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내 영혼의 닻


사춘기는 빨리도 왔다. 그렇게 헌신적이신 어머니의 모습이 이제는 덜 세련된, 시골 아낙의 모습으로, 근엄한 아버지의 모습은 쓸데없는 권위주의로 설득력 없는 교훈을 반복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는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넓고 깊은 어두운 심연의 사유 속에 한없이 빠져들었다가 후다닥 현실로 돌아와 학교, 책, 선생님, 동급생, 가족이라는 이리저리 얽힌 짐스런 존재들 속에 소속되어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웃음을 흘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뱉으며, 부유하는 영혼의 극단적인 모습을 내면에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십대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그래, 삶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이렇게 표리부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말이냐? 자기 것이라는 것도 없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남의 장단에 맞추어 그럭저럭 한평생 살아가란 말이냐? 주어진 환경과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 지리적인 위치에서 숙명일 수밖에 없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목적의식도 없이 교과서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섭렵하려 애쓰며, 절대적인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회색의 세계에서 무난하게 살아남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인가? 나는 내면으로 절규하며 고교 시절로 접어들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했다. 어머님, 아버님을 생각해서였다. 일곱 번째로 태어난 자식이 늙어 가시는 분들에게 한숨의 주름을 더 얹어 드리는 것은 가혹한 짓이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만 생각하며 일상의 삶을 팽개쳐 버리기에는 내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아 적당히 살 수만은 없었다. 삶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내 앞에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많은 것도 싫고, 남에게 뒤처지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알랴? 혹 존재하는 삶의 의미를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잡아보고 싶은 희망 사항이었다.

 

우리 집은 유난히 마을에서 넓었다. 언덕배기 뒤뜰에는 늘 과실수와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있었고, 앞뜰에도 아버님이 많은 꽃들을 심어 놓아 늘 꽃이 피어 있었다. 집 바로 뒤 야트막한 뒷동산에는 소나무, 참나무, 감나무, 밤나무, 그리고 봄이 되면 보랏빛 섞인 분홍 꽃이 피는 싸리나무, 진달래도 여기저기 듬성듬성 있었다. 뒷동산 너머에는 호수만 한 저수지가 있어 뒷동산에 올라, 저 아래 호수에서 바람이 불어와 풀잎을 누여 그 모습과 색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감동하곤 했다. 건넌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 한밤중에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신비로워 바람을 사랑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들도 짐스러웠다. 결국은 다 지고 말 것을, 결국은 다 사그라지고 말 것을, 그것들에 마음을 두어 무엇 하겠는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이 무거운 돌덩이를 어찌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들인 것을.
“선생님, 어찌 해야 하나요?” 평소 가깝게 대해 주시던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여쭈어 보았다. “얘,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네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하며 네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면서 지내야지.” 일차원적인 답변에 실망하며 황망히 선생님 댁을 나와 버렸다.

 

어느 날 내 친구 혜경이가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혜경이는 종종 나에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며 가깝게 지내는 같은 반 친구였다. 혜경이와 나는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며 이따금 교회 이야기도 하고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청소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얘, 나 구원받았다. 너 구원이 무엇인지 아니?”
“글쎄. 너 이따 한가할 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혜경이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청소 시간이 끝나고 비어 있는 교실 한 모퉁이로 혜경이를 데리고 갔다.

 

“그래, 너 아까 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니? 구원이 어떻다고?”

 

내가 물었다. 혜경이는 오히려 나에게 반문을 했다.

 

“너는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닐까?”

 

내심 상당히 고상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혜경이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구원의 확신이 왔으며, 이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시원하다며 자유롭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혜경이가 아는 구원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혜경이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듯했다. 혜경이는 저녁에 어떤 대학생 언니가 자기 집으로 녹음테이프를 갖고 와서 들려줄 것이니, 한번 오라고 했다.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이 네다섯 명 와 있었다. 영어교육과에 다닌다는 그 여대생은 녹음기를 갖고 와서 권신찬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려주었다. 1972년도에는 학생이 녹음기를 갖고 있는 자체가 대단히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슨 소린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녹음기 성능도 안 좋고, 테이프 음질도 안 좋았다. 일부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재미도 없고 졸음만 왔다. 재미도 없어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대학생은 간증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것이 내가 구원받은 후에 생긴 변화다. 내 목숨을 위협할 만한 어느 것이 내게 닥쳐도 나는 평안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도대체 이 여자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 무엇일까? 헤어질 시간이 되자, 나는 그 대학생에게 우리 집에 가서 더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다. 기꺼이 함께 와 주었다. 우리 집으로 가서 그 여대생과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나는 형부께서 교감 선생님으로 계시는 감리교 계통의 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는 음악대학과 신학대학을 막 마치고 오신 목사님이 계셔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성경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그 목사님은 음악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음악 시간이 더 재미있었다. 우리에게 알맞은 노래 모음집을 손수 만들어 밝은 가사가 담긴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가르쳐 주셔서, 중학생 시절 내내 많은 노래를 부르며 지냈다. 나는 마음을 온통 시적인 가사가 담긴 노래와 그 선생님께 빼앗기고 있어서 성경 이야기는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냥 살아왔던 삶이라는 존재가 새삼스럽게 나를 서서히 무겁게 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사는지, 우리 모두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내 삶의 무게가 고등학교에 와서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 여대생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밝고 자신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나요?” 그 여대생은 성경을 같이 보자고 했다. 여기저기 많은 부분을 읽어 주었다. 성경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니, 나는 새삼스레 놀랐다. 그녀는 성경 속에 길이 있다고 했다. 삶의 해답이 성경 속에 있다고도 했다. 하긴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고 감히 말한 것이 믿어지면 그렇겠지만. 내심 혼자 냉소적인 생각도 해 보았다. 성경은 목사님이 설교하시기 위해서 보는 책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항상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절대 절명의 과제이며 목사님 이외에는 감히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성경은 목사님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인지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구원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기는 했다. 혜경이의 권유로 무슨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가 보았다. 이삼십 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여럿 계셨다. 고등학생은 별로 없었다. 모두들 열심히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읽고 알아진 것들, 새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들.

 

 

가끔은 서울에서 어떤 사람들이 이곳 공주에 와서 성경 이야기를 하고 가기도 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 여기저기를 찾아가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경을 참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이 구절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근거 없이 자기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성경을 도덕경쯤으로 생각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 같지 않았다. 감정에 북받쳐 우는 일도 없었고 중언부언 소리 내어 시끄럽게 떠들며 길게 기도하는 일도 없었다. 기도도 조용히 했다. 적어도 내 생각에 짜증나는 일들은 하고 있지 않았다. 거듭남, 십자가, 피 흘림, 구약의 예언, 예수의 부활, 성경의 사실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열거하며, 요한 웨슬레 같은 이는 어떻게 거듭났고,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그리고 존 위클리프, 무디 등이 한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예수에 관한 예언이 그가 탄생하기 오래전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이미 수없이 발표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찾아가며 설명하기도 하였다.

 

 

내가 질문을 하면 이들은 성경 여기저기를 찾으며 답해 주기도 하였다. 해를 중천에 머물게 해달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역사의 시간 계산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스크랩한 것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모세의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다 홍해에 수몰당해 죽은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는 누구였는지 등 성경에 관련된 사실적인, 혹은 역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에 의문점들이 남아 있었다. 나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동의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과 그 주변에서 일어난 역사를 기록한 이 구약 성경이 다른 역사책과 무엇이 다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는 분명 아닌 것 같은데 그 분이 내 영혼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고, 내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것인가? 다들 잘도 믿고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은데 내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나도 그것을 갖고 싶어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많이도 읽었다. 색연필로 성경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서 성경 구절들에 다채로운 색들이 입혀졌다.

 

성경을 읽으면서 거울 속에 나의 모습이 비추어지듯 나의 모습들이 하나씩 하나씩 발견되었다. 지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게 살고 싶어하는 내 속에는 온갖 잡동사니만 가득 차 있었다. 고상과 품위 저변에는 위선과 가식이 도사리고 있었고, 연출된 지적인 분위기 아래에는 열등의식으로 점철된 우월의식이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속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그러했다. 그분의 말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그분의 말들이 나를 벗겨내고 부수고 있었다. 인정했다.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선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빈 껍질뿐입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내 조상 아담의 피에 녹아 있던 죄가 제게도 그대로 있는 가망 없는 존재입니다. 비참한 존재입니다. 허무라는 절망이 제 영혼을 가랑잎처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이런 나의 고백이 이어졌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무너졌다. 예수께서 그의 피로 내 죄 값을 치르시고 나를 사셨다.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내게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만유를 지으시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나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 내 삶을 통째로 책임지셨다. 그랬다. 나는 죄에 묻혀버린 죽은 자였다. 내 죄는 예수의 피 흘림이 없으면 청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사랑이 내 영혼을 꽉 채웠다. 내 무엇을 주님께 바치오리까. 그 분의 사랑이 창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니, 인류의 역사가 이 사랑을 위해 존재해 왔고 이 사랑이 이처럼 섬세하게, 이처럼 웅장하게 펼쳐져 왔다니. 무수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전해온 이 큰 사랑에 대하여 나는 할 말을 잊는다. 내 영혼의 닻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나를 표류하지 않게 하셨다. 1973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