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실력보다는 기회와 운이란 것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 대한 막연한 실망감이 앞섰고 앞으로 주어질 제 삶의 시간들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병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젊은 모델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을 때, 자기의 전문 분야인데 그 병으로 의학교수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돈이 많은 분이 죽음 앞에서 초라해지는 보습을 보았을 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이끌려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실망감을 느꼈고 이런 삶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행한 만큼은 주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무 후에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무엇인가를 꾸준히 배웠고, 운동을 하고, 병원 내에서 하는 봉사 활동 또한 열심히 했습니다. 문득‘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주변을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나 동료가 아무도 없었기에 이런 나의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왠지 이 사람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과 내 고민을 이야기하면 받아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나와 같은 사람도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무언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혼 직후 시댁어른들의 권유로 서울 교회의 전도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간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세상에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계시구나. 분명히 그전에 내가 보던 그 성경책인데 왠지 다른 성경책을 보고 있는 것 같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의아함은 지울 수 있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곳을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동안 마음 한켠에 꾹꾹 누르고 있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이 아이를 두고 죽으면 어떡하나?’ 그 뒤로는 아이에 관련된 책을 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세미나 등에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불투명함이었고,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어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의지할 곳을 찾아서 가까운 교회에 다니려고 했지만 목사님들의 설교 시간은 내게 단순한 도덕 시간에 불과했고, 불규칙한 근무 시간과 남편의 무언의 비협조로 이마저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친정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만성폐질환을 앓고 계시기는 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면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큰딸인 저는 마냥 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의문들이 머리에서, 또 가슴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면서 환자들의 죽음을 접했을 때에도 알 수 없는 회의감과 의문들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행복해야 하는 것이 순리고 진리라고 생각했기에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오래 사셔야 할 분인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이 마감되어야 하나? 무엇이 아빠를 그다지도 힘들게 한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그곳은 아픔이 없는 곳일까? 그곳에서 나머지 못다 한 삶을 보상받나? 그곳은 어디일까?’ 등등 수많은 의문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제 가슴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되어 박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어느덧 제 나이가 마흔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마흔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내가 왜 사는지, 태어나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지, 이 막연함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마흔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민 많고 의문 많던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았습니다. 갑자기 삶이 지루하고 싫증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의 친구로부터 독일에서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저희는 3주 만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아들의 교육환경을 바꿔주는 것이었지만 그만큼이나 큰 다른 이유는 시댁식구들의(특히 작은 시누이언니) 집요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매년 여름휴가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고 시댁의 관심에서 빠져나가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추석과 구정 명절 때 시댁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에는 새벽이 되도록 시누이언니와 형님과 함께 성경을 두고 토론을 벌여야 했고, 결국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어떻게 저런 자신감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혹시 진짜, 가짜 하나님이 있을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로 떠나는 날이 결정되면서 시댁 식구들의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헤어지는 아쉬움보다 성경 말씀을 외면하고 가버리는 동생네들과 마지막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듣게 하려는 쪽과 안 듣겠다는 쪽의 씨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겼고 의기양양하게 한국을 떠나 독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5개월 뒤 아직 낯선 땅에서 헤매고 있을 때 시누이언니와 형님께서 프랑크푸르트로 오셨습니다. 성경탐구모임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데 함께 참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지구의 3분의 1을 돌아서 이 먼 독일 땅에까지, 시누이언니와 형님의 하나님은 끈질기게도 우리를 따라오시는구나 하고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니.”라고 말씀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약속했던대로 여행을 떠나는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시누이언니는 여행엔 전혀 관심 없이 우리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저런 표정일까?’
그렇게 두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나 독일에서의 일 년이 지났습니다. 친구와 동업하던 사업이, 남 이야기로만 듣던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독일에 오기 직전에 남편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가지고 온 돈으로 아들 공부시키고, 생활하고, 다 써 버리고 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래도 아들 공부한 것은 남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아들에게는 산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야.”라고요. 그런데 아들이 이제 겨우 어렵사리 공부에 적응하고 있는데, 게다가 14세 한창 사춘기에 예민해 있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런 생각만 하고 다른 상황은 아직 피부로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집주인이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와서는 월세가 밀려 다른 사람에게 이 집을 세 주려고 하니 당장 나가라고 경고하듯이 내뱉고 나가버렸습니다. 그제야 실감이 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돈이 없다는 것보다는 결과 자체를 납득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내 욕심보다는 베풀면서 남들을 위하면서 살았는데, 하늘 보기에 한 점 부끄러운 것 없이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답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벼랑 끝이구나.’
한낮에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4층 높이까지 큰 소나무에 다람쥐 두 마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새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자유로움이 부러웠고 그들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하물며 나는 인간인데 저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은 죽어야만 인생을 아는 것 인가보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날 저녁 늦은 밤에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은 생소했습니다. 얼마 만에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생각하니 까마득했습니다. 깡말라서 뼈의 형태를 보는 듯했고 하얗던 얼굴은 까만색으로,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속에서, 내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시간이 얼마큼이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지, 남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 일주일간 어느 댁을 다녀오자고. 갑작스런 제안이었고 낯선 분에게 그런 신세를 질 수는 없다고 했지만 무조건 가자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큰누나가 적어준 연락처가 있는데 그분께 우리 문제를 마지막으로 의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하시는 첫 말씀은 “말씀에서 해결을 본 다음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이 순서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싶었지만 더 이상 실망하거나 거부할 아무것도 제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대로 2층 방에 올라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있어서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점차 말씀에 흥미가 생겼고, 궁금해지면서 조급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저분은 내가 13년 전에 교회에서 뵈었던 분인데, 그 때도 저 말씀을 하셨는데 그땐 어렵고 이해가 안 되었는데. 어! 성경에 인생이 헛되다고, 내 마음이 그대로 적혀있네. 내가 죄인이라고 하네! 글쎄?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것도 죄라고 하네. 그럼 내가 죄인이네. 그런데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위해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네....’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어리가 빠지고 눈앞에 항상 가로막혀 있던 무엇인가가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환한 대낮에 있었지만 그간 내가 어두움에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깜깜한 어두움 속이었기에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아 그토록 헤매고 헤매었는데.... 분명히 내가 갖고 있던, 내가 보던 성경책인데 이곳에 해답이 있었다니!’ 드디어 저는 자유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시댁에 연락했습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이 소식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친정식구들에게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으로 그제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친정어머니가, 그 일 년 뒤 작은 동생이 이곳 독일에 와서 참 빛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오빠와 큰 동생은 안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한 번 뿌리신 씨는 반드시 거두신다는 말씀을 믿고, 이 글을 오빠와 동생들, 친구들 그리고 어디엔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고등학교 때 실력보다는 기회와 운이란 것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 대한 막연한 실망감이 앞섰고 앞으로 주어질 제 삶의 시간들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병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젊은 모델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을 때, 자기의 전문 분야인데 그 병으로 의학교수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돈이 많은 분이 죽음 앞에서 초라해지는 보습을 보았을 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이끌려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실망감을 느꼈고 이런 삶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행한 만큼은 주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무 후에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무엇인가를 꾸준히 배웠고, 운동을 하고, 병원 내에서 하는 봉사 활동 또한 열심히 했습니다. 문득‘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주변을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나 동료가 아무도 없었기에 이런 나의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왠지 이 사람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과 내 고민을 이야기하면 받아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나와 같은 사람도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무언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혼 직후 시댁어른들의 권유로 서울 교회의 전도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간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세상에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계시구나. 분명히 그전에 내가 보던 그 성경책인데 왠지 다른 성경책을 보고 있는 것 같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의아함은 지울 수 있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곳을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동안 마음 한켠에 꾹꾹 누르고 있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이 아이를 두고 죽으면 어떡하나?’ 그 뒤로는 아이에 관련된 책을 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세미나 등에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불투명함이었고,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어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의지할 곳을 찾아서 가까운 교회에 다니려고 했지만 목사님들의 설교 시간은 내게 단순한 도덕 시간에 불과했고, 불규칙한 근무 시간과 남편의 무언의 비협조로 이마저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친정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만성폐질환을 앓고 계시기는 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면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큰딸인 저는 마냥 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의문들이 머리에서, 또 가슴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면서 환자들의 죽음을 접했을 때에도 알 수 없는 회의감과 의문들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행복해야 하는 것이 순리고 진리라고 생각했기에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오래 사셔야 할 분인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이 마감되어야 하나? 무엇이 아빠를 그다지도 힘들게 한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그곳은 아픔이 없는 곳일까? 그곳에서 나머지 못다 한 삶을 보상받나? 그곳은 어디일까?’ 등등 수많은 의문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제 가슴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되어 박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어느덧 제 나이가 마흔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마흔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내가 왜 사는지, 태어나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지, 이 막연함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마흔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민 많고 의문 많던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았습니다. 갑자기 삶이 지루하고 싫증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의 친구로부터 독일에서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저희는 3주 만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아들의 교육환경을 바꿔주는 것이었지만 그만큼이나 큰 다른 이유는 시댁식구들의(특히 작은 시누이언니) 집요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매년 여름휴가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고 시댁의 관심에서 빠져나가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추석과 구정 명절 때 시댁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에는 새벽이 되도록 시누이언니와 형님과 함께 성경을 두고 토론을 벌여야 했고, 결국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어떻게 저런 자신감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혹시 진짜, 가짜 하나님이 있을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로 떠나는 날이 결정되면서 시댁 식구들의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헤어지는 아쉬움보다 성경 말씀을 외면하고 가버리는 동생네들과 마지막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듣게 하려는 쪽과 안 듣겠다는 쪽의 씨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겼고 의기양양하게 한국을 떠나 독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5개월 뒤 아직 낯선 땅에서 헤매고 있을 때 시누이언니와 형님께서 프랑크푸르트로 오셨습니다. 성경탐구모임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데 함께 참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지구의 3분의 1을 돌아서 이 먼 독일 땅에까지, 시누이언니와 형님의 하나님은 끈질기게도 우리를 따라오시는구나 하고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니.”라고 말씀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약속했던대로 여행을 떠나는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시누이언니는 여행엔 전혀 관심 없이 우리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저런 표정일까?’
그렇게 두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나 독일에서의 일 년이 지났습니다. 친구와 동업하던 사업이, 남 이야기로만 듣던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독일에 오기 직전에 남편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가지고 온 돈으로 아들 공부시키고, 생활하고, 다 써 버리고 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래도 아들 공부한 것은 남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아들에게는 산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야.”라고요. 그런데 아들이 이제 겨우 어렵사리 공부에 적응하고 있는데, 게다가 14세 한창 사춘기에 예민해 있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런 생각만 하고 다른 상황은 아직 피부로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집주인이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와서는 월세가 밀려 다른 사람에게 이 집을 세 주려고 하니 당장 나가라고 경고하듯이 내뱉고 나가버렸습니다. 그제야 실감이 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돈이 없다는 것보다는 결과 자체를 납득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내 욕심보다는 베풀면서 남들을 위하면서 살았는데, 하늘 보기에 한 점 부끄러운 것 없이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답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벼랑 끝이구나.’
한낮에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4층 높이까지 큰 소나무에 다람쥐 두 마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새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자유로움이 부러웠고 그들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하물며 나는 인간인데 저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은 죽어야만 인생을 아는 것 인가보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날 저녁 늦은 밤에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은 생소했습니다. 얼마 만에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생각하니 까마득했습니다. 깡말라서 뼈의 형태를 보는 듯했고 하얗던 얼굴은 까만색으로,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속에서, 내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시간이 얼마큼이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지, 남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 일주일간 어느 댁을 다녀오자고. 갑작스런 제안이었고 낯선 분에게 그런 신세를 질 수는 없다고 했지만 무조건 가자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큰누나가 적어준 연락처가 있는데 그분께 우리 문제를 마지막으로 의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하시는 첫 말씀은 “말씀에서 해결을 본 다음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이 순서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싶었지만 더 이상 실망하거나 거부할 아무것도 제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대로 2층 방에 올라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있어서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점차 말씀에 흥미가 생겼고, 궁금해지면서 조급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저분은 내가 13년 전에 교회에서 뵈었던 분인데, 그 때도 저 말씀을 하셨는데 그땐 어렵고 이해가 안 되었는데. 어! 성경에 인생이 헛되다고, 내 마음이 그대로 적혀있네. 내가 죄인이라고 하네! 글쎄?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것도 죄라고 하네. 그럼 내가 죄인이네. 그런데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위해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네....’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어리가 빠지고 눈앞에 항상 가로막혀 있던 무엇인가가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환한 대낮에 있었지만 그간 내가 어두움에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깜깜한 어두움 속이었기에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아 그토록 헤매고 헤매었는데.... 분명히 내가 갖고 있던, 내가 보던 성경책인데 이곳에 해답이 있었다니!’ 드디어 저는 자유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시댁에 연락했습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이 소식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친정식구들에게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으로 그제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친정어머니가, 그 일 년 뒤 작은 동생이 이곳 독일에 와서 참 빛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오빠와 큰 동생은 안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한 번 뿌리신 씨는 반드시 거두신다는 말씀을 믿고, 이 글을 오빠와 동생들, 친구들 그리고 어디엔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