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교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던 중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1975년 1월에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시각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만날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저는 제 모습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귀하고 귀한 이 구원이 저에게까지 오게 되어 저는 제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복음을 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저는 기회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1년 7월 2일 아침에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동기부터 시작해서 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겁 없던 학창시절
제 이야기를 하자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겁 없이 달음질했던 학창시절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축구를 했는데 그만두자 선배들의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맞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과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태권도를 배웠고 악착같이 하니 실력이 붙어 경북 대표로 전국 체전에도 나갔습니다.
이렇게 태권도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상북도 실내 체육관 완공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각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체육관에 모였고 저는 저희 학교 학생들의 인솔자가 되어 체육 선생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자리를 배정받아 앉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학교 학생이 저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자 험악한 말이 돌아왔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학교 인솔자로서 온 저는 다른 학교 학생에게 쫓겨난다는 것이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거의 패싸움이 될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상대 학교 학생들에게 대표를 뽑아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미터 80센티가 넘는 장신의 학생이 나와 겁이 좀 났지만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보다 작은 저를 얕잡아 보았던 상대 학생이 제게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제 주먹이 나갔고 그 학생은 나가떨어졌습니다. 순간 저는 그 학생이 죽은 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상대 학교 학생들이 뭇매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맞을 수는 없어 도망다니다가 3층 높이 건물 옥상에서 무작정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저희 체육 선생님의 중재로, 상대 학생들과 악수를 나누며 일단락되었습니다.
또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선도부장이 되어 정문에서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양복을 입고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오는데 전혀 학생 같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붙잡고 보니 명찰도 없고 학교 배지도 없었습니다. “나 모르나? 너 그러다 맞는다.” 하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학교 선생님들도 감당하지 못해 졸업장은 줄 테니 학교에는 나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골칫거리였던 3학년 선배였습니다. 그는 낮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학교에 나와 시간을 보내려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일지라도 복장과 규율을 어겼는데 벌도 주지 않고 학교에 들여보내면 교내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것 같아 저는 그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고 그렇게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 형이 저를 때리려는 순간 제 손과 발이 먼저 나갔고 상대방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일로 교장 선생님께 불려갔고 일주일 동안 정학을 시키겠다 하시기에, 교칙을 어긴 학생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 그 벌은 받겠다, 그러나 정학은 받을 수 없다 하고는 나와버렸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그 형이 친구 다섯 명을 데리고 저를 찾아와 자기 평생에 맞은 것이 처음이라며 저와 맞대결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싸울 준비를 하고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된 순간이 지나갔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자 어느 순간 그 형이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고 순간 저는 제가 이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싸움 없이 그 형과 저는 승부를 냈고 그 후로는 오히려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게는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지만 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더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드디어 대학교에 스카우트되었고 대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세웠던 첫 번째 목표가 달성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개무량했는지 모릅니다. 졸업할 때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아야겠다 생각해 또 열심히 대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 대회에 나가 우승도 여러 번 했고 다앙한 사회 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꽃 몽우리가 피어야 할 시기에 제게는 암흑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암흑 속에서
어느 날, 여러 일들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워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습니다. 꿈속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던 중에 뱀이 다가와 저의 목을 꽉 물었습니다. 그 뱀을 잡아채면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는데, 그때 제 눈에서 피가 났습니다. 참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피가 너무 많이 나와 수정체에 가득 차서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하고 싶었던 모든 일들을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든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병을 얻고 나니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다 물거품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암흑과 같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죽으려고도 했지만 제 인생이 너무 아까워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겨서 이렇게 쓸모없는 인생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날마다 울며 괴로워했습니다. 눈을 고치기 위해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용하다는 점쟁이는 다 찾아가 보았고, 많은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우연히 어떤 누나를 소개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대학을 왔고 그 누나는 여전히 대구에서 지냈기 때문에 가끔 편지나 전화를 주고받았고 시합 때 내려오면 가끔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 눈이 아프고부터는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제 형님이 오시더니 대구에서 어떤 아가씨가 찾아와 시집가기 전에 한번 너를 보고 싶다는데 만나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모처럼 몇 년 만에 만났지만, 그냥 몇 마디 주고받고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다시 찾아와서 또 만났고, 세 번째 만날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누나는, “사람이 살다보면 죽을 수도, 병들어 누울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 맺어진 인연 때문에 헤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내가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제게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님네 부부에게 상의했더니 너만 고생하면 되지, 또 한 사람을 고생시킬 수 있느냐 하셨고, 여자 쪽 집안에서도 딸이 장님과 결혼한다고 하니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졸업한 고등학교를 몇 년 만에 우연히 찾아갔는데 마침 미국에서 온 선배를 만나게 되었고, 선배는 미국에 가면 제 눈을 수술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보겠노라 했습니다. 3개월 정도 지나 초청장과 함께 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의 한 의사가 눈 수술의 일인자인데 어떤 기구를 개발했다며 한번 수술을 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당시 양가의 허락을 받지 못해 고민 중이었는데, 처가댁에 찾아가 “지금은 제가 장님이지만 반드시 눈을 뜰 것입니다. 그러니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좋은 남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눈이 떠진 몸으로 다시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우선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허락을 해주십시오.” 했습니다. 마침내 어렵게 양가의 허락을 받고 혼인신고를 하고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80년 1월 15일이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교제 가운데 살며
희망을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 저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나 한쪽 눈 수술을 받았고 한 달 후에 다른 쪽 눈도 수술을 했습니다. 두 눈을 모두 수술했지만 왼쪽 눈의 수술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른쪽 눈은 작은 글씨라도 볼 수 있는 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 전체의 상황은 완전하지 못했고, 합병증과 재발의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눈 수술 후 저는 요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앉아 주문을 외우며 당시 제가 믿고 있던 종교 의식을 행했는데 문득, ‘정말 이것이 절대자의 힘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 앞으로의 생계 문제도 걱정이 되어 여러 가지로 힘들던 차에 진정한 신을 찾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하며 정말 신이 있다면 그 신을 만나보고 싶었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면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하나님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수는 없었고, 사랑을 모르는데 사랑하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위선자가 되기는 싫어 일단 스스로 한번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목사와 전도사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못 믿겠습니다. 내 꿈속에 나타난 뱀조차 못 막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믿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했지만 제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후 저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었던 선배를 만나기 위해 미시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선배에게 목사가 되겠다고 말했는데 선배는 마침 일이 있어 그곳에 들르셨던 한 형제님을 제게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저는 성경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따지고 묻고 배우는 시간을 사흘 정도 보냈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으로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한계시록까지 진행되는데 정말 하나도 틀림이 없이, 몇 천 년 전부터 예언하고 기록된 그 말씀, “내 말을 지키면 복을 받고, 내 말을 지키지 않고 버리면 저주 받는다”는 그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전 세계에 흩으셨다가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역사를 보고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제 마음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계속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고, 그 기록들은 점 하나 틀리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정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문제, 인생이 사는 문제, 죄를 짓는 문제, 그 모든 것을 성경이 저에게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의 말씀까지 다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제 양심에 고통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강사님의 말씀들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웠지만 저희 부부는 투닥거리며 말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역할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렇게 저희는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집회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 후 1981년에 권 목사님이 미국에 오셔서 성경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것도 죄라고 하여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지나갔지만 땅을 보아도 사람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화도 냈는데 그것 역시 죄였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너무 괴로워 ‘하나님, 나더러 어떡하라는 것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안 지을 수 없는데 그러면 죽으라는 것입니까?’ 하는 그 순간 ‘아, 이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양심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었는데 권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 강연을 한다 하기에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강연회에 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는 부르클린의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늦은 시간에 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아내는 그곳에서 맨해튼까지 일을 다녔기에 퇴근 후에는 제가 마중을 가야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권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러는 꼭 가야겠기에 아내의 직장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아 아내를 묵게 하고 저는 성경 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참석해서 강연을 계속 듣고 마지막 날 복음에 관해 말씀하시는것을 들었는 데도 저는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 이번에도 안 되는구나. 이제 침례식만 하면 끝인데....’ 하는 마음에 포기가 되었습니다.
침례식을 하기 전, 목사님께서 간단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맨 뒤에서 포기한 상태로 있었는데, 그때 제 귀에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사야서 43장 25절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허물은 우리가 태어나서 육신으로 짓는 죄를 이야기하고, 죄라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류에게 유전되어 온 죄,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죄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있는 짐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마음으로 짓는 죄, 양심으로 짓는 죄, 짓지 않을 수 없는 죄 때문에 또 그로 인해 몸으로 지어야 하는 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몸과 마음이 짓는 모든 죄를 호리도 남김없이 다 사해 주셨습니다. ‘내가 다 용서받았구나.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내 죄를 다 용서해 놓으셨구나!’ 흉용한 파도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잠잠해지는 것처럼 제 마음은 조용해졌습니다. 죄 때문에 파도치던 마음이 주님의 그 한마디에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지금껏 이렇게 힘들게 지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때가 1981년 7월 2일 아침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성경이 제 손에서, 제 눈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좋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음성이기 때문에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제 가운데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만나기만 해도 즐거웠고 형제자매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습니다. 뉴욕, 디트로이트, 미시간, 워싱턴 등 교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고 참 즐겁게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흐르면서 제 마음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 하루만 교회에 가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정말 신앙생활일까?’ 그 의문은 자꾸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 이런 것들을 계속 표시하면서 읽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서 7장을 읽던 중 저는 성경을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4절) 하는 그 말씀이 제 마음과 일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다시 성경을 펴서 읽었는데 8장 1절 말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니까, 그런 너니까 이렇게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와 함께하면, 이 몸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정죄함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참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 가운데서 사는 이 생활이 정말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에 사는데 어떤 연결을 지어야만 한국이나 여러 나라에 사는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될까 생각하며 성경을 읽는데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이 보였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9-20절) 그 순간, 제가 지금까지 구약에서부터 읽어왔던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대상 29:11) 하는 그 하나님의 것이 저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그 말씀 앞에 나와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자매들이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 일하고 함께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미움이 생기고 여러 문제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역시 말씀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을 낮추어 희생하고 그 희생이 여러 성도들을 위해 쓰인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제의 방향에 동참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개미처럼 게으르지 않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사는 그 생활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겠나 생각했습니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제가 지금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제 눈을 멀게 했던 후배들에게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눈이 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원받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들에게 원망보다는, 이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잘 되지는 않네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그들이 나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렇게 저를 구원해 주셔서 교제 가운데 함께할 수 있는 일과 환경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대학교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던 중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1975년 1월에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시각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만날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저는 제 모습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귀하고 귀한 이 구원이 저에게까지 오게 되어 저는 제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복음을 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저는 기회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1년 7월 2일 아침에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동기부터 시작해서 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겁 없던 학창시절
제 이야기를 하자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겁 없이 달음질했던 학창시절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축구를 했는데 그만두자 선배들의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맞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과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태권도를 배웠고 악착같이 하니 실력이 붙어 경북 대표로 전국 체전에도 나갔습니다.
이렇게 태권도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상북도 실내 체육관 완공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각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체육관에 모였고 저는 저희 학교 학생들의 인솔자가 되어 체육 선생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자리를 배정받아 앉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학교 학생이 저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자 험악한 말이 돌아왔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학교 인솔자로서 온 저는 다른 학교 학생에게 쫓겨난다는 것이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거의 패싸움이 될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상대 학교 학생들에게 대표를 뽑아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미터 80센티가 넘는 장신의 학생이 나와 겁이 좀 났지만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보다 작은 저를 얕잡아 보았던 상대 학생이 제게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제 주먹이 나갔고 그 학생은 나가떨어졌습니다. 순간 저는 그 학생이 죽은 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상대 학교 학생들이 뭇매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맞을 수는 없어 도망다니다가 3층 높이 건물 옥상에서 무작정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저희 체육 선생님의 중재로, 상대 학생들과 악수를 나누며 일단락되었습니다.
또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선도부장이 되어 정문에서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양복을 입고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오는데 전혀 학생 같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붙잡고 보니 명찰도 없고 학교 배지도 없었습니다. “나 모르나? 너 그러다 맞는다.” 하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학교 선생님들도 감당하지 못해 졸업장은 줄 테니 학교에는 나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골칫거리였던 3학년 선배였습니다. 그는 낮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학교에 나와 시간을 보내려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일지라도 복장과 규율을 어겼는데 벌도 주지 않고 학교에 들여보내면 교내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것 같아 저는 그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고 그렇게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 형이 저를 때리려는 순간 제 손과 발이 먼저 나갔고 상대방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일로 교장 선생님께 불려갔고 일주일 동안 정학을 시키겠다 하시기에, 교칙을 어긴 학생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 그 벌은 받겠다, 그러나 정학은 받을 수 없다 하고는 나와버렸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그 형이 친구 다섯 명을 데리고 저를 찾아와 자기 평생에 맞은 것이 처음이라며 저와 맞대결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싸울 준비를 하고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된 순간이 지나갔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자 어느 순간 그 형이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고 순간 저는 제가 이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싸움 없이 그 형과 저는 승부를 냈고 그 후로는 오히려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게는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지만 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더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드디어 대학교에 스카우트되었고 대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세웠던 첫 번째 목표가 달성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개무량했는지 모릅니다. 졸업할 때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아야겠다 생각해 또 열심히 대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 대회에 나가 우승도 여러 번 했고 다앙한 사회 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꽃 몽우리가 피어야 할 시기에 제게는 암흑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암흑 속에서
어느 날, 여러 일들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워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습니다. 꿈속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던 중에 뱀이 다가와 저의 목을 꽉 물었습니다. 그 뱀을 잡아채면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는데, 그때 제 눈에서 피가 났습니다. 참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피가 너무 많이 나와 수정체에 가득 차서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하고 싶었던 모든 일들을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든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병을 얻고 나니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다 물거품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암흑과 같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죽으려고도 했지만 제 인생이 너무 아까워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겨서 이렇게 쓸모없는 인생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날마다 울며 괴로워했습니다. 눈을 고치기 위해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용하다는 점쟁이는 다 찾아가 보았고, 많은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우연히 어떤 누나를 소개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대학을 왔고 그 누나는 여전히 대구에서 지냈기 때문에 가끔 편지나 전화를 주고받았고 시합 때 내려오면 가끔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 눈이 아프고부터는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제 형님이 오시더니 대구에서 어떤 아가씨가 찾아와 시집가기 전에 한번 너를 보고 싶다는데 만나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모처럼 몇 년 만에 만났지만, 그냥 몇 마디 주고받고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다시 찾아와서 또 만났고, 세 번째 만날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누나는, “사람이 살다보면 죽을 수도, 병들어 누울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 맺어진 인연 때문에 헤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내가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제게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님네 부부에게 상의했더니 너만 고생하면 되지, 또 한 사람을 고생시킬 수 있느냐 하셨고, 여자 쪽 집안에서도 딸이 장님과 결혼한다고 하니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졸업한 고등학교를 몇 년 만에 우연히 찾아갔는데 마침 미국에서 온 선배를 만나게 되었고, 선배는 미국에 가면 제 눈을 수술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보겠노라 했습니다. 3개월 정도 지나 초청장과 함께 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의 한 의사가 눈 수술의 일인자인데 어떤 기구를 개발했다며 한번 수술을 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당시 양가의 허락을 받지 못해 고민 중이었는데, 처가댁에 찾아가 “지금은 제가 장님이지만 반드시 눈을 뜰 것입니다. 그러니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좋은 남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눈이 떠진 몸으로 다시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우선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허락을 해주십시오.” 했습니다. 마침내 어렵게 양가의 허락을 받고 혼인신고를 하고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80년 1월 15일이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교제 가운데 살며
희망을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 저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나 한쪽 눈 수술을 받았고 한 달 후에 다른 쪽 눈도 수술을 했습니다. 두 눈을 모두 수술했지만 왼쪽 눈의 수술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른쪽 눈은 작은 글씨라도 볼 수 있는 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 전체의 상황은 완전하지 못했고, 합병증과 재발의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눈 수술 후 저는 요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앉아 주문을 외우며 당시 제가 믿고 있던 종교 의식을 행했는데 문득, ‘정말 이것이 절대자의 힘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 앞으로의 생계 문제도 걱정이 되어 여러 가지로 힘들던 차에 진정한 신을 찾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하며 정말 신이 있다면 그 신을 만나보고 싶었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면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하나님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수는 없었고, 사랑을 모르는데 사랑하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위선자가 되기는 싫어 일단 스스로 한번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목사와 전도사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못 믿겠습니다. 내 꿈속에 나타난 뱀조차 못 막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믿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했지만 제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후 저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었던 선배를 만나기 위해 미시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선배에게 목사가 되겠다고 말했는데 선배는 마침 일이 있어 그곳에 들르셨던 한 형제님을 제게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저는 성경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따지고 묻고 배우는 시간을 사흘 정도 보냈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으로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한계시록까지 진행되는데 정말 하나도 틀림이 없이, 몇 천 년 전부터 예언하고 기록된 그 말씀, “내 말을 지키면 복을 받고, 내 말을 지키지 않고 버리면 저주 받는다”는 그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전 세계에 흩으셨다가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역사를 보고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제 마음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계속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고, 그 기록들은 점 하나 틀리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정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문제, 인생이 사는 문제, 죄를 짓는 문제, 그 모든 것을 성경이 저에게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의 말씀까지 다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제 양심에 고통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강사님의 말씀들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웠지만 저희 부부는 투닥거리며 말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역할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렇게 저희는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집회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 후 1981년에 권 목사님이 미국에 오셔서 성경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것도 죄라고 하여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지나갔지만 땅을 보아도 사람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화도 냈는데 그것 역시 죄였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너무 괴로워 ‘하나님, 나더러 어떡하라는 것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안 지을 수 없는데 그러면 죽으라는 것입니까?’ 하는 그 순간 ‘아, 이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양심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었는데 권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 강연을 한다 하기에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강연회에 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는 부르클린의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늦은 시간에 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아내는 그곳에서 맨해튼까지 일을 다녔기에 퇴근 후에는 제가 마중을 가야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권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러는 꼭 가야겠기에 아내의 직장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아 아내를 묵게 하고 저는 성경 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참석해서 강연을 계속 듣고 마지막 날 복음에 관해 말씀하시는것을 들었는 데도 저는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 이번에도 안 되는구나. 이제 침례식만 하면 끝인데....’ 하는 마음에 포기가 되었습니다.
침례식을 하기 전, 목사님께서 간단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맨 뒤에서 포기한 상태로 있었는데, 그때 제 귀에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사야서 43장 25절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허물은 우리가 태어나서 육신으로 짓는 죄를 이야기하고, 죄라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류에게 유전되어 온 죄,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죄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있는 짐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마음으로 짓는 죄, 양심으로 짓는 죄, 짓지 않을 수 없는 죄 때문에 또 그로 인해 몸으로 지어야 하는 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몸과 마음이 짓는 모든 죄를 호리도 남김없이 다 사해 주셨습니다. ‘내가 다 용서받았구나.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내 죄를 다 용서해 놓으셨구나!’ 흉용한 파도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잠잠해지는 것처럼 제 마음은 조용해졌습니다. 죄 때문에 파도치던 마음이 주님의 그 한마디에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지금껏 이렇게 힘들게 지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때가 1981년 7월 2일 아침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성경이 제 손에서, 제 눈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좋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음성이기 때문에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제 가운데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만나기만 해도 즐거웠고 형제자매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습니다. 뉴욕, 디트로이트, 미시간, 워싱턴 등 교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고 참 즐겁게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흐르면서 제 마음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 하루만 교회에 가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정말 신앙생활일까?’ 그 의문은 자꾸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 이런 것들을 계속 표시하면서 읽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서 7장을 읽던 중 저는 성경을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4절) 하는 그 말씀이 제 마음과 일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다시 성경을 펴서 읽었는데 8장 1절 말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니까, 그런 너니까 이렇게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와 함께하면, 이 몸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정죄함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참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 가운데서 사는 이 생활이 정말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에 사는데 어떤 연결을 지어야만 한국이나 여러 나라에 사는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될까 생각하며 성경을 읽는데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이 보였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9-20절) 그 순간, 제가 지금까지 구약에서부터 읽어왔던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대상 29:11) 하는 그 하나님의 것이 저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그 말씀 앞에 나와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자매들이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 일하고 함께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미움이 생기고 여러 문제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역시 말씀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을 낮추어 희생하고 그 희생이 여러 성도들을 위해 쓰인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제의 방향에 동참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개미처럼 게으르지 않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사는 그 생활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겠나 생각했습니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제가 지금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제 눈을 멀게 했던 후배들에게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눈이 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원받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들에게 원망보다는, 이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잘 되지는 않네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그들이 나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렇게 저를 구원해 주셔서 교제 가운데 함께할 수 있는 일과 환경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