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적으려고 돌이켜 보니, 구원받은 후 주께서 함께하셨던 지난 37년의 세월이 감사해 마음이 벅차옵니다. 저는 1972년 10월 30일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저의 모든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조용히 밀려오는 기쁨과 함께 주께서 내 마음에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5살 즈음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는데 그때의 기억 중 커 가면서도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채에 사셨던 작은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방에 누워서 당시 제 또래였던 막내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 말 잘 들어라.’ 하시는 모습을 마루 끝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사람들은 울부짖고, 꽁꽁 묶인 할아버지의 시체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마당 끝에서 조금 떨어진 감나무 아래에서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그때부터 사람은 왜 죽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제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친구를 따라 성당에 다니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후부터 자비롭다는 석가모니보다, 인애의 공자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며 그 빠르기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이 우주에는 지구에서 몇 억만 광년이나 떨어진 별도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이 우주 속에서 작은 점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와 생각으로는 이 끝없는 우주도 품을 수 있다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시시해 보였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친구들과의 생활도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마음속에는 남모르는 열등감과 자존심이 싸웠고, 그 속에서 저는 곧잘 죽음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뒤로는 다시 삶이 연결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사는 것인가?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왜’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일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교정에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며, 인생은 나뭇잎과 흡사한 것이며 인간의 삶을 세상이란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연극배우에 비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쓴 글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나뭇잎과 흡사한 허무함뿐이라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러한 외적인 목적이 아닌, 내면의 깊은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직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들 때문에 서울로 진학할 수 없어 공주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한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선생님의 소개로 고등학교 3학년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수학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수학을 배워 훗날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된다 해도 지금 실력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부분으로 좀 더 나 자신을 채워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를 알면 둘을 모르겠고 둘을 알면 넷을 모르겠는, 더욱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채워지지 않는 제 마음을 ‘인간은 불완전 속에서 완전해지려 하나 완전과는 끊임없이 거리를 두게 되는 애달픈 긴장적 존재다’라는 철학적 글귀로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내 기독교 서클 활동이나 교회 활동을 통해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도 많아졌고 성경대로 행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4절) 부터 죽 이어진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사랑’이란 것에 대해 왜 이런 표현들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성간에 느끼고 오가는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을 사랑이라 했을까?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 1남 6녀의 맏딸로 태어난 저는 동생과 곧잘 다투었던 터라 왜 나는 내 친동생조차, 아니 부모님조차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저 그 뒤를 열심히 좇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교회에 나와라, 예수님을 믿어라 권유했지만 밤마다 일기장에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 왜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지, 왜 사는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는 것인지 등 ‘왜’ 라는 의문이 해결되기를, 언젠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를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1972년,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등산을 하고 즐겁게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다녀왔다는 친구는 “나 구원받았어.” 하며 상기된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구원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듣게 된 저는 ‘구원이 무엇인데 저렇게 기쁠까? 내가 즐거워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인데 나도 교회에 더욱 열심히 다니면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중에 10월 유신으로 한 달 동안 휴교가 되었고 저는 다시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먼저 복음을 깨달은 친구가 제게 찾아와 내게는 죄가 없는지,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부터 주님의 피로 내 죄가 사해졌고 앞으로 짓는 죄는 그때 그때 주께 고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튿날 친구와 함께 저는 제가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 중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몇몇이 모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 모임은 고완석 형제님이 졸업하신 후 몇 사람이 복음을 깨달아 모이게 된 모임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그 모임에 참석하여 이대석 형제님과 이야기하는 도중 주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은 전에 지었던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 영원히 속죄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셨구나.’ 하며 멍해진 마음속에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사랑이 마음 가득 채워졌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오신 순간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로마서부터 성경을 읽어보니 말씀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전히 새롭게 보였고 그 말씀들은 제가 그간 가졌던 ‘왜?’라는 의문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날의 일기장은 온통 ‘감사합니다.’로 메워졌고, 20년 동안 괴로움 속에 방황했던 제 삶은 기쁨과 평안함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제가 찾아 헤맸던 모든 것에 답을 주었고 제 마음을 채워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후 처음에는 정신없이 이 복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했고 차츰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러 전국으로 다니며 교제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인을 교제케 하는 많은 일들을 함께하며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신 말씀이 이 교제와 함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37년 동안 달려온 세월 속에 개인적으로나 교회로나 여러 어려움으로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도 쉼 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 일들 속에서 저도 한 지체로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머지 시간들을 채워주시기를 바라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한번 상고해 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1-13)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적으려고 돌이켜 보니, 구원받은 후 주께서 함께하셨던 지난 37년의 세월이 감사해 마음이 벅차옵니다. 저는 1972년 10월 30일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저의 모든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조용히 밀려오는 기쁨과 함께 주께서 내 마음에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5살 즈음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는데 그때의 기억 중 커 가면서도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채에 사셨던 작은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방에 누워서 당시 제 또래였던 막내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 말 잘 들어라.’ 하시는 모습을 마루 끝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사람들은 울부짖고, 꽁꽁 묶인 할아버지의 시체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마당 끝에서 조금 떨어진 감나무 아래에서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그때부터 사람은 왜 죽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제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친구를 따라 성당에 다니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후부터 자비롭다는 석가모니보다, 인애의 공자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돌며 그 빠르기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이 우주에는 지구에서 몇 억만 광년이나 떨어진 별도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이 우주 속에서 작은 점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와 생각으로는 이 끝없는 우주도 품을 수 있다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시시해 보였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친구들과의 생활도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마음속에는 남모르는 열등감과 자존심이 싸웠고, 그 속에서 저는 곧잘 죽음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뒤로는 다시 삶이 연결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사는 것인가?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왜’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일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교정에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며, 인생은 나뭇잎과 흡사한 것이며 인간의 삶을 세상이란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연극배우에 비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쓴 글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나뭇잎과 흡사한 허무함뿐이라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러한 외적인 목적이 아닌, 내면의 깊은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직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들 때문에 서울로 진학할 수 없어 공주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한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선생님의 소개로 고등학교 3학년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수학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수학을 배워 훗날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된다 해도 지금 실력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부분으로 좀 더 나 자신을 채워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를 알면 둘을 모르겠고 둘을 알면 넷을 모르겠는, 더욱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채워지지 않는 제 마음을 ‘인간은 불완전 속에서 완전해지려 하나 완전과는 끊임없이 거리를 두게 되는 애달픈 긴장적 존재다’라는 철학적 글귀로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내 기독교 서클 활동이나 교회 활동을 통해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도 많아졌고 성경대로 행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4절) 부터 죽 이어진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사랑’이란 것에 대해 왜 이런 표현들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성간에 느끼고 오가는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을 사랑이라 했을까?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 1남 6녀의 맏딸로 태어난 저는 동생과 곧잘 다투었던 터라 왜 나는 내 친동생조차, 아니 부모님조차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저 그 뒤를 열심히 좇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교회에 나와라, 예수님을 믿어라 권유했지만 밤마다 일기장에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 왜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지, 왜 사는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는 것인지 등 ‘왜’ 라는 의문이 해결되기를, 언젠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를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1972년,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등산을 하고 즐겁게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다녀왔다는 친구는 “나 구원받았어.” 하며 상기된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구원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듣게 된 저는 ‘구원이 무엇인데 저렇게 기쁠까? 내가 즐거워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인데 나도 교회에 더욱 열심히 다니면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중에 10월 유신으로 한 달 동안 휴교가 되었고 저는 다시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먼저 복음을 깨달은 친구가 제게 찾아와 내게는 죄가 없는지,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부터 주님의 피로 내 죄가 사해졌고 앞으로 짓는 죄는 그때 그때 주께 고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튿날 친구와 함께 저는 제가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 중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몇몇이 모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 모임은 고완석 형제님이 졸업하신 후 몇 사람이 복음을 깨달아 모이게 된 모임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그 모임에 참석하여 이대석 형제님과 이야기하는 도중 주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은 전에 지었던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 영원히 속죄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셨구나.’ 하며 멍해진 마음속에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사랑이 마음 가득 채워졌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오신 순간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로마서부터 성경을 읽어보니 말씀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전히 새롭게 보였고 그 말씀들은 제가 그간 가졌던 ‘왜?’라는 의문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날의 일기장은 온통 ‘감사합니다.’로 메워졌고, 20년 동안 괴로움 속에 방황했던 제 삶은 기쁨과 평안함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제가 찾아 헤맸던 모든 것에 답을 주었고 제 마음을 채워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후 처음에는 정신없이 이 복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했고 차츰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러 전국으로 다니며 교제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인을 교제케 하는 많은 일들을 함께하며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신 말씀이 이 교제와 함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37년 동안 달려온 세월 속에 개인적으로나 교회로나 여러 어려움으로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도 쉼 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 일들 속에서 저도 한 지체로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머지 시간들을 채워주시기를 바라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한번 상고해 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