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머니는 현재 78세이십니다. 최근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기력이 너무 떨어지셔서 신장에 세균이 침입해 열이 조절되지 못하는 상태라며, 병원에서는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전까지는 혼자서 별 문제 없이 활동하셨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셔서 현재는 요양원에 계십니다. 글은 겨우 읽으실 수 있지만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우셔서 부득이하게 딸인 제가 어머님이 이야기하고 싶으신 간증을 대필하게 되었습니다.
18살 차이의 남편을 만나 대구에 자리 잡고
제 어머니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반운리에서, 절에 열성을 내시는 어머니와 매우 점잖은 성품을 가지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부지런하셔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었던 터라 18세가 되면 무조건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면하려고 서둘러서 혼인을 하게 되셨지요. 그리고 전라북도 정읍이란 곳으로 젊디젊은 신혼시절에 행상을 나섰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있던 중 남편은 낯선 몇 명의 청년들을 따라가더니 그 길로 아예 소식이 끊어져 버렸지요. 어머니는 주막에 묵고 계셨는데 돈도 다 떨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라는, 당시로서는 혹독한 전염병을 앓게 되어 머리도 다 빠지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었답니다.
그러던 중에 경상도 할머니 한 분이 “젊은 사람이 부모 얼굴도 못 보고 머나 먼 객지에서 다 죽게 되었으니 이런 딱한 일이 있나.” 하시면서, 죽을 끓여 가져다주기도 하셔서 차츰 병에서 몸을 추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식이 끊긴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그 상태를 보다 못한 할머니께서 재가를 권유하셨다는군요. 그런데 그날 밤 어머니의 꿈에 새로 만나게 될 남자 분(현재의 제 아버지시지요)이 보이셨다고 합니다. 다음날 소개 받은 사람을 만나 보니 꿈에 본 그 사람이 왔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 만난 남자를 따라 집에 가 보니 얼마나 살림이 가난한지, 밥을 지으려고 솥에 물을 부었더니 쇠로 만든 솥 밑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고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에 시어머니도 두 분이나 계셨습니다. 손이 귀한 때라 아들이 없는 어느 집의 양자로 들어가서 생긴 양시어머니도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식구가 모두 6명인 셈이었지요. 어려운 가계를 꾸린다고, 날마다 바쁜 생활을 하시느라 6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그제야 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18살이나 차이 나십니다. 제가 3살 되던 해쯤에 오빠 되시는 분이 결혼을 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손자며느리를 지나칠 정도로 귀여워하시면서, 그동안 어머니께서 베를 짜고 논밭을 일구어 조금 불어난 재산 분배까지 서두르는 것이 너무 억울하셔서 어린 저를 떼어놓고 서울로 돈을 벌겠다며 가셨답니다. 서울에서는 남의 집 아이한테 젖을 먹여 키워 주는 젖 유모 일을 하셨는데 도저히 제가 마음에 걸려서 얼마쯤 그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고 두부 공장에 취직하셨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갔었지요. 어렴풋한 제 기억 속에도 아버지와 함께 사람들이 북적대며 왔다갔다하는 곳을 지나쳐서 차를 탔던 것 같은 아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부 공장에서 살림할 수 있는 방을 한 칸 주신 것 같습니다. 그곳에 오래 있으면 한 밑천 톡톡히 주시겠다고 사장님이 약속하셨다는데도 외가댁에서 내려오라고 하셔서 서울 생활을 접고 외가댁으로 내려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저를 외가댁에 맡겨 놓고 부모님은 대구로 가셔서 서문시장에서 노점을 하나 얻어 음식 장사를 하시게 되었답니다.
제 아버지는 정읍에 계실 때 민요를 배우셔서 창을 잘 하셨습니다. 정읍에서는 회갑연이나 칠순 같은 큰 잔치에는 창을 잘 하시는 분들을 모셔서 잔치의 흥을 돋우고 끝나면 봉투에 수고비를 넣어서 주셨답니다. 그런데 지인도 하나 없는 타지인 대구에는 아버지의 실력을 알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 아버지는 짐을 옮기는 일도 하시고 솜사탕 장사도 하셨지만 모두 오래 하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친구도 없으시니 그저 술을 드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셨다고나 할까요.
신출내기 무당이 되어
어머니는 제 아래로 여동생 둘을 낳으셨는데 딸만 셋이니 아들 낳기를 소망하시는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월이 되면 절에도 가시고 토정비결도 보시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당을 찾아가 점괘를 보곤 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그렇게 소망하는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아이는 인물도 출중했으며 영특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거닐 때면 길 가던 사람들이 “그 놈 참 잘 생겼구나.” 하며 번쩍 올려 안아주시기도 자주 하셨지요. 이런 아이였으니 제 어머니의 기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 남동생을 아주 예뻐하고 좋아하면서도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 질투심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어머니에게 있어 꿈이요 희망이었던 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에 감기를 앓게 되었는데, 도무지 낫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결핵성 뇌막염’ 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을 앓으며 1년 동안 온갖 좋다 하는 것들은 다 해 보았으나 효험도 없이 아이는 그만 하늘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저는 숨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혼란스러운 중에 또 여동생 두 명을 더 낳으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불교 계통의 종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원불교와 천리교, 대한불교, 진각종, 심인당 등 여러 곳을 다녀 보셨지만 마음에 평안을 얻지는 못하셨지요.
외할머니께서도 “얘야, 죽은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야. 이제 그만 마음 쓰고 잊어 버려라” 하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그 아이의 생각이 숨어 있었나 봅니다. 한번은 온 몸이 좋지 않아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이 “어린 동자가 엄마를 못 잊고 엄마와 살고 싶다고 하네.”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혼을 불러 그 아이의 음성으로 “엄마” 하고 불렀답니다. 어머니께서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그 아이의 음성을 들었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그래서 무당의 말을 듣고 신내림 굿을 하겠다고 결정하시게 되었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읽어 보시면 이 내용을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무당과 제 어머니는 음식을 잔뜩 지고 대구 팔공산에 올라가서 3일 동안 신내림 굿을 하였고 그 결과 어머니도 ‘어린 동자’라는 귀신을 끼고 신출내기 무당이 되셨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간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후 저는 취직을 했습니다. 첫 월급을 탔을 때 아버지를 위해서는 술 한 병을, 어머니를 위해서는 속바지를 사서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제 어머니와 다른 무당들이 모여서 떠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당끼리 친목도모를 하는 듯하더군요. 모르는 것은 서로 가르쳐 주고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으며 아주 재미있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 주셔서 먹고 있는데 어머니는 제게 “내가 마귀냐?”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침묵하면서 약간의 미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고는 즉시 집을 떠나 왔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대구 수성구에 속한 파동이라는 동네에서 거주하시다가 그곳에서 건너 보이는 산 위에 신당을 차리시게 되셨습니다. 이때 저는 신혼 때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제 남편에게 그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도와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일로 어머니와 저는 점점 사이가 나빠져 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저를 좋아하시든지 싫어하시든지 상관하지 않고 명절과 어머니의 생신에는 꼭 찾아뵙고, 어떻게 어머니에게 전도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밤이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한 여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호의호식도 못하고 평생 고생만 하며 살다가 지옥을 가시면, 제 어머니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어머니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옥에서 건져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베갯잇이 젖을 만큼 눈물을 흘렸던 날도 많았답니다. 시간이 날 때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내가 믿는 신은 사업도 잘 되게 하고, 내가 기도하면 죽을 사람도 살게 한다.” 하시며 아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제게 자랑을 늘어놓으셨지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집을 나설 때쯤이면 “엄마는 그러셔도 지옥을 가실 텐데요.” 하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노발대발 화를 내시면서 “나야 지옥을 가든지 말든지! 너나 잘해라!” 하는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했지만, 저는 “가겠습니다.” 하고는 그냥 떠나 버렸습니다.
눈물로 애원했지만
이런 날들이 많이도 지나고 어느 해 청주에서 성경탐구모임을 할 때 저는 어머니를 그곳에 참석케 하려고 묘한 꾀를 짜내게 되었습니다.
제 시댁 친척 중에 일본에 사시는 시고모님이 한 분 계시는데 매우 부자이셔서 돈을 잘 쓰셨지요. 전에도 어머니께 일본에 사시는 시고모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 년에 한 번씩 오셨는데 가끔 저에게도 좋은 선물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께 자랑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머니, 일본에 계시는 시고모님이 오셨는데 이제는 연세도 많으셔서 온 집안에 잔치를 크게 한번 하고 싶으시다면서 어머니도 꼭 그 잔치에 참석하시랍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청주로 가는데 비밀을 지켜야 하니, 그곳까지 편하게 갈 수 있는 전세버스도 못 타고 일반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성경탐구모임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음을 졸이면서도 태연하게 어머니 손을 붙잡고 모임 장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때 마침 머리가 백발이신 한 목사님이 걸어오셨는데 제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어머니가 “저 사람도 너네 집안 사람이냐?” 하셨고 저는 “네” 라고 대답했었지요. 속으로는 얼마나 웃음이 났는지, 참느라고 혼이 났답니다. 어머니는 “사람도 많기도 하다. 웬 사람들이 이리 많노?” 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셨지만 저녁을 드시고 숙소에서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간식을 챙겨 어머니를 모시고 설교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설교를 한 번 듣고는 밖에 나오셔서 “네가 나를 이렇게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는 짓이야. 나는 가야 한다.” 하시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전봇대와 함께 껴안고 “어머니, 한 번만 들어보세요.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하며 눈물로 애원해 보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셨어요. 나는 또 “어머니 가슴에 달린 표가 10만원인데 돈을 생각해서라도 들어보세요.” 하고 매달렸지만 어머니는 끝내 뿌리치고는 가 버리셨답니다. 저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렇게 정신이 없는 중에 성경탐구모임은 끝이 났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셔서는 “야야, 네 언니 따라 갔더니 웬 예수꾼들이 그렇게 많던지. 그런데 그 설법하는 양반이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을 간다고 하더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한 번밖에 안 들었는데 지옥을 들었구나. 헛일은 아니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의 법을 가지고
이런 일이 있은 후 넷째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차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을지 의논을 드렸지만 아무것도 못하게 하셔서 마음만 분주하고 어정쩡한 가운데 결혼이란 행사를 모두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기도하는 중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9 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도 어머니와의 관계를 풀고 싶은데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하고 주님께 간구했지요. 이번에 떠오르는 말씀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같이’ 하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는 구절인지 찾지는 못했지만 이 말씀을 조용히 상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그저 그런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아하! 이 세상의 법을 가지고 어머니께 가면 되겠네? 그러면 할 말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바쁘게 어머니께 달려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하여 개울을 건너서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위를 올라가서 “어머니, 저 왔어요!” 하면서 들어갔는데, 항상 옆에서 떠들어 대던 다른 무당들도 없이 웬일로 어머니 혼자 계셨습니다. 앉자마자 저는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어머니의 딸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래.”
“그러시면 어떻게 동생들이 시집을 가는데 제 도움을 거절하십니까? 어머니가 그러실 수 있어요?”
“네가 바쁘다고 안 그랬냐.”
“아하, 그래요. 참 편하네요. 엄마가 죽어도 나는 바쁘니까 못 간다고 하면 되네요. 어머니! 왜 저를 욕 먹이시는 겁니까? 어머니의 친구 분들이 나를 향해 얼마나 욕을 하고 손가락질하겠어요. 최보살 맏딸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다고 어머니가 어려움에 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는다고 얼마나 욕을 하겠어요. 왜 저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겁니까?”
이런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머니께서는,
“네가 오늘 여기 왜 왔냐? 따지러 왔니? 따지러 왔으면 가거라.”
하는 고함소리가 났습니다. 저도 지지 않고,
“네, 따지러 왔습니다. 제가 세 살, 네 살 먹은 어린애입니까? 아니면 제가 귀머거리입니까? 왜 고함을 치십니까? 조용히 말씀하셔도 잘 들리니까, 고함치지 마세요.”
하고 응수했지요. 그랬더니 어머니도 음성을 낮추시고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곧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기분은 무척 좋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보시기에 저는 예쁜 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머니 생신에 음식을 준비해 갔는데 그 음식들을 그대로 불상 앞에 놓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어머니께 옷이나 사다 드리고 음식은 절대 드리지 않았습니다. 또 어머니 집에 가면 귀신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으라고 내놓으실까 봐 빵이나 음료수 등을 사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온 음식들은 어머니께 권하지도 않고 다 뜯어서 저 혼자 모두 맛을 보고 제 앞에 놓아두고는 천천히 다 먹고, 어머니 음식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으니, 어머니 마음속으로는 제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귀신에게 완전히 실망하신 어머니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씀이 있고 한 달쯤 후에 어머니는 산에서 손님을 바래다주고 올라가시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힘을 믿고 밤이나 낮이나 산꼭대기를 혼자서도 내 집 드나들 듯하셨던 분이 강도를 만난 후로는 기가 팍 꺾이셔서 그 산에서는 무서워 못살겠다고 하시며 셋째 동생이 살고 있는 장성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강도를 만나신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목숨은 살려주셨으니까요.
장성으로 이사를 가서도 무당을 하려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파동에서처럼 많이 찾아 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지 팥죽을 두 솥이나 끓였는데 먹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에는 온 동네에 퍼 주었다고 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이사 가신 집에는 연로하셨지만 학식이 있는 주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설이 지나고 이듬해 봄 5월쯤 되었을 때, 그 집 주인 할머니께서 산에 있는 콩밭에 재거름을 만들어서 뿌리려고 하시다 산불이 나서 그만 불에 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새벽 6시경에 어머니와 둘이서 함께 이야기도 하며 아침식사를 하셨건만 9시에 재가 되어서 어머니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산에서 강도를 만난 사건이나 주인 할머니의 죽음 등은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의 전화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지옥을 보셨으니 힘이 완전히 무너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서 “어머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제가 시간을 내서 뵈러 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했는데 어머니는 울음이 섞여서 겨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구원받으신 후 어머니는 이때가 귀신에게 완전히 실망했던 때였다고 회고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새벽마다 목욕하고 귀신 앞에 육신의 일들이 잘 되기를 기도했는데 남편도 뺏어가고, 산 위에서 조용하게 평안히 살려고 생각했는데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고, 이번에는 산골에 있는 집으로 주인 할머니를 의지하고 살려고 이사를 왔는데 주인 할머니마저 뺏어갔으니 ‘귀신아! 내가 너를 이렇게 섬겨도 너는 내게 실망만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동네 사람들은 주인 할머니와 그새 정이 많이 들었는가 보다 라며 수군수군했다고 합니다.
예수 공부 한번 해 보자
7월 말쯤이면 성경탐구모임이 시작되니 셋째 여동생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라고 설득시킬 겸, 어머니 기색을 살필 겸해서 6월 초쯤에 장성에 찾아갔습니다. 셋째 동생과는 시간만 나면 설득을 계속해서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겠다는 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렇게 동생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에는요...” 하며 성경 한 구절을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는 “아, 그 책에 그런 말씀도 있나?” 하시면 전혀 화도 내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노발대발 화를 내실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셔서 저는 정말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어? 말씀이 들어가네. 곧 구원도 받으실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았습니다. 셋째 동생은 슈퍼마켓을 조그맣게 운영하면서 농사일도 하고 소도 키우기 때문에 좀처럼 집을 비우기가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990년도 성경탐구모임은 서울에 있는 축구 경기장에서 했는데 제 바로 아래 여동생과 셋째 여동생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유년부를 지도하는 교회학교 활동을 했으므로 교사 숙소에 짐을 풀었습니다. 첫날을 보내고 이튿날 오후에 바로 아래 여동생과 함께 심장병 때문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넷째 여동생의 남편 병문안을 갔습니다. 7월 초쯤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머니는 동생네 아기를 봐 준다고 부천에 있는 동생 집에 가 계셨습니다. 제가 갔을 때 마침 퇴원 수속을 해야 해서 제가 다니며 절차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성경탐구모임에 가 보시면 좋을 텐데요.” 하는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그만 화를 내시면서 욕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입을 다물고는 동생과 성경탐구모임장소로 돌아왔지요.
다음날 저는 교회학교 활동으로 야외 견학을 다녀왔는데, 동생들을 찾을 시간이 없어서 혼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없었습니다. 설교 들으러 갔나 보다 생각했는데 설교가 끝나고 늦은 밤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는데 다른 선생님이 “짐이 있나 보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짐이 없지 뭡니까? 부천에 있는 넷째 여동생 집에 전화해 보니 동생들이 모두 거기 있었습니다. 둘째 동생은 남편이 빨리 오라고 했다기에 셋째 여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셋째야, 너 그렇게 그냥 가거라. 그리고 이후로 너와 나는 언니 동생 할 것도 없고 얼굴 볼 일도 없이 모든 관계를 끊자. 내가 너를 이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게 하려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벼르고 별러서 참석하게 했더니,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른 채 가겠다는 너를 동생이라고 할 수 있겠니?”
“언니, 그럼 어떻게 해. 내가 박 서방한테 전화해 볼게.”
“그럼 20분 후에 전화할게.”
하고 일단 끊고는 20분 후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셋째야, 어찌 됐노?”
“언니, 박 서방이 처형이 그렇게 화가 났으면 끝까지 다 보고 오라고 했어.”
“그럼 언제 올래?”
“내일 아침에 갈게.”
다음 날 아침을 먹고는 숙소에서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시쯤 셋째 동생이 들어왔는데 “언니! 엄마가 밖에 와 계셔.” 하는 것입니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손에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가슴에는 둘째 여동생의 명찰을 달고 서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오셨어요! 들어가십시다.”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와서는 앉자마자,
“어머니, 제가 어머니께 예수 믿으라고 하면 제가 나쁜 사람이지요. 어머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국어, 산수, 자연, 음악 등 여러 가지 공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 동안 부처 공부만 하셨으니까 이번에는 예수 공부를 해 보시라는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픽 웃으시며 “그래, 좋다. 예수 공부 한번 해 보자.” 하셨지요. 그 길로 곧 나가서 편하게 입으실 옷을 한 벌 사 드리고 돗자리를 들고는 설교 장소에 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설교를 들으면서도, 제 마음은 노심초사인 상태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아무 일 없이 이 영혼이 이 말씀을 듣게 해 주세요.”
혹시라도 고함지르고 뛰쳐나가시지나 않을지 하는 마음으로 애를 태우며 앉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저녁 설교가 끝나고 어머니는 “얘야, 설법하는 저 양반이 도사 박사네. 어찌 저렇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하노.” 그러시기도 하고 “뱀이 사단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아” 하기도 하셨습니다. 다음날 저녁 설교가 끝났을 때는 “저 양반이 오늘, 사람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는데 생명이 정말로 사람 안에 들어 있거든.” 하시면서 들으시는 동안 집회는 끝이 났습니다. 제 어머니는 무당이라고 했더니 아무도 개인 상담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동생과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다시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배웅할 때 “어머니, 돌아가시면 좀 쉬시다가 이 달 말쯤에 대구에 오세요. 그때 다시 조용히 들어 보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커다란 돌멩이에 꽁꽁 싸서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지
그리고 8월 말쯤에 어머니와 셋째 동생, 그리고 조카가 함께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식사 준비를 하느라고 쌀을 씻는 저에게 어머니가 오셔서는, “야야, 내가 아무래도 너네 성경탐구모임 하는 데 가서 구원받았지 싶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신데요?” 하고 여쭈었지요.
“그 양반이 자꾸 죄를 생각해 보라고 하기에 내 죄가 뭔지 생각했는데 오래 전의 일이지만 네가 태어난 후에 내 첫 번째 본 남편이 나를 찾아와 나를 붙잡고 울던 일이 생각나서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었구나 싶어서 내가 통곡하고 울었다.”
“어머니, 죄만 아시면 안 되고 또 한 가지가 남아 있어요. 내일부터 어머니께서 한번 더 들어 보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아! 또 아직도 한 개가 남아 있다고? 그러면 들어 봐야지.” 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어머니를 뵈려고 먼 곳에 있는 동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떠들썩한 밤이 지나고 아침을 먹은 후 어머니는 동생들을 모두 앉혀 놓으시고는,
“얘들아, 나는 너희 언니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줄 알았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넓은 운동장에 꽉 차도록 앉아 있어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신사적이더라. 그 설법하는 양반도 고함지르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둘이서 이야기하듯이 ‘네 생각은 그렇나? 내 생각은 이런데..’ 하면서 말을 주고받듯이 얼마나 점잖게 말씀을 하시는지 놀랬다. 내가 너희 오빠를 따라서 할렐루야라는 곳에 갔는데 그 곳에서는 어떤 여자가 사람을 앉혀 놓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며 가슴을 긁으니까 그 사람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사람들은 손을 올리고 하나님과 할렐루야를 부르는데, 내가 보니 귀신이 그 앞에 왔다갔다 하더라. 진리는 떠드는 데 있지 않고 조용한 데 있다. 너희들도 집으로 가서 너희 언니 다니는 교회를 알아보고 다니도록 해라.” 하셨습니다.
마침 함께 온 조카가 시간이 있어 금요일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말씀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무실 때 귀신들이 와서는 들으러 가면 죽인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 하나님은 신중의 신인데 귀신들은 하나님 앞에선 꼼짝 못해요. 어머니도 귀신들을 야단치세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귀신이 나타나면 용기를 내서 ‘내가 너희들 많이 섬겨 줬잖아. 그래도 너희가 나에게 주는 것도 없으니까 이젠 고만 할란다. 나는 늙고 힘도 없으니 젊은 것들 찾아가거라!’ 하시면서 호통을 치셨다네요.
어느 날 말씀을 듣고 오셔서는 “오늘은 목사님이 귀신들이 부대로 있다고 그러셨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다. 한 집을 지키는 귀신들이 대장부터 졸개까지 많이 있어서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려면 좀처럼 가지 않고 애를 먹이다가 새벽쯤에 호되게 징으로 매를 때리면 대장이 돌아서서 ‘갈게, 갈게’ 하고 떠나가면 그때서야 졸개까지 간단다. 그래서 굿은 힘들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군대라는 귀신 들린 자에 관한 말씀을 들으셨나 봅니다.
어느새 금요일까지 말씀 테이프를 보셨고 조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토요일에는 제가 동행했습니다. 이 날의 말씀은 죄를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림을 그리시며 “땅에 있는 사람이 우상에 절했으면 그 죄가 바로 하나님 앞에 쌓입니다.” 하셨고 어머니는 “큰일 났네. 나는 먹고 살려고 날마다 절했는데, 그것을 다 죄라고 하는데 이 일을 어찌 하노.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 주셔야 할 텐데.”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어머니, 하나님은 찾아오는 자를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어머니의 마음을 보실 테니까 받아 주실 거예요.” 저는 그렇게 위로했지요.
다음날 복음에 관한 설교를 들으시는데 어머니는 화를 내시며 “여태까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더니 오늘 하는 말은 하나도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라는 양반이 이천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데, 우리 부모님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증조부도 고조부도 나시기 전에, 오래 전에 해 놓은 일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어찌 효력이 있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 시간은 사람이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 시간을 느끼지 않으셔요.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 보셔요. 다 들으시면 상담하실 분과 만나게 되실 테니 그분께 의심나는 것을 여쭤보세요.” 하며 달래어서 겨우 끝까지 다 보고 저는 집회 장소로 오고 어머니는 상담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다 끝났는데도 아직 어머니의 상담은 끝나지 않았고 저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형제님이 내려오시더니 저보고 어머니께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급히 찾아가 보니 어머니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저를 보시고는 “이제 내가 다 알았다. 그 뜻을 다 알았다!”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엄마 찾았으니 진짜 우리 엄마 됐네.” 하면서 포옹을 했지요. 내려오셔서 여러 헝제자매들과 말씀을 나누고 밖으로 나오셔서 풀장 있는 곳에서 저를 보시더니 “네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매달렸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노.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문에 날 일이다.”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 우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저 멍하니 죄 문제에 대해서는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며칠 후에 자매님들이 제 집에 모여와서 어머니의 간증을 듣고 싶다 했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시니 자꾸 핵심 없는 내용만 하시니까 어떤 자매님이 “할머니 죄는 어떻게 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죄는 커다란 돌멩이에 꽁꽁 묶어서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지. 죄는 보물이 아니니까 끌어안고 있으면 안 되지.” 하셔서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때가 1990년 9월 초경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무당 생활을 하신 지 20년이 되는 해였고 연세는 61세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추석이 돌아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장성으로 가서 어머니가 섬기던 신당을 부수어서 모두 없애 버렸는데 징이나 꽹과리 등은 악기니까 혹시 쓰일까 싶어서 동생 집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 어머니의 20여 년 동안의 무당 생활은 막을 내리고 주님을 섬기며 사는 새 빛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찬송가 397장을 힘차게 부르고 싶은데, 함께 불러주시겠어요?
이제 새벽마다 성경과 찬송가를 보시는 어머니
제 어머니는 많은 분들께 인정받는 무당이셨습니다. 어머니께 점괘를 보려고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귀신이 먼저 알려 준답니다. “저 밑에 어떤 사람이 올라오고 있는데 그 사람의 조상은 물에 빠져 죽었고 그 사람은 지금 아들이 아파서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알려 주면, 어머니는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있노라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께서 “아들이 아파서 왔나?” 하시면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엎드려서 “우리 아들 좀 살려 주세요.” 했다고, 어머니께서는 구원받으신 후에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점괘를 잘 본다고 소문이 나서 그 산 위까지 어머니를 모시러 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셨지요. 신당은 큰 불상이 3개 있었고 절에서 보는 그림 같은 것들로 벽을 꾸몄으며 또 밖에는 사천왕이라 해서 칼을 높이 쳐든 우상이 서 있었으며 어린아이의 한복도 걸어 놓았대요.
어머니가 구원받은 후 신당에 있던 그 불상을 망치로 부수었는데 그 불상의 엉덩이 안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두 개 나왔어요.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뜯어보니 금과 은 조각 같은 것이 한 주머니에 있었고, 또 다른 주머니에는 쌀, 보리, 콩, 같은 곡식들이 들어 있었어요. 아마 불상에게 절하고 섬기면 금, 은, 보석 곧 돈을 상징하는 물질을 많이 주고 따라서 곡식도 많이 주십시오, 하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픽 웃었답니다.
구원받으신 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성경 말씀과 찬송가를 보신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믿는 길이 정말 어려운 길이다. 부처 앞에는 절만 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라 정말 어렵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희 집에 어머니가 잠시 계시던 어느 날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하면서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찬송가 330장을 펴 놓으시고는 “여기 좀 봐라. 이 찬송가 가사가 나하고 똑같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노.” 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 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330장)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9)
하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어머니께 보여 주신 것 같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현재 78세이십니다. 최근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기력이 너무 떨어지셔서 신장에 세균이 침입해 열이 조절되지 못하는 상태라며, 병원에서는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전까지는 혼자서 별 문제 없이 활동하셨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셔서 현재는 요양원에 계십니다. 글은 겨우 읽으실 수 있지만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우셔서 부득이하게 딸인 제가 어머님이 이야기하고 싶으신 간증을 대필하게 되었습니다.
18살 차이의 남편을 만나 대구에 자리 잡고
제 어머니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반운리에서, 절에 열성을 내시는 어머니와 매우 점잖은 성품을 가지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부지런하셔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었던 터라 18세가 되면 무조건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면하려고 서둘러서 혼인을 하게 되셨지요. 그리고 전라북도 정읍이란 곳으로 젊디젊은 신혼시절에 행상을 나섰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있던 중 남편은 낯선 몇 명의 청년들을 따라가더니 그 길로 아예 소식이 끊어져 버렸지요. 어머니는 주막에 묵고 계셨는데 돈도 다 떨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라는, 당시로서는 혹독한 전염병을 앓게 되어 머리도 다 빠지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었답니다.
그러던 중에 경상도 할머니 한 분이 “젊은 사람이 부모 얼굴도 못 보고 머나 먼 객지에서 다 죽게 되었으니 이런 딱한 일이 있나.” 하시면서, 죽을 끓여 가져다주기도 하셔서 차츰 병에서 몸을 추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식이 끊긴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그 상태를 보다 못한 할머니께서 재가를 권유하셨다는군요. 그런데 그날 밤 어머니의 꿈에 새로 만나게 될 남자 분(현재의 제 아버지시지요)이 보이셨다고 합니다. 다음날 소개 받은 사람을 만나 보니 꿈에 본 그 사람이 왔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 만난 남자를 따라 집에 가 보니 얼마나 살림이 가난한지, 밥을 지으려고 솥에 물을 부었더니 쇠로 만든 솥 밑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고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에 시어머니도 두 분이나 계셨습니다. 손이 귀한 때라 아들이 없는 어느 집의 양자로 들어가서 생긴 양시어머니도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식구가 모두 6명인 셈이었지요. 어려운 가계를 꾸린다고, 날마다 바쁜 생활을 하시느라 6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그제야 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18살이나 차이 나십니다. 제가 3살 되던 해쯤에 오빠 되시는 분이 결혼을 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손자며느리를 지나칠 정도로 귀여워하시면서, 그동안 어머니께서 베를 짜고 논밭을 일구어 조금 불어난 재산 분배까지 서두르는 것이 너무 억울하셔서 어린 저를 떼어놓고 서울로 돈을 벌겠다며 가셨답니다. 서울에서는 남의 집 아이한테 젖을 먹여 키워 주는 젖 유모 일을 하셨는데 도저히 제가 마음에 걸려서 얼마쯤 그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고 두부 공장에 취직하셨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갔었지요. 어렴풋한 제 기억 속에도 아버지와 함께 사람들이 북적대며 왔다갔다하는 곳을 지나쳐서 차를 탔던 것 같은 아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부 공장에서 살림할 수 있는 방을 한 칸 주신 것 같습니다. 그곳에 오래 있으면 한 밑천 톡톡히 주시겠다고 사장님이 약속하셨다는데도 외가댁에서 내려오라고 하셔서 서울 생활을 접고 외가댁으로 내려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저를 외가댁에 맡겨 놓고 부모님은 대구로 가셔서 서문시장에서 노점을 하나 얻어 음식 장사를 하시게 되었답니다.
제 아버지는 정읍에 계실 때 민요를 배우셔서 창을 잘 하셨습니다. 정읍에서는 회갑연이나 칠순 같은 큰 잔치에는 창을 잘 하시는 분들을 모셔서 잔치의 흥을 돋우고 끝나면 봉투에 수고비를 넣어서 주셨답니다. 그런데 지인도 하나 없는 타지인 대구에는 아버지의 실력을 알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 아버지는 짐을 옮기는 일도 하시고 솜사탕 장사도 하셨지만 모두 오래 하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친구도 없으시니 그저 술을 드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셨다고나 할까요.
신출내기 무당이 되어
어머니는 제 아래로 여동생 둘을 낳으셨는데 딸만 셋이니 아들 낳기를 소망하시는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월이 되면 절에도 가시고 토정비결도 보시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당을 찾아가 점괘를 보곤 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그렇게 소망하는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아이는 인물도 출중했으며 영특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거닐 때면 길 가던 사람들이 “그 놈 참 잘 생겼구나.” 하며 번쩍 올려 안아주시기도 자주 하셨지요. 이런 아이였으니 제 어머니의 기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 남동생을 아주 예뻐하고 좋아하면서도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 질투심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어머니에게 있어 꿈이요 희망이었던 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에 감기를 앓게 되었는데, 도무지 낫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결핵성 뇌막염’ 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을 앓으며 1년 동안 온갖 좋다 하는 것들은 다 해 보았으나 효험도 없이 아이는 그만 하늘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저는 숨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혼란스러운 중에 또 여동생 두 명을 더 낳으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불교 계통의 종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원불교와 천리교, 대한불교, 진각종, 심인당 등 여러 곳을 다녀 보셨지만 마음에 평안을 얻지는 못하셨지요.
외할머니께서도 “얘야, 죽은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야. 이제 그만 마음 쓰고 잊어 버려라” 하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그 아이의 생각이 숨어 있었나 봅니다. 한번은 온 몸이 좋지 않아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이 “어린 동자가 엄마를 못 잊고 엄마와 살고 싶다고 하네.”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혼을 불러 그 아이의 음성으로 “엄마” 하고 불렀답니다. 어머니께서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그 아이의 음성을 들었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그래서 무당의 말을 듣고 신내림 굿을 하겠다고 결정하시게 되었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읽어 보시면 이 내용을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무당과 제 어머니는 음식을 잔뜩 지고 대구 팔공산에 올라가서 3일 동안 신내림 굿을 하였고 그 결과 어머니도 ‘어린 동자’라는 귀신을 끼고 신출내기 무당이 되셨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간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후 저는 취직을 했습니다. 첫 월급을 탔을 때 아버지를 위해서는 술 한 병을, 어머니를 위해서는 속바지를 사서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제 어머니와 다른 무당들이 모여서 떠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당끼리 친목도모를 하는 듯하더군요. 모르는 것은 서로 가르쳐 주고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으며 아주 재미있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 주셔서 먹고 있는데 어머니는 제게 “내가 마귀냐?”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침묵하면서 약간의 미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고는 즉시 집을 떠나 왔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대구 수성구에 속한 파동이라는 동네에서 거주하시다가 그곳에서 건너 보이는 산 위에 신당을 차리시게 되셨습니다. 이때 저는 신혼 때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제 남편에게 그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도와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일로 어머니와 저는 점점 사이가 나빠져 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저를 좋아하시든지 싫어하시든지 상관하지 않고 명절과 어머니의 생신에는 꼭 찾아뵙고, 어떻게 어머니에게 전도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밤이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한 여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호의호식도 못하고 평생 고생만 하며 살다가 지옥을 가시면, 제 어머니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어머니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옥에서 건져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베갯잇이 젖을 만큼 눈물을 흘렸던 날도 많았답니다. 시간이 날 때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내가 믿는 신은 사업도 잘 되게 하고, 내가 기도하면 죽을 사람도 살게 한다.” 하시며 아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제게 자랑을 늘어놓으셨지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집을 나설 때쯤이면 “엄마는 그러셔도 지옥을 가실 텐데요.” 하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노발대발 화를 내시면서 “나야 지옥을 가든지 말든지! 너나 잘해라!” 하는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했지만, 저는 “가겠습니다.” 하고는 그냥 떠나 버렸습니다.
눈물로 애원했지만
이런 날들이 많이도 지나고 어느 해 청주에서 성경탐구모임을 할 때 저는 어머니를 그곳에 참석케 하려고 묘한 꾀를 짜내게 되었습니다.
제 시댁 친척 중에 일본에 사시는 시고모님이 한 분 계시는데 매우 부자이셔서 돈을 잘 쓰셨지요. 전에도 어머니께 일본에 사시는 시고모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 년에 한 번씩 오셨는데 가끔 저에게도 좋은 선물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께 자랑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머니, 일본에 계시는 시고모님이 오셨는데 이제는 연세도 많으셔서 온 집안에 잔치를 크게 한번 하고 싶으시다면서 어머니도 꼭 그 잔치에 참석하시랍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청주로 가는데 비밀을 지켜야 하니, 그곳까지 편하게 갈 수 있는 전세버스도 못 타고 일반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성경탐구모임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음을 졸이면서도 태연하게 어머니 손을 붙잡고 모임 장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때 마침 머리가 백발이신 한 목사님이 걸어오셨는데 제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어머니가 “저 사람도 너네 집안 사람이냐?” 하셨고 저는 “네” 라고 대답했었지요. 속으로는 얼마나 웃음이 났는지, 참느라고 혼이 났답니다. 어머니는 “사람도 많기도 하다. 웬 사람들이 이리 많노?” 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셨지만 저녁을 드시고 숙소에서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간식을 챙겨 어머니를 모시고 설교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설교를 한 번 듣고는 밖에 나오셔서 “네가 나를 이렇게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는 짓이야. 나는 가야 한다.” 하시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전봇대와 함께 껴안고 “어머니, 한 번만 들어보세요.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하며 눈물로 애원해 보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셨어요. 나는 또 “어머니 가슴에 달린 표가 10만원인데 돈을 생각해서라도 들어보세요.” 하고 매달렸지만 어머니는 끝내 뿌리치고는 가 버리셨답니다. 저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렇게 정신이 없는 중에 성경탐구모임은 끝이 났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셔서는 “야야, 네 언니 따라 갔더니 웬 예수꾼들이 그렇게 많던지. 그런데 그 설법하는 양반이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을 간다고 하더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한 번밖에 안 들었는데 지옥을 들었구나. 헛일은 아니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의 법을 가지고
이런 일이 있은 후 넷째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차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을지 의논을 드렸지만 아무것도 못하게 하셔서 마음만 분주하고 어정쩡한 가운데 결혼이란 행사를 모두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기도하는 중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9 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도 어머니와의 관계를 풀고 싶은데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하고 주님께 간구했지요. 이번에 떠오르는 말씀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같이’ 하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는 구절인지 찾지는 못했지만 이 말씀을 조용히 상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그저 그런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아하! 이 세상의 법을 가지고 어머니께 가면 되겠네? 그러면 할 말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바쁘게 어머니께 달려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하여 개울을 건너서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위를 올라가서 “어머니, 저 왔어요!” 하면서 들어갔는데, 항상 옆에서 떠들어 대던 다른 무당들도 없이 웬일로 어머니 혼자 계셨습니다. 앉자마자 저는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어머니의 딸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래.”
“그러시면 어떻게 동생들이 시집을 가는데 제 도움을 거절하십니까? 어머니가 그러실 수 있어요?”
“네가 바쁘다고 안 그랬냐.”
“아하, 그래요. 참 편하네요. 엄마가 죽어도 나는 바쁘니까 못 간다고 하면 되네요. 어머니! 왜 저를 욕 먹이시는 겁니까? 어머니의 친구 분들이 나를 향해 얼마나 욕을 하고 손가락질하겠어요. 최보살 맏딸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다고 어머니가 어려움에 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는다고 얼마나 욕을 하겠어요. 왜 저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겁니까?”
이런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머니께서는,
“네가 오늘 여기 왜 왔냐? 따지러 왔니? 따지러 왔으면 가거라.”
하는 고함소리가 났습니다. 저도 지지 않고,
“네, 따지러 왔습니다. 제가 세 살, 네 살 먹은 어린애입니까? 아니면 제가 귀머거리입니까? 왜 고함을 치십니까? 조용히 말씀하셔도 잘 들리니까, 고함치지 마세요.”
하고 응수했지요. 그랬더니 어머니도 음성을 낮추시고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곧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기분은 무척 좋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보시기에 저는 예쁜 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머니 생신에 음식을 준비해 갔는데 그 음식들을 그대로 불상 앞에 놓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어머니께 옷이나 사다 드리고 음식은 절대 드리지 않았습니다. 또 어머니 집에 가면 귀신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으라고 내놓으실까 봐 빵이나 음료수 등을 사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온 음식들은 어머니께 권하지도 않고 다 뜯어서 저 혼자 모두 맛을 보고 제 앞에 놓아두고는 천천히 다 먹고, 어머니 음식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으니, 어머니 마음속으로는 제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귀신에게 완전히 실망하신 어머니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씀이 있고 한 달쯤 후에 어머니는 산에서 손님을 바래다주고 올라가시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힘을 믿고 밤이나 낮이나 산꼭대기를 혼자서도 내 집 드나들 듯하셨던 분이 강도를 만난 후로는 기가 팍 꺾이셔서 그 산에서는 무서워 못살겠다고 하시며 셋째 동생이 살고 있는 장성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강도를 만나신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목숨은 살려주셨으니까요.
장성으로 이사를 가서도 무당을 하려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파동에서처럼 많이 찾아 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지 팥죽을 두 솥이나 끓였는데 먹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에는 온 동네에 퍼 주었다고 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이사 가신 집에는 연로하셨지만 학식이 있는 주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설이 지나고 이듬해 봄 5월쯤 되었을 때, 그 집 주인 할머니께서 산에 있는 콩밭에 재거름을 만들어서 뿌리려고 하시다 산불이 나서 그만 불에 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새벽 6시경에 어머니와 둘이서 함께 이야기도 하며 아침식사를 하셨건만 9시에 재가 되어서 어머니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산에서 강도를 만난 사건이나 주인 할머니의 죽음 등은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의 전화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지옥을 보셨으니 힘이 완전히 무너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서 “어머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제가 시간을 내서 뵈러 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했는데 어머니는 울음이 섞여서 겨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구원받으신 후 어머니는 이때가 귀신에게 완전히 실망했던 때였다고 회고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새벽마다 목욕하고 귀신 앞에 육신의 일들이 잘 되기를 기도했는데 남편도 뺏어가고, 산 위에서 조용하게 평안히 살려고 생각했는데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고, 이번에는 산골에 있는 집으로 주인 할머니를 의지하고 살려고 이사를 왔는데 주인 할머니마저 뺏어갔으니 ‘귀신아! 내가 너를 이렇게 섬겨도 너는 내게 실망만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동네 사람들은 주인 할머니와 그새 정이 많이 들었는가 보다 라며 수군수군했다고 합니다.
예수 공부 한번 해 보자
7월 말쯤이면 성경탐구모임이 시작되니 셋째 여동생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라고 설득시킬 겸, 어머니 기색을 살필 겸해서 6월 초쯤에 장성에 찾아갔습니다. 셋째 동생과는 시간만 나면 설득을 계속해서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겠다는 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렇게 동생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에는요...” 하며 성경 한 구절을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는 “아, 그 책에 그런 말씀도 있나?” 하시면 전혀 화도 내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노발대발 화를 내실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셔서 저는 정말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어? 말씀이 들어가네. 곧 구원도 받으실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았습니다. 셋째 동생은 슈퍼마켓을 조그맣게 운영하면서 농사일도 하고 소도 키우기 때문에 좀처럼 집을 비우기가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990년도 성경탐구모임은 서울에 있는 축구 경기장에서 했는데 제 바로 아래 여동생과 셋째 여동생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유년부를 지도하는 교회학교 활동을 했으므로 교사 숙소에 짐을 풀었습니다. 첫날을 보내고 이튿날 오후에 바로 아래 여동생과 함께 심장병 때문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넷째 여동생의 남편 병문안을 갔습니다. 7월 초쯤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머니는 동생네 아기를 봐 준다고 부천에 있는 동생 집에 가 계셨습니다. 제가 갔을 때 마침 퇴원 수속을 해야 해서 제가 다니며 절차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성경탐구모임에 가 보시면 좋을 텐데요.” 하는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그만 화를 내시면서 욕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입을 다물고는 동생과 성경탐구모임장소로 돌아왔지요.
다음날 저는 교회학교 활동으로 야외 견학을 다녀왔는데, 동생들을 찾을 시간이 없어서 혼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없었습니다. 설교 들으러 갔나 보다 생각했는데 설교가 끝나고 늦은 밤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는데 다른 선생님이 “짐이 있나 보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짐이 없지 뭡니까? 부천에 있는 넷째 여동생 집에 전화해 보니 동생들이 모두 거기 있었습니다. 둘째 동생은 남편이 빨리 오라고 했다기에 셋째 여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셋째야, 너 그렇게 그냥 가거라. 그리고 이후로 너와 나는 언니 동생 할 것도 없고 얼굴 볼 일도 없이 모든 관계를 끊자. 내가 너를 이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게 하려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벼르고 별러서 참석하게 했더니,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른 채 가겠다는 너를 동생이라고 할 수 있겠니?”
“언니, 그럼 어떻게 해. 내가 박 서방한테 전화해 볼게.”
“그럼 20분 후에 전화할게.”
하고 일단 끊고는 20분 후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셋째야, 어찌 됐노?”
“언니, 박 서방이 처형이 그렇게 화가 났으면 끝까지 다 보고 오라고 했어.”
“그럼 언제 올래?”
“내일 아침에 갈게.”
다음 날 아침을 먹고는 숙소에서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시쯤 셋째 동생이 들어왔는데 “언니! 엄마가 밖에 와 계셔.” 하는 것입니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손에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가슴에는 둘째 여동생의 명찰을 달고 서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오셨어요! 들어가십시다.”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와서는 앉자마자,
“어머니, 제가 어머니께 예수 믿으라고 하면 제가 나쁜 사람이지요. 어머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국어, 산수, 자연, 음악 등 여러 가지 공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 동안 부처 공부만 하셨으니까 이번에는 예수 공부를 해 보시라는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픽 웃으시며 “그래, 좋다. 예수 공부 한번 해 보자.” 하셨지요. 그 길로 곧 나가서 편하게 입으실 옷을 한 벌 사 드리고 돗자리를 들고는 설교 장소에 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설교를 들으면서도, 제 마음은 노심초사인 상태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아무 일 없이 이 영혼이 이 말씀을 듣게 해 주세요.”
혹시라도 고함지르고 뛰쳐나가시지나 않을지 하는 마음으로 애를 태우며 앉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저녁 설교가 끝나고 어머니는 “얘야, 설법하는 저 양반이 도사 박사네. 어찌 저렇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하노.” 그러시기도 하고 “뱀이 사단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아” 하기도 하셨습니다. 다음날 저녁 설교가 끝났을 때는 “저 양반이 오늘, 사람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는데 생명이 정말로 사람 안에 들어 있거든.” 하시면서 들으시는 동안 집회는 끝이 났습니다. 제 어머니는 무당이라고 했더니 아무도 개인 상담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동생과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다시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배웅할 때 “어머니, 돌아가시면 좀 쉬시다가 이 달 말쯤에 대구에 오세요. 그때 다시 조용히 들어 보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커다란 돌멩이에 꽁꽁 싸서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지
그리고 8월 말쯤에 어머니와 셋째 동생, 그리고 조카가 함께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식사 준비를 하느라고 쌀을 씻는 저에게 어머니가 오셔서는, “야야, 내가 아무래도 너네 성경탐구모임 하는 데 가서 구원받았지 싶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신데요?” 하고 여쭈었지요.
“그 양반이 자꾸 죄를 생각해 보라고 하기에 내 죄가 뭔지 생각했는데 오래 전의 일이지만 네가 태어난 후에 내 첫 번째 본 남편이 나를 찾아와 나를 붙잡고 울던 일이 생각나서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었구나 싶어서 내가 통곡하고 울었다.”
“어머니, 죄만 아시면 안 되고 또 한 가지가 남아 있어요. 내일부터 어머니께서 한번 더 들어 보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아! 또 아직도 한 개가 남아 있다고? 그러면 들어 봐야지.” 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어머니를 뵈려고 먼 곳에 있는 동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떠들썩한 밤이 지나고 아침을 먹은 후 어머니는 동생들을 모두 앉혀 놓으시고는,
“얘들아, 나는 너희 언니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줄 알았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넓은 운동장에 꽉 차도록 앉아 있어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신사적이더라. 그 설법하는 양반도 고함지르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둘이서 이야기하듯이 ‘네 생각은 그렇나? 내 생각은 이런데..’ 하면서 말을 주고받듯이 얼마나 점잖게 말씀을 하시는지 놀랬다. 내가 너희 오빠를 따라서 할렐루야라는 곳에 갔는데 그 곳에서는 어떤 여자가 사람을 앉혀 놓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며 가슴을 긁으니까 그 사람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사람들은 손을 올리고 하나님과 할렐루야를 부르는데, 내가 보니 귀신이 그 앞에 왔다갔다 하더라. 진리는 떠드는 데 있지 않고 조용한 데 있다. 너희들도 집으로 가서 너희 언니 다니는 교회를 알아보고 다니도록 해라.” 하셨습니다.
마침 함께 온 조카가 시간이 있어 금요일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말씀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무실 때 귀신들이 와서는 들으러 가면 죽인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 하나님은 신중의 신인데 귀신들은 하나님 앞에선 꼼짝 못해요. 어머니도 귀신들을 야단치세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귀신이 나타나면 용기를 내서 ‘내가 너희들 많이 섬겨 줬잖아. 그래도 너희가 나에게 주는 것도 없으니까 이젠 고만 할란다. 나는 늙고 힘도 없으니 젊은 것들 찾아가거라!’ 하시면서 호통을 치셨다네요.
어느 날 말씀을 듣고 오셔서는 “오늘은 목사님이 귀신들이 부대로 있다고 그러셨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다. 한 집을 지키는 귀신들이 대장부터 졸개까지 많이 있어서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려면 좀처럼 가지 않고 애를 먹이다가 새벽쯤에 호되게 징으로 매를 때리면 대장이 돌아서서 ‘갈게, 갈게’ 하고 떠나가면 그때서야 졸개까지 간단다. 그래서 굿은 힘들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군대라는 귀신 들린 자에 관한 말씀을 들으셨나 봅니다.
어느새 금요일까지 말씀 테이프를 보셨고 조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토요일에는 제가 동행했습니다. 이 날의 말씀은 죄를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림을 그리시며 “땅에 있는 사람이 우상에 절했으면 그 죄가 바로 하나님 앞에 쌓입니다.” 하셨고 어머니는 “큰일 났네. 나는 먹고 살려고 날마다 절했는데, 그것을 다 죄라고 하는데 이 일을 어찌 하노.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 주셔야 할 텐데.”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어머니, 하나님은 찾아오는 자를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어머니의 마음을 보실 테니까 받아 주실 거예요.” 저는 그렇게 위로했지요.
다음날 복음에 관한 설교를 들으시는데 어머니는 화를 내시며 “여태까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더니 오늘 하는 말은 하나도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라는 양반이 이천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데, 우리 부모님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증조부도 고조부도 나시기 전에, 오래 전에 해 놓은 일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어찌 효력이 있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 시간은 사람이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 시간을 느끼지 않으셔요.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 보셔요. 다 들으시면 상담하실 분과 만나게 되실 테니 그분께 의심나는 것을 여쭤보세요.” 하며 달래어서 겨우 끝까지 다 보고 저는 집회 장소로 오고 어머니는 상담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다 끝났는데도 아직 어머니의 상담은 끝나지 않았고 저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형제님이 내려오시더니 저보고 어머니께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급히 찾아가 보니 어머니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저를 보시고는 “이제 내가 다 알았다. 그 뜻을 다 알았다!”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엄마 찾았으니 진짜 우리 엄마 됐네.” 하면서 포옹을 했지요. 내려오셔서 여러 헝제자매들과 말씀을 나누고 밖으로 나오셔서 풀장 있는 곳에서 저를 보시더니 “네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매달렸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노.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문에 날 일이다.”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 우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저 멍하니 죄 문제에 대해서는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며칠 후에 자매님들이 제 집에 모여와서 어머니의 간증을 듣고 싶다 했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시니 자꾸 핵심 없는 내용만 하시니까 어떤 자매님이 “할머니 죄는 어떻게 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죄는 커다란 돌멩이에 꽁꽁 묶어서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지. 죄는 보물이 아니니까 끌어안고 있으면 안 되지.” 하셔서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때가 1990년 9월 초경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무당 생활을 하신 지 20년이 되는 해였고 연세는 61세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추석이 돌아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장성으로 가서 어머니가 섬기던 신당을 부수어서 모두 없애 버렸는데 징이나 꽹과리 등은 악기니까 혹시 쓰일까 싶어서 동생 집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 어머니의 20여 년 동안의 무당 생활은 막을 내리고 주님을 섬기며 사는 새 빛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찬송가 397장을 힘차게 부르고 싶은데, 함께 불러주시겠어요?
이제 새벽마다 성경과 찬송가를 보시는 어머니
제 어머니는 많은 분들께 인정받는 무당이셨습니다. 어머니께 점괘를 보려고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귀신이 먼저 알려 준답니다. “저 밑에 어떤 사람이 올라오고 있는데 그 사람의 조상은 물에 빠져 죽었고 그 사람은 지금 아들이 아파서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알려 주면, 어머니는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있노라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께서 “아들이 아파서 왔나?” 하시면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엎드려서 “우리 아들 좀 살려 주세요.” 했다고, 어머니께서는 구원받으신 후에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점괘를 잘 본다고 소문이 나서 그 산 위까지 어머니를 모시러 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셨지요. 신당은 큰 불상이 3개 있었고 절에서 보는 그림 같은 것들로 벽을 꾸몄으며 또 밖에는 사천왕이라 해서 칼을 높이 쳐든 우상이 서 있었으며 어린아이의 한복도 걸어 놓았대요.
어머니가 구원받은 후 신당에 있던 그 불상을 망치로 부수었는데 그 불상의 엉덩이 안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두 개 나왔어요.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뜯어보니 금과 은 조각 같은 것이 한 주머니에 있었고, 또 다른 주머니에는 쌀, 보리, 콩, 같은 곡식들이 들어 있었어요. 아마 불상에게 절하고 섬기면 금, 은, 보석 곧 돈을 상징하는 물질을 많이 주고 따라서 곡식도 많이 주십시오, 하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픽 웃었답니다.
구원받으신 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성경 말씀과 찬송가를 보신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믿는 길이 정말 어려운 길이다. 부처 앞에는 절만 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라 정말 어렵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희 집에 어머니가 잠시 계시던 어느 날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하면서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찬송가 330장을 펴 놓으시고는 “여기 좀 봐라. 이 찬송가 가사가 나하고 똑같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노.” 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 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330장)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9)
하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어머니께 보여 주신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