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허무함으로 점철된 학생 시절
중학교 2학년 때쯤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사람은 왜 살까 하는 생각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허무했다. 열심히 공부해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 졸업한 후에는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산다 한들 결국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노래는 좋아해서 잘 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즐겁고 기쁘게 노래(찬양)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교회에도 다녀보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니와 함께 성경을 마태복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려 여러 번 시도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교회에도 가고 싶었지만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야 하고, 형식적인 의식과 제도 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은 각자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외국 가수에 몰두하여 신문에 난 기사를 열심히 스크랩하는 아이, 야구장에 가서 열광하는 아이, 스케이트장에서 신나게 운동하는 아이, 방과 후엔 자유복을 입고 멋을 내며 남학생을 만나는 아이, 화학 선생님을 좋아해 매일 아침 실험실에 꽃을 꽂아놓는 아이 등. 나도 이런 아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따라다녀 보았다. 친구를 따라 야구장에도 몇 번 가 보았지만 규칙을 모르니 경기가 재미있지도 않았고, 멋있다는 선수를 보아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만 하나도 즐겁거나 기쁘지 않았다.
나는 도서실이나 책방에서 책을 빌려보며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성경도 보고 불경도 읽어 보았지만 둘 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는 열심히 다녔지만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또 한 번에 대학 입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재수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대학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척 언니는 대학에 갈 만한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악착같이 공부하여 대학교에 합격하였고 친척집에서 통학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나중에 집안일 하는 사람을 두면서 잘 살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그런 말을 듣고도 나도 부자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생의 끝은 허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 의식도 없었고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별로 없었다.
나는 남에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학교에서도 출석 잘 하고 수업 잘 듣는 학생일 뿐이었다. 특별히 활발하지도 않았고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클럽 활동도 잘 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시험 기간에 일주일 이상 결석하면서 남해안과 홍도 등지를 여행하는 파격적인 친구도 있었는데, 마음으로는 그 과단성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난 계기
교회와 성당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작은어머니가 다니는 성당에 가 보았다. 웅장한 성당의 모습과 엄숙한 예배 의식에 관심이 생겨 교리 강좌를 들었다. 수녀는 내게 대죄(大罪)와 소죄(小罪)가 있다고 하였다. 그 차이를 물으니 말 그대로 대죄는 큰 죄, 소죄는 작은 죄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큰 죄는 사회적으로 벌을 받고 처리되는 죄지만 작은 죄는 남을 미워한 죄, 거짓말 한 죄, 음란한 생각을 한 죄 등의 양심적인 죄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나는 이러한 양심의 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녀는 이런 작은 죄는 누구에게나 있다며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여기도 완전한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교리 공부는 계속 했고 세례도 받았다. 일요일에는 성당 예배도 보았다. 하지만 고해성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내 양심의 괴로움을 모조리 말하고 신부가 ‘기도서를 몇 번 읽어라’고 처방하는 것으로 양심의 자유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적극적인 친구들의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교직 과목을 이수하여 교사 자격증을 받았고 친구와 함께 임용시험을 보았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응시했는데 두 곳 모두 합격했고, 먼저 충청도에서 발령이 났다. 2월 25일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3월 1일자로 발령을 받았기에 쉴 사이도 없이 집을 떠나 충청도 제천의 한 중학교로 갔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초년생!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어설프고 순진한 신임인 나에게 선배 선생님들은 친절히 대해 주며 잘 가르쳐 주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일요일이면 성당에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성당에 가야 그간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의 친분으로 구속되는 느낌이 싫어 예배만 보고 빨리 돌아오곤 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당직을 하는 중에 한 선생님이 종교에 관해 질문하며 성당에 왜 가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속으로 ‘저 선생님은 일요일인데 어디 놀러 가거나 운동하거나 하지 않고 왜 학교에 나와 있나’ 하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죄 지은 것을 일요일에 성당에 가서 씻는다고 한다면, 만약 주중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왔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소책자 한 권을 내밀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읽어보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이 깊어서 다시 읽어보며 간직하고 싶은 책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려는데 그 선생님이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하셨다. 뒤따라간 곳은 호롱불을 밝히고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집이었다. 둘러보니 학교 근처에서 밥을 해 주는 가게의 아가씨도 있었다.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그 모습은 무척 정다워 보였고 자연스러웠다.
3월에 발령을 받고 6월까지, 한창 교직 생활에 적응해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던 중 경기도에서 발령이 났다. 일을 시작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막 학생들과도 정이 든 참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접고 1학기를 마친 뒤 초임지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몇 개월이 참으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기회였다. 만약 그때 그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깊은 허무와 방황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나에게 책을 주고 성경을 공부하는 모음으로 인도해 준 선생님과 그 모임 사람들이 8월에 서울에서 큰 행사가 있으니 그때 만나자 하였다.
찬양의 노래
새로 부임한 경기도의 학교에는 대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도 근무하고 있어 낯설지 않았다. 새로 부임하자마자 바로 방학이었다. 전의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다들 내게 친절히 대해준 사람들이었다. 8월이 되어 그분들이 큰 행사에 참석하러 서울에 오셨는데, 그들을 만나기 위해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그곳은 계곡이 있고 잔디가 있으며 주변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마치 야영장소 같았다. 주변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에서 무리지어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보이지 않는 질서와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지인들은 모두 반가워하며 행사 기간 동안 함께 지내자고 하였다.
설교 시간마다 참석해 말씀을 들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8월 5일에 저녁 설교를 들고 난 뒤에는 마음이 답답해 상담을 받고자 상담자를 찾아갔다. 그가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편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경 여러 곳을 읽어 보라고 하였다. 이곳 저곳의 성경을 읽던 중 히브리서 9장 27절, 28절 말씀을 읽을 때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무언가가 언뜻 스쳐갔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죽음이 기다리는 이 인생의 끝에는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 받을 그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신다. 죄와 상관없이…. 죄와 상관없이! 가슴 속의 불안과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늦은 밤이었다. 1973년 8월 5일, 내가 두 번째 태어난 날이었다. 이 날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번민과 회의와 허무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가. ‘주님!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기도가 나왔다.
다음날 아침, 하늘과 주변의 나무와 계곡의 물과 새들이 나를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였다. 세상이 아름다워진 것이다. 가족들이 생각났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구원받기 전에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부를 노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즐겁게 부를 노래가 생겨났다. 찬송 테이프를 틀어 놓고 찬송가를 붙들며 찬송가를 배웠다. 내 마음의 찬송은 밤늦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즐거운 노래! 생명의 노래! 찬양의 노래!
구원받기 전에는 몰두할 대상이 없던 나에게, 진정 좋아하고 사랑하고 몰두할 대상이 생겼다. 왜 살아야 하는지의 목적과 목표가 생긴 것이다. 인생의 참된 뜻을 알게 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이 사실을 말하면 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형식적인 제도와 구속을 싫어하던 내가 진정한 교회 생활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구원받은 이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부모님과 갈등도 있었고 그런 갈등에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항상 인도해 주셨듯이, “주님! 오늘도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인생의 허무함으로 점철된 학생 시절
중학교 2학년 때쯤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사람은 왜 살까 하는 생각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허무했다. 열심히 공부해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 졸업한 후에는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산다 한들 결국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노래는 좋아해서 잘 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즐겁고 기쁘게 노래(찬양)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교회에도 다녀보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니와 함께 성경을 마태복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려 여러 번 시도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교회에도 가고 싶었지만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야 하고, 형식적인 의식과 제도 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은 각자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외국 가수에 몰두하여 신문에 난 기사를 열심히 스크랩하는 아이, 야구장에 가서 열광하는 아이, 스케이트장에서 신나게 운동하는 아이, 방과 후엔 자유복을 입고 멋을 내며 남학생을 만나는 아이, 화학 선생님을 좋아해 매일 아침 실험실에 꽃을 꽂아놓는 아이 등. 나도 이런 아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따라다녀 보았다. 친구를 따라 야구장에도 몇 번 가 보았지만 규칙을 모르니 경기가 재미있지도 않았고, 멋있다는 선수를 보아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만 하나도 즐겁거나 기쁘지 않았다.
나는 도서실이나 책방에서 책을 빌려보며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성경도 보고 불경도 읽어 보았지만 둘 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는 열심히 다녔지만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또 한 번에 대학 입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재수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대학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척 언니는 대학에 갈 만한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악착같이 공부하여 대학교에 합격하였고 친척집에서 통학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나중에 집안일 하는 사람을 두면서 잘 살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그런 말을 듣고도 나도 부자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생의 끝은 허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 의식도 없었고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별로 없었다.
나는 남에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학교에서도 출석 잘 하고 수업 잘 듣는 학생일 뿐이었다. 특별히 활발하지도 않았고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클럽 활동도 잘 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시험 기간에 일주일 이상 결석하면서 남해안과 홍도 등지를 여행하는 파격적인 친구도 있었는데, 마음으로는 그 과단성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난 계기
교회와 성당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작은어머니가 다니는 성당에 가 보았다. 웅장한 성당의 모습과 엄숙한 예배 의식에 관심이 생겨 교리 강좌를 들었다. 수녀는 내게 대죄(大罪)와 소죄(小罪)가 있다고 하였다. 그 차이를 물으니 말 그대로 대죄는 큰 죄, 소죄는 작은 죄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큰 죄는 사회적으로 벌을 받고 처리되는 죄지만 작은 죄는 남을 미워한 죄, 거짓말 한 죄, 음란한 생각을 한 죄 등의 양심적인 죄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나는 이러한 양심의 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녀는 이런 작은 죄는 누구에게나 있다며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여기도 완전한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교리 공부는 계속 했고 세례도 받았다. 일요일에는 성당 예배도 보았다. 하지만 고해성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내 양심의 괴로움을 모조리 말하고 신부가 ‘기도서를 몇 번 읽어라’고 처방하는 것으로 양심의 자유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적극적인 친구들의 영향을 받는 편이었다. 교직 과목을 이수하여 교사 자격증을 받았고 친구와 함께 임용시험을 보았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응시했는데 두 곳 모두 합격했고, 먼저 충청도에서 발령이 났다. 2월 25일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3월 1일자로 발령을 받았기에 쉴 사이도 없이 집을 떠나 충청도 제천의 한 중학교로 갔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초년생!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어설프고 순진한 신임인 나에게 선배 선생님들은 친절히 대해 주며 잘 가르쳐 주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일요일이면 성당에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성당에 가야 그간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의 친분으로 구속되는 느낌이 싫어 예배만 보고 빨리 돌아오곤 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당직을 하는 중에 한 선생님이 종교에 관해 질문하며 성당에 왜 가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속으로 ‘저 선생님은 일요일인데 어디 놀러 가거나 운동하거나 하지 않고 왜 학교에 나와 있나’ 하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죄 지은 것을 일요일에 성당에 가서 씻는다고 한다면, 만약 주중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왔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소책자 한 권을 내밀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읽어보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이 깊어서 다시 읽어보며 간직하고 싶은 책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려는데 그 선생님이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하셨다. 뒤따라간 곳은 호롱불을 밝히고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집이었다. 둘러보니 학교 근처에서 밥을 해 주는 가게의 아가씨도 있었다.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그 모습은 무척 정다워 보였고 자연스러웠다.
3월에 발령을 받고 6월까지, 한창 교직 생활에 적응해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던 중 경기도에서 발령이 났다. 일을 시작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막 학생들과도 정이 든 참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접고 1학기를 마친 뒤 초임지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몇 개월이 참으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기회였다. 만약 그때 그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깊은 허무와 방황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나에게 책을 주고 성경을 공부하는 모음으로 인도해 준 선생님과 그 모임 사람들이 8월에 서울에서 큰 행사가 있으니 그때 만나자 하였다.
찬양의 노래
새로 부임한 경기도의 학교에는 대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도 근무하고 있어 낯설지 않았다. 새로 부임하자마자 바로 방학이었다. 전의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다들 내게 친절히 대해준 사람들이었다. 8월이 되어 그분들이 큰 행사에 참석하러 서울에 오셨는데, 그들을 만나기 위해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그곳은 계곡이 있고 잔디가 있으며 주변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마치 야영장소 같았다. 주변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에서 무리지어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보이지 않는 질서와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지인들은 모두 반가워하며 행사 기간 동안 함께 지내자고 하였다.
설교 시간마다 참석해 말씀을 들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8월 5일에 저녁 설교를 들고 난 뒤에는 마음이 답답해 상담을 받고자 상담자를 찾아갔다. 그가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편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경 여러 곳을 읽어 보라고 하였다. 이곳 저곳의 성경을 읽던 중 히브리서 9장 27절, 28절 말씀을 읽을 때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무언가가 언뜻 스쳐갔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죽음이 기다리는 이 인생의 끝에는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 받을 그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신다. 죄와 상관없이…. 죄와 상관없이! 가슴 속의 불안과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늦은 밤이었다. 1973년 8월 5일, 내가 두 번째 태어난 날이었다. 이 날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번민과 회의와 허무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가. ‘주님!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기도가 나왔다.
다음날 아침, 하늘과 주변의 나무와 계곡의 물과 새들이 나를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였다. 세상이 아름다워진 것이다. 가족들이 생각났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구원받기 전에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부를 노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즐겁게 부를 노래가 생겨났다. 찬송 테이프를 틀어 놓고 찬송가를 붙들며 찬송가를 배웠다. 내 마음의 찬송은 밤늦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즐거운 노래! 생명의 노래! 찬양의 노래!
구원받기 전에는 몰두할 대상이 없던 나에게, 진정 좋아하고 사랑하고 몰두할 대상이 생겼다. 왜 살아야 하는지의 목적과 목표가 생긴 것이다. 인생의 참된 뜻을 알게 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이 사실을 말하면 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형식적인 제도와 구속을 싫어하던 내가 진정한 교회 생활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구원받은 이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부모님과 갈등도 있었고 그런 갈등에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항상 인도해 주셨듯이, “주님! 오늘도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