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추석이 되기 보름 전,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물어온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로 누나는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이번 추석에 아버지에게 7개월 전에 태어난 내 조카 민서와 함께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내게 아버지는 뭐하고 사시냐고 묻더니, 누나도 이제 가슴 속 응어리를 풀려나보다. 자식을 낳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더니 누나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버지와 계속 연락을 하고 만나서 가끔 밥 한 끼 하던 내가 아버지와 누나 사이의 유일한 연락망이었고,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해드렸다. 이번 추석에는 누나가 직접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13년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보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누나에겐 정말 잊지 못할 명절이 아니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꽤 부유하게 살았고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하신 아버지와 손재주 있으시고 부지런한 어머니, 날 많이 아껴주던 누나가 있어 어느 가정 못지않게 행복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모르는 사이 부모님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누나와 나는 어머님 품에서 자라게 되었고 아버지는 홀로 사시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시고 난 뒤 고물상을 하시며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히 살고 계셨다.
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는 부족한 돈을 쪼개어 내게 용돈을 주려고 애쓰셨으며 함께 교회에 가자는 말을 달고 사셨다. 그때마다 난 거부를 했고 혼자 알아서 교회에 다니겠다며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곤 했다. 명절 때면 아버지가 사시는 월세방에서 며칠을 같이 보내고 어릴 적 추억처럼 목욕탕을 가서 서로 때를 밀어주곤 했다. 이렇게 보내는 명절이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8월 나는, 노량진에서 함께 임용고시 공부를 하던 친한 선배가 광주로 내려간다고 하여 덩달아 같이 내려가게 되었다. 내려가기 한 달 전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10년 된 친구인 계영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친구의 동생 영이와 사촌 재식이의 공부를 틈틈이 봐주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친구의 어머님인 박 자매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친구 어머니는 내게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책을 넌지시 내밀며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셨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은 그 책을 무시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시곤 하셨다. 친구는 내 속사정을 아는지라 언젠가 자기 어머님과 어떤 대화를 했었던가 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용 시험이 끝나면 아버지와 나를 함께 전도집회에 초대할 계획이셨다고 했다.
10월 말 토요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사촌 큰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한다. 아버지 생신이 사흘 전이었는데 그것도 모르냐며 야단을 맞고 부랴부랴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서 아버지께로 내려가려고 차를 타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가 ... 돌아가셨단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공허함과 닻을 잃은 배가 된 듯한 느낌. 평소에 잘 챙겨드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좀 더 예민하지 못했고 무던했던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을 느끼며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제 막 효도를 하려는 누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교회에서 집사로 계셨던 아버지를 위해 같은 교회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생전에 아버지가 얼마나 바르고 멋지게 사셨는지 아버지의 주변 친구 분들께 들을 수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왔다. 갈피를 못 잡고 공부에 집중 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박 자매님과 친구가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아, 이게 아버지의 유언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나는 받아들였고 이틀 후 바로 광주에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찾아 가던 중 평소엔 멀쩡하던 차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한 영혼을 보내지 않기 위한 마귀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교회에 도착하여 상담을 받다가 이런 저런 부분들이 막히자, 나를 상담해 주시던 분이 아무래도 전도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셨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날이 바로 안성에서 전도집회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나는 바로 짐을 싸서 새벽차로 안성으로 향했다.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안성을 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는 구원되었다. 처음에는 십자가 뒤로 내 모든 짐을 스스로 던져야만 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 추한 것들을 감히 예수님께 던질 수 있겠냐며 그 짐을 붙잡고 계속 고달파만 하고 있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38:17)
아, 내가 던지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제야 알았다. “주께서 ... 던지셨나이다” 내가 주님의 계획하심을 믿고 바라만 보면 그 모든 죄는 기억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한심하게도 이미 도말된 죄를 내가 던지려고 했으니 던질 수가 있겠는가.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단지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구원받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것일까. 그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나에게 값진 선물을 주고 가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헛되지 않은 죽음이 씨앗이 되어 이제 하나의 줄기가 자라난 것 같다.
그 후, 평생 교회 한 번 나가지 않던 누나가 조카와 함께 동네 교회를 다닌다며 먼저 나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충고를 해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서기 위해 아직 누나에게 간증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돌을 갓 지난 조카가 있어서 전도집회에 데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책과 편지를 같이 주려고 했으나 준비만 해 놓고 아직도 주질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망설이는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되지 않는다.
몇 달 전 어머니와 하나님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넌지시 “엄마, 하나님 믿어?” 라며 말보따리를 열었고, 그날 나는 어머니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아직은 간증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며, 어머니의 마음속을 알고 싶어 질문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의 신앙생활부터 시작하여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 구원받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한편 누나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다 잠자리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자필로 적어 놓은 노트를 발견했었다. 그 때는 단지 아버지의 채취가 묻어 있는 물건이라서 간직하기 위해 챙겼었는데, 내가 구원받은 후 아버지의 노트를 읽어보니 노트 한 권이 모두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내용은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성경을 읽으시며 노트에 성경 구절을 쓰시고 기도 내용도 써 놓으셨던 것 같다. 전도집회 기간 동안 들었던 낯설지 않은 구절들이 보였다. 구원에 관한 것,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음에 감사하다는 내용, 예수님의 피,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 해결,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이스라엘 이야기, 태양에 관한 여호수아, 열왕기하 이야기 등이 아버지의 노트에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찾고자 노력하셨고 결국은 찾으셨던 것이었다.
오래 전 아버지와 함께 낡은 트럭을 타고 지리산으로 소풍을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버지가 그날의 미소로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것 같다. 청년들의 광주 방문에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를 따라 동참하여 구원받은 제소자를 방문하고, 여러 자매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큰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무리 안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같이 나 하나의 영혼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씨앗이 되어 이 소중한 말씀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리길 원한다. 지난 2월 광주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다시 한번 말씀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 몇 달 사이에 이루어진 다 적지 못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나는 지금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7년 추석이 되기 보름 전,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물어온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로 누나는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이번 추석에 아버지에게 7개월 전에 태어난 내 조카 민서와 함께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내게 아버지는 뭐하고 사시냐고 묻더니, 누나도 이제 가슴 속 응어리를 풀려나보다. 자식을 낳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더니 누나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버지와 계속 연락을 하고 만나서 가끔 밥 한 끼 하던 내가 아버지와 누나 사이의 유일한 연락망이었고,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해드렸다. 이번 추석에는 누나가 직접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13년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보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누나에겐 정말 잊지 못할 명절이 아니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꽤 부유하게 살았고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하신 아버지와 손재주 있으시고 부지런한 어머니, 날 많이 아껴주던 누나가 있어 어느 가정 못지않게 행복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모르는 사이 부모님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누나와 나는 어머님 품에서 자라게 되었고 아버지는 홀로 사시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시고 난 뒤 고물상을 하시며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히 살고 계셨다.
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는 부족한 돈을 쪼개어 내게 용돈을 주려고 애쓰셨으며 함께 교회에 가자는 말을 달고 사셨다. 그때마다 난 거부를 했고 혼자 알아서 교회에 다니겠다며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곤 했다. 명절 때면 아버지가 사시는 월세방에서 며칠을 같이 보내고 어릴 적 추억처럼 목욕탕을 가서 서로 때를 밀어주곤 했다. 이렇게 보내는 명절이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8월 나는, 노량진에서 함께 임용고시 공부를 하던 친한 선배가 광주로 내려간다고 하여 덩달아 같이 내려가게 되었다. 내려가기 한 달 전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10년 된 친구인 계영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친구의 동생 영이와 사촌 재식이의 공부를 틈틈이 봐주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친구의 어머님인 박 자매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친구 어머니는 내게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책을 넌지시 내밀며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셨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은 그 책을 무시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시곤 하셨다. 친구는 내 속사정을 아는지라 언젠가 자기 어머님과 어떤 대화를 했었던가 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용 시험이 끝나면 아버지와 나를 함께 전도집회에 초대할 계획이셨다고 했다.
10월 말 토요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사촌 큰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한다. 아버지 생신이 사흘 전이었는데 그것도 모르냐며 야단을 맞고 부랴부랴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서 아버지께로 내려가려고 차를 타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가 ... 돌아가셨단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공허함과 닻을 잃은 배가 된 듯한 느낌. 평소에 잘 챙겨드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좀 더 예민하지 못했고 무던했던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을 느끼며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제 막 효도를 하려는 누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교회에서 집사로 계셨던 아버지를 위해 같은 교회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생전에 아버지가 얼마나 바르고 멋지게 사셨는지 아버지의 주변 친구 분들께 들을 수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왔다. 갈피를 못 잡고 공부에 집중 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박 자매님과 친구가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아, 이게 아버지의 유언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나는 받아들였고 이틀 후 바로 광주에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찾아 가던 중 평소엔 멀쩡하던 차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한 영혼을 보내지 않기 위한 마귀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교회에 도착하여 상담을 받다가 이런 저런 부분들이 막히자, 나를 상담해 주시던 분이 아무래도 전도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셨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날이 바로 안성에서 전도집회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나는 바로 짐을 싸서 새벽차로 안성으로 향했다.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안성을 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는 구원되었다. 처음에는 십자가 뒤로 내 모든 짐을 스스로 던져야만 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 추한 것들을 감히 예수님께 던질 수 있겠냐며 그 짐을 붙잡고 계속 고달파만 하고 있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38:17)
아, 내가 던지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제야 알았다. “주께서 ... 던지셨나이다” 내가 주님의 계획하심을 믿고 바라만 보면 그 모든 죄는 기억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한심하게도 이미 도말된 죄를 내가 던지려고 했으니 던질 수가 있겠는가.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단지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구원받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것일까. 그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나에게 값진 선물을 주고 가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헛되지 않은 죽음이 씨앗이 되어 이제 하나의 줄기가 자라난 것 같다.
그 후, 평생 교회 한 번 나가지 않던 누나가 조카와 함께 동네 교회를 다닌다며 먼저 나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충고를 해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서기 위해 아직 누나에게 간증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돌을 갓 지난 조카가 있어서 전도집회에 데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책과 편지를 같이 주려고 했으나 준비만 해 놓고 아직도 주질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망설이는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되지 않는다.
몇 달 전 어머니와 하나님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넌지시 “엄마, 하나님 믿어?” 라며 말보따리를 열었고, 그날 나는 어머니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아직은 간증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며, 어머니의 마음속을 알고 싶어 질문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의 신앙생활부터 시작하여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 구원받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한편 누나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다 잠자리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자필로 적어 놓은 노트를 발견했었다. 그 때는 단지 아버지의 채취가 묻어 있는 물건이라서 간직하기 위해 챙겼었는데, 내가 구원받은 후 아버지의 노트를 읽어보니 노트 한 권이 모두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내용은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성경을 읽으시며 노트에 성경 구절을 쓰시고 기도 내용도 써 놓으셨던 것 같다. 전도집회 기간 동안 들었던 낯설지 않은 구절들이 보였다. 구원에 관한 것,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음에 감사하다는 내용, 예수님의 피,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 해결,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이스라엘 이야기, 태양에 관한 여호수아, 열왕기하 이야기 등이 아버지의 노트에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찾고자 노력하셨고 결국은 찾으셨던 것이었다.
오래 전 아버지와 함께 낡은 트럭을 타고 지리산으로 소풍을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버지가 그날의 미소로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것 같다. 청년들의 광주 방문에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를 따라 동참하여 구원받은 제소자를 방문하고, 여러 자매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큰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무리 안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같이 나 하나의 영혼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씨앗이 되어 이 소중한 말씀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리길 원한다. 지난 2월 광주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다시 한번 말씀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 몇 달 사이에 이루어진 다 적지 못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나는 지금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