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했던 시절
저는 치과 의사인 동생의 권유로 1975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성경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교회를 다녀본 일도 없고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들리는 말씀 모두가 새로웠고, 또한 당시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내용이며 태도며 목소리가 하도 간절하고 호소하는 듯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 뿐 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겠지만 저 또한 그러하였던 것이, 아담이 결국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으셨을 터인데 어째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느냐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습니다.
또 말씀하실 때는 열심히 들었지만 말씀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면 제 안의 성경 말씀은 어디로 가고, 당시 공부하던 일본어 회화 테이프 듣는 데에 열중했고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어떻다는 등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귀가 쏠리곤 하였습니다. 동생은 휴식 시간에 제가 일본어 테이프 듣는 것을 보고 이런 마당에 일본어 테이프 들을 생각이 나느냐, 죄와 심판에 대해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느냐며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저를 나무랐으나, 저는 무엇이 그리 두렵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서너 번 더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였으나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해 말씀을 듣고 전도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릴 정도로 아는 상태가 되어, 이 말 다음에는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할 것이고 그에 관한 성경 구절은 어떤 구절이라는 것까지 모두 예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거기에서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에 제가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계속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가 심해 위암이나 대장암을 의심하며 몸져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나는 주님께 가면 그만이지만 내 아이들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설교를 들으러 다니기는 했지만 별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저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첫째는 구원받는 것이 두렵다는, 이상한 감정이었습니다. 구원받으면 ‘우리’라는 어떤 틀에 갇혀 마음대로 생활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는데 그것도 꺼림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머리가 단순하고 좀 모자라는 사람이나 쉽게 구원받는 것이지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을 쉽게 받는다는 것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83년도에 판사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를 개업하고부터는 격심한 스트레스와 분주함으로 도저히 성경을 보거나 말씀을 들을 생각도 못하고 지냈습니다. 1987년 말 무렵에 다리를 다쳐 입원한 적이 있는데,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제가 세파 속에서 흙탕물을 튀기며 돌아다니다가 이 꼴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퇴원한 후로는 역시 성경이고 설교 말씀이고 보고 듣는 일 없이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활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동안 들어온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는 습관이 붙게 되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다른 것은 보지 않지만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은 즐겨 봅니다. 그 동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예컨대 곤충 한 마리라도 자기 몸을 숨기기 위해 주변 환경에 기가 막히게 위장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저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저 벌레 한 마리가 어떻게 저리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1:20 참조)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렇게 스스로 적응해 가는 것이 생물의 진화 과정 속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들면서, 제 마음은 이런 저런 혼동 상태의 지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1995년, 저는 당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당치가 300까지 올라갔는데(나중에 오진으로 밝혀졌습니다만) 건강에 관하여 워낙 예민하고 겁이 많은 저는 당시 너무나 당황했고, 이것을 계기로 다시 성경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
이 구절에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라는 말씀에 제가 사로잡혔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은 전에도 여러 번 읽어 보았을 터인데 그때마다 무심코 지나쳤습니다만, 이번에는 잡힌 것입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자연법칙을 지배하고 계신 조물주인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시는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도 하시는구나. 그런데 그분의 하시는 일 중 ‘만물을 붙드시는 일’에 관한 말씀은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누구나 믿고 의심하지 않지만, 똑같이 하시는 일인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에 관한 말씀도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무게 있는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사람이 먹어야 살며, 빛이 있어야 보게 되는 등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진리라고 확실히 알고 있지만, 그 동일한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게 하시고 그것으로 사람의 죄를 사해 놓으신, 죄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고후 4:3-4)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위하여 우리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그래도 사람이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을 가는 것이지, 어떻게 그런 것도 없이 예수만 믿어 천국을 가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간다는 것보다는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을 간다는 것이 우리 육체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확실히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율법을 지켜서 간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율법을 지켜야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율법을 지키려면 완전히 지켜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못 될 것이고, 그래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이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마귀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마귀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사람이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럴듯한 생각을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놓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의롭고 선하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겠지만,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니 율법을 지켜 천국에 갈 수 없음은 분명하였습니다.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계속 들었는데, 이런 생각을 제가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다시 한 번 성경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담이 참으로 믿었다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리가 없지 않았을까요? 말하자면 믿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그 믿지 않은 원죄로 인해 그 원죄에서부터 인간이 살인도 하고 간음도 하고 도적질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음,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제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착하게 살았다 어떻다 하기 전에 우선 제사부터 지낸 것입니다. 사람의 죄는 어떤 생명체의 피로 제사를 지냄으로서만 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벨이 믿고 그렇게 제사를 지냈던 바, 하나님이 아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노아 때까지는 비가 내린 사실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을 노아가 믿고 행하였던 바,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 육신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도 없는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 고 약속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자손에게 하나님의 유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로부터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430년 후에 생긴 율법으로 말미암아 폐하여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올 때 율법 자체는 영광된 것이므로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어차피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그 없어질 영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출 34장 참조) 그런데 우리 마음이 완고하여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후 3:13-14 참조)
또한 갈라디아서 4장에는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로 낳은 이스마엘과 아내인 사라에게서 약속으로 낳은 이삭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 것에 대해 성경은,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하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29-30절 참조)
요컨대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따라서 믿음이 먼저이며 그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말씀 전체가 온통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갈 3:10) 는 말씀이나,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는 말씀들에서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는(그렇게 완전무결하게 살 수만 있다면 되겠지만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천국에 가야지, 어떻게 그런 것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것은 바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믿음
그 다음으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위하여 우리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바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받지 않고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성경에 온통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쓰여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 그분이 하나님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2-3)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은 요한이서 7절에도 되풀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저는 여기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육체를 쓰고 이 땅에 오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믿지 못하는 점인데, 못 믿게 하는 마음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만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만큼 쉽게 믿기 힘든 사실이어서 성경에서 자꾸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그 사실이 쉽사리 믿어지기 어려운 사실임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인간의 육체를 쓰고 오실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셔도 다시 살아나실 분인데 그분이 돌아가시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속된 말로 깜짝쇼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그분이 겪은 고통이 바로 사랑의 표시가 아닐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 못이나 창에 찔릴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생명체는 사람의 육체가 아니었을까? 그분이 사람의 육체로 오셔서 못이나 창에 찔려 돌아가셨어야 그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 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쓰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제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저를 잡아끌었던 성경 말씀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는 말씀이나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고전 15:54) 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결국 이기기 위해 세상을 삽니다. 공부도 이기기 위해서 하고, 돈도 이기기 위해서 벌고, 이기기 위해 권력도 잡고 명예도 추구합니다. 결국 이기는 사람이 그런 것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이긴다는 것은 우리와 대적하는 자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우리와 대적하는 최후의 가장 무서운 대적자는 마귀입니다. 이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이기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주먹으로 마귀를 때려 넘어뜨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이러한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면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가 된다는 사실이 비로소 제 안에서 온전히 이해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했던 시절
저는 치과 의사인 동생의 권유로 1975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성경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교회를 다녀본 일도 없고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들리는 말씀 모두가 새로웠고, 또한 당시 권신찬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내용이며 태도며 목소리가 하도 간절하고 호소하는 듯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 뿐 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겠지만 저 또한 그러하였던 것이, 아담이 결국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으셨을 터인데 어째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느냐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습니다.
또 말씀하실 때는 열심히 들었지만 말씀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면 제 안의 성경 말씀은 어디로 가고, 당시 공부하던 일본어 회화 테이프 듣는 데에 열중했고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어떻다는 등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귀가 쏠리곤 하였습니다. 동생은 휴식 시간에 제가 일본어 테이프 듣는 것을 보고 이런 마당에 일본어 테이프 들을 생각이 나느냐, 죄와 심판에 대해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느냐며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저를 나무랐으나, 저는 무엇이 그리 두렵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서너 번 더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였으나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해 말씀을 듣고 전도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릴 정도로 아는 상태가 되어, 이 말 다음에는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할 것이고 그에 관한 성경 구절은 어떤 구절이라는 것까지 모두 예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거기에서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에 제가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계속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가 심해 위암이나 대장암을 의심하며 몸져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나는 주님께 가면 그만이지만 내 아이들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설교를 들으러 다니기는 했지만 별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저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첫째는 구원받는 것이 두렵다는, 이상한 감정이었습니다. 구원받으면 ‘우리’라는 어떤 틀에 갇혀 마음대로 생활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는데 그것도 꺼림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머리가 단순하고 좀 모자라는 사람이나 쉽게 구원받는 것이지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을 쉽게 받는다는 것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83년도에 판사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를 개업하고부터는 격심한 스트레스와 분주함으로 도저히 성경을 보거나 말씀을 들을 생각도 못하고 지냈습니다. 1987년 말 무렵에 다리를 다쳐 입원한 적이 있는데,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제가 세파 속에서 흙탕물을 튀기며 돌아다니다가 이 꼴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퇴원한 후로는 역시 성경이고 설교 말씀이고 보고 듣는 일 없이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활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동안 들어온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는 습관이 붙게 되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다른 것은 보지 않지만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은 즐겨 봅니다. 그 동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예컨대 곤충 한 마리라도 자기 몸을 숨기기 위해 주변 환경에 기가 막히게 위장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저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저 벌레 한 마리가 어떻게 저리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1:20 참조)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렇게 스스로 적응해 가는 것이 생물의 진화 과정 속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들면서, 제 마음은 이런 저런 혼동 상태의 지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1995년, 저는 당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당치가 300까지 올라갔는데(나중에 오진으로 밝혀졌습니다만) 건강에 관하여 워낙 예민하고 겁이 많은 저는 당시 너무나 당황했고, 이것을 계기로 다시 성경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
이 구절에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라는 말씀에 제가 사로잡혔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은 전에도 여러 번 읽어 보았을 터인데 그때마다 무심코 지나쳤습니다만, 이번에는 잡힌 것입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자연법칙을 지배하고 계신 조물주인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시는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도 하시는구나. 그런데 그분의 하시는 일 중 ‘만물을 붙드시는 일’에 관한 말씀은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누구나 믿고 의심하지 않지만, 똑같이 하시는 일인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에 관한 말씀도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무게 있는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사람이 먹어야 살며, 빛이 있어야 보게 되는 등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진리라고 확실히 알고 있지만, 그 동일한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게 하시고 그것으로 사람의 죄를 사해 놓으신, 죄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고후 4:3-4)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위하여 우리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그래도 사람이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을 가는 것이지, 어떻게 그런 것도 없이 예수만 믿어 천국을 가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간다는 것보다는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을 간다는 것이 우리 육체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확실히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율법을 지켜서 간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율법을 지켜야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율법을 지키려면 완전히 지켜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못 될 것이고, 그래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이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마귀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마귀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사람이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럴듯한 생각을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놓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의롭고 선하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겠지만,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니 율법을 지켜 천국에 갈 수 없음은 분명하였습니다.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계속 들었는데, 이런 생각을 제가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다시 한 번 성경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담이 참으로 믿었다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리가 없지 않았을까요? 말하자면 믿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그 믿지 않은 원죄로 인해 그 원죄에서부터 인간이 살인도 하고 간음도 하고 도적질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음,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제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착하게 살았다 어떻다 하기 전에 우선 제사부터 지낸 것입니다. 사람의 죄는 어떤 생명체의 피로 제사를 지냄으로서만 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벨이 믿고 그렇게 제사를 지냈던 바, 하나님이 아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노아 때까지는 비가 내린 사실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을 노아가 믿고 행하였던 바,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 육신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도 없는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 고 약속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자손에게 하나님의 유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로부터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430년 후에 생긴 율법으로 말미암아 폐하여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올 때 율법 자체는 영광된 것이므로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어차피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그 없어질 영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출 34장 참조) 그런데 우리 마음이 완고하여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후 3:13-14 참조)
또한 갈라디아서 4장에는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로 낳은 이스마엘과 아내인 사라에게서 약속으로 낳은 이삭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 것에 대해 성경은,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하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29-30절 참조)
요컨대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따라서 믿음이 먼저이며 그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말씀 전체가 온통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갈 3:10) 는 말씀이나,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는 말씀들에서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는(그렇게 완전무결하게 살 수만 있다면 되겠지만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천국에 가야지, 어떻게 그런 것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것은 바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믿음
그 다음으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위하여 우리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는 바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받지 않고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성경에 온통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쓰여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 그분이 하나님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2-3)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은 요한이서 7절에도 되풀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저는 여기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육체를 쓰고 이 땅에 오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믿지 못하는 점인데, 못 믿게 하는 마음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만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만큼 쉽게 믿기 힘든 사실이어서 성경에서 자꾸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그 사실이 쉽사리 믿어지기 어려운 사실임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인간의 육체를 쓰고 오실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셔도 다시 살아나실 분인데 그분이 돌아가시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속된 말로 깜짝쇼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그분이 겪은 고통이 바로 사랑의 표시가 아닐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 못이나 창에 찔릴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생명체는 사람의 육체가 아니었을까? 그분이 사람의 육체로 오셔서 못이나 창에 찔려 돌아가셨어야 그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 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쓰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제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저를 잡아끌었던 성경 말씀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는 말씀이나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고전 15:54) 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결국 이기기 위해 세상을 삽니다. 공부도 이기기 위해서 하고, 돈도 이기기 위해서 벌고, 이기기 위해 권력도 잡고 명예도 추구합니다. 결국 이기는 사람이 그런 것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이긴다는 것은 우리와 대적하는 자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우리와 대적하는 최후의 가장 무서운 대적자는 마귀입니다. 이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이기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주먹으로 마귀를 때려 넘어뜨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이러한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면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가 된다는 사실이 비로소 제 안에서 온전히 이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