거의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고 여러 이유로 교제 가운데서 멀어진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또 이 모임이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누가 제게 아직도 이 교제 가운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저는 진정으로 이 복음이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믿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 진실한 복음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싸우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은 제게 특별히 중요합니다. 이 선한 싸움은 우리가 하나로 뭉칠 때에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