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51년에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땅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어머니인 진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들, 고모들까지 모여 대가족으로 살았습니다. 작은 고모는 시골 교회에 다니셨는데, 할머니께서는 교회당이 아니라 연애당이라며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셨기에 고모는 교회를 몰래 다니셨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때 고모를 따라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알려 줄 것도 같아서 교회에 무척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반대 때문에 교회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란 후 자유로워지면 꼭 교회에 다니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나 교회와는 상관없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진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앞집, 뒷집의 어른들이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은 울부짖었습니다. 상여를 들고 무덤으로 향할 때 들리는 노랫소리는 너무 슬펐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죽음. 그 죽음들을 보며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무서웠습니다. 많이 슬펐고 두려웠습니다. 죽으면 가족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게는 의문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왜 죽을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말도 못하는 나무와 풀들도 겨울엔 죽은 것 같다가도 봄이 오면 싹이 나고 다시 살아나 오래도록 사는데 왜 사람은 조금밖에 살지 못하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인지. 사람은 생각도 하고 공부도 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왜 짧은 생을 살 수밖에 없고 가족과도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이 길이 아닌 무언가 옆에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연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18살, 19살이 되었을 즈음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서 기술을 배웠고 몇 년이 흐른 뒤에는 기술자가 되어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고 그저 교회 가는 사람이 부럽고 좋아 보여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회에 다니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곳에서 무언가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연세가 많은 분이셨는데 성경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가 다니는 교회는 신약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 교회들과는 무언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이런 성경 구절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교회에 가면 계속 죄 용서를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들도, 목사님도 매번 기도할 때마다 죄 용서를 해달라는 기도를 하곤 했는데, 저로서는 그것이 이상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도 계속 죄 용서를 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녀야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다른 사람들은 성경 말씀대로 되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또 찬송가 가사도 내 마음과 맞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내가 죄인인 것도 알게 되었는데, 찬송가들의 대부분이 죄 용서함을 받아 기쁨을 표현하는 찬송가들이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하며 성경 말씀대로 죄 용서함을 받아 기쁨을 표현하는 찬송가들이 많은데, 저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찬송가와 똑같은 기쁜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데 저는 그것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찬송가를 할 때는 그런 찬송가를 하면서도 돌아서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무언가 맞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봇대에 붙여진 부흥회 포스터만 보면 찾아가 보았지만 갈증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싶었고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회에서는 소리치고 울며 기도하는 등 시끄럽기만 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대해 공부한다는 집회에 가 보기도 했지만 엉뚱한 소리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혼자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고 많은 부흥집회에도 가 보았지만 참된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언가 있을 것처럼 큰 소리 치는 것을 듣고는 들어가 내 영혼을 다해 찾으려 하다 보면, 항상 흐지부지한 이야기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힘이 좍 빠져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일하는 곳에 새로운 사람들이 몇 명 입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든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서로 변론도 해 보았는데 저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로 인해 제 마음에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그들과 함께 다녀오더니 하룻밤 사이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구원은 오래 믿고 하나님 앞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구원받았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신경 쓰이던 중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위해 심방을 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없어진다는데요?”
목사님은,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었던 목사님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이 참석한다는 금요 집회에 가 보았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찾던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고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그 자리에 일어서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습니다.
평소 설교를 통해 조금 알게 되었던 그대로의 교회가 없을까, 맨날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정확한 말씀을 들으니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이곳에서는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이 찾아 들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것이 구원인가 하며 평소에 가졌던 의문이 풀려 참 좋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신약 성경을 단숨에 모두 읽었습니다. 이제 성경이 제대로 읽히는 것 같았고 평소 갖고 있던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무척 기뻤지만 나를 그곳에 인도한 그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매’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직장 문제로 인해 한동안 그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저는 언젠가 꼭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닐 교회는 그곳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 1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와 모임에 참석했지만 왠지 모르게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내려놓자 그제야 내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의 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척 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늘에 계신데 나는 이 땅 위에서 죄만 짓고 사는 사람이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하나님 곁에 갈 수 있을지. 도저히 저는 하나님 곁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도 두드리면 열리리라 했는데, 나는 이렇게 두드리고 있는데 왜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혼자 울며 밤을 샜습니다.
이튿날 교회에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말씀을 듣고 있는데, 상담하시던 분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읽는 순간 그 말씀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며, 말씀 자체가 하나님으로 보였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 1장 23장을 읽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꼭 하나님께서 제게 야단을 치는 말씀 같았습니다. 내 너를 위해 피 흘려 죽었는데, 이미 다 해 놓았는데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야단치심에 그 사실을 그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놓으신 것이 썩어질 씨, 없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는 말씀. 그 씨 자체가 없어질 씨가 아니라는 말씀.
누군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어져 상담해 주신 분께 나는 이제 되었다고 하고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엄청난 사실을 제게 알려 주시려고 제 길을 인도하신 것 같아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1976년에 구원받고 30여 년 이상을 교제 가운데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이 말씀대로 살기를, 주님이 함께하시는 교제 안에서 언제나 함께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1951년에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땅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어머니인 진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들, 고모들까지 모여 대가족으로 살았습니다. 작은 고모는 시골 교회에 다니셨는데, 할머니께서는 교회당이 아니라 연애당이라며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셨기에 고모는 교회를 몰래 다니셨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때 고모를 따라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알려 줄 것도 같아서 교회에 무척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반대 때문에 교회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란 후 자유로워지면 꼭 교회에 다니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나 교회와는 상관없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진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앞집, 뒷집의 어른들이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은 울부짖었습니다. 상여를 들고 무덤으로 향할 때 들리는 노랫소리는 너무 슬펐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죽음. 그 죽음들을 보며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무서웠습니다. 많이 슬펐고 두려웠습니다. 죽으면 가족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게는 의문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왜 죽을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말도 못하는 나무와 풀들도 겨울엔 죽은 것 같다가도 봄이 오면 싹이 나고 다시 살아나 오래도록 사는데 왜 사람은 조금밖에 살지 못하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인지. 사람은 생각도 하고 공부도 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왜 짧은 생을 살 수밖에 없고 가족과도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이 길이 아닌 무언가 옆에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연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18살, 19살이 되었을 즈음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서 기술을 배웠고 몇 년이 흐른 뒤에는 기술자가 되어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고 그저 교회 가는 사람이 부럽고 좋아 보여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회에 다니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곳에서 무언가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연세가 많은 분이셨는데 성경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가 다니는 교회는 신약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 교회들과는 무언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이런 성경 구절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교회에 가면 계속 죄 용서를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들도, 목사님도 매번 기도할 때마다 죄 용서를 해달라는 기도를 하곤 했는데, 저로서는 그것이 이상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도 계속 죄 용서를 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녀야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다른 사람들은 성경 말씀대로 되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또 찬송가 가사도 내 마음과 맞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내가 죄인인 것도 알게 되었는데, 찬송가들의 대부분이 죄 용서함을 받아 기쁨을 표현하는 찬송가들이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하며 성경 말씀대로 죄 용서함을 받아 기쁨을 표현하는 찬송가들이 많은데, 저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찬송가와 똑같은 기쁜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데 저는 그것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찬송가를 할 때는 그런 찬송가를 하면서도 돌아서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무언가 맞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봇대에 붙여진 부흥회 포스터만 보면 찾아가 보았지만 갈증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싶었고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회에서는 소리치고 울며 기도하는 등 시끄럽기만 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대해 공부한다는 집회에 가 보기도 했지만 엉뚱한 소리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혼자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고 많은 부흥집회에도 가 보았지만 참된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언가 있을 것처럼 큰 소리 치는 것을 듣고는 들어가 내 영혼을 다해 찾으려 하다 보면, 항상 흐지부지한 이야기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힘이 좍 빠져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일하는 곳에 새로운 사람들이 몇 명 입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든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서로 변론도 해 보았는데 저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로 인해 제 마음에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그들과 함께 다녀오더니 하룻밤 사이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구원은 오래 믿고 하나님 앞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구원받았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신경 쓰이던 중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위해 심방을 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없어진다는데요?”
목사님은,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었던 목사님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이 참석한다는 금요 집회에 가 보았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찾던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고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그 자리에 일어서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습니다.
평소 설교를 통해 조금 알게 되었던 그대로의 교회가 없을까, 맨날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정확한 말씀을 들으니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이곳에서는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이 찾아 들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것이 구원인가 하며 평소에 가졌던 의문이 풀려 참 좋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신약 성경을 단숨에 모두 읽었습니다. 이제 성경이 제대로 읽히는 것 같았고 평소 갖고 있던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무척 기뻤지만 나를 그곳에 인도한 그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매’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직장 문제로 인해 한동안 그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저는 언젠가 꼭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닐 교회는 그곳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 1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와 모임에 참석했지만 왠지 모르게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내려놓자 그제야 내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의 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척 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늘에 계신데 나는 이 땅 위에서 죄만 짓고 사는 사람이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하나님 곁에 갈 수 있을지. 도저히 저는 하나님 곁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도 두드리면 열리리라 했는데, 나는 이렇게 두드리고 있는데 왜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혼자 울며 밤을 샜습니다.
이튿날 교회에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말씀을 듣고 있는데, 상담하시던 분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읽는 순간 그 말씀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며, 말씀 자체가 하나님으로 보였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 1장 23장을 읽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꼭 하나님께서 제게 야단을 치는 말씀 같았습니다. 내 너를 위해 피 흘려 죽었는데, 이미 다 해 놓았는데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야단치심에 그 사실을 그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놓으신 것이 썩어질 씨, 없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는 말씀. 그 씨 자체가 없어질 씨가 아니라는 말씀.
누군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어져 상담해 주신 분께 나는 이제 되었다고 하고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엄청난 사실을 제게 알려 주시려고 제 길을 인도하신 것 같아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1976년에 구원받고 30여 년 이상을 교제 가운데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이 말씀대로 살기를, 주님이 함께하시는 교제 안에서 언제나 함께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