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어린 시절
저는 경북 의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1남 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와 띠동갑인 큰 언니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고, 여덟 살 많은 3대 독자인 오빠와 두 살 위의 언니,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2대 독자로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신 아버지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셨습니다. 한문과 같은 학문에는 능하셨지만 바깥 활동은 일체 하지 않으셨고, 농사일에도 전혀 소질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거나 편지를 써 주며 소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 소득도 없이 집안에만 계시는 아버지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사이의 불화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떠나 충청도 어디에선가 따로 생활하셨고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오셨는데, 다시 가시는 날에는 온 집안을 쭉 둘러보시고 어린 저희들에게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며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떠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던 것이 어렸을 때 기억의 전부입니다.
철이 들면서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사춘기였던 오빠는 그런 환경을 비관하였나 봅니다. 여름날의 길고 긴 낮에는 방에 누워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갖 치장을 하고는 밖으로 돌았습니다. 오빠의 그런 생활이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지면서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서로 죽느니 사느니 하는 치열한 다툼으로 번져갔습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으로 양잿물을 마시기도 했고 저수지에도 몇 차례나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에게는 그나마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하교 시간만 되면 가슴이 쿵덕거렸고, 집이 가까워질수록 증세는 심해져 집 앞에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지붕과 담장을 확인하는 버릇(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지붕에 옷을 올리고 담 위에 신발을 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이 생겼을 정도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염세주의적 기질이 강한 바로 위 언니까지 이상한 행동만 했습니다. 저의 생일은 공교롭게도 언니와 같은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언니는 생일만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을 원망하면서 그릇 중에 제일 찌그러지고 낡은 양은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저녁이면 죽을 끓여서 함께 먹자고 했습니다. 생일이 되면 오래 살자는 의미로 국수를 먹던 풍습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에는 저와 동생 둘을 불러놓고 큰 바늘을 가지고 와서 숨골을 찔러 모두 같이 죽자고 한 적도 있었고, 항상 교복 주머니에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등 언니는 죽을 궁리만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욕심이 많았던 저는 하루라도 빨리 커서 이 집을 벗어나 스스로 돈을 벌어서 서울대에도 가고 좋은 직장도 얻는 등, 출세를 하여 잘 살고 싶었지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언니의 인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언니는 경산에 있는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회사 기숙사에 들어갔고, 그 1년 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언니는 휴가나 명절 때 집에 오면, 돌아가신 아버지께 쓴 그간의 편지들을 모아 불에 태우고 재를 하늘로 올려 보내면서 울다가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1973년 5월의 어느 날, 저는 언니가 보낸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성경의 전도서를 인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이제 언니가 죽으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왠지 싫었습니다. 제 느낌에는 언니가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편지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계속되었는데, 이제는 저에게 자신이 다니는 회사로 일하러 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예전에 언니는, 제가 언니가 다니는 곳에 가서 2년만 돈을 벌겠다고 해도 동생까지 공장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며 절대로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 삶의 목적은 오로지 서울대에 진학하고 출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만 졸업한 상태였지만 공부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고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제게는 대학에 들어갈 돈을 모으는 것이 급했습니다. 그런 와중이었던지라 언니의 취직 제안은 저의 계획과도 맞아떨어졌고 언니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려는 언니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입사를 했던 것입니다.
입사 후, 저의 예상대로 언니는 검고 두꺼운 성경이란 책을 가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게 찾아와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언니는 주로 전도서를 펴놓고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했는데 저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은 언니처럼 비정상적인 사람만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단정지었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따라가 설교가 끝날 때까지 졸다가 돌아오곤 했고, 언니의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자 언니는 “짐승처럼 먹고 자고 일하다가 죽어서 지옥에나 가라!”고 저를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저를 어떤 언니에게로 데리고 갔는데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언니의 첫 마디가 “너 예수 믿을래?”였습니다. 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예수가 누군데요?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그 예수를 말하는 거예요?”라고 말했고, 그 언니는 웃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다 같은 사람일 뿐인데, 예수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같은 사람끼리 믿고 말고 할 것이 있나요?”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 언니는 그래도 웃기만 하더니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면 믿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고 안 믿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믿어져야 믿지요.”라고 했더니 그 언니는 손뼉을 치며 “너 참 똑똑하다.”라고 말하고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종종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가고는 했습니다. 저는 맨 뒤에 앉아서 잠만 잤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언니에게서 “지옥에나 가라.”는 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증거
그러던 10월의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갔습니다. 실컷 졸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50분이었습니다. 11시에 시작한 설교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서 ‘이 목사님 참 열정적이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3시간 가까이 졸다 일어나니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았고, 처음으로 설교 내용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설교는 그 해 일어났던 중동 전쟁(1973년 10월)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시사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뉴스에서 중얼중얼 기도를 하며 전투를 치르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교회 설교 시간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설교 내용은 1972년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해서 독일 올림픽을 중단시킨 사건과 국제 사회에서 미움을 받는 이스라엘 이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쟁들은 세상 끝날 때까지 하나님이 아니면 말릴 자가 없다고 하면서,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예수라는 분이 나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급해진 저는 이 성경이 사실인지부터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덜컹거리는 버스의 흔들림에도 겁이 났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분명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매일 말하던 그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마음속에는 답답함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제발 성경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다는 말씀이나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을 설명하신 말씀, 로마서 1장 20절, 욥기 26장 7절, 28장 5절, 38장 이후의 말씀들 앞에 성경이 사실이라고 인정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구원을 너무나도 갈망했던 나머지 스스로 믿고자 애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몰라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구원받은 줄 알고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아니었고 자존심이 강했던 저는 그 사실을 주위에 털어놓지 못한 채 9개월이라는 시간을 괴로워하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인 1974년 7월, 하계 휴가 기간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휴가를 당번제로 실시하고 있었는데, 제 차례가 다가와도 괴로운 마음은 심해졌고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는 휴가를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가 기간에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 도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불이익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휴가를 갈 수 없었습니다.
휴가를 이틀 앞두고부터는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더는 이 상태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퇴근 후 같은 기숙사의 한 언니를 찾아가서 이제껏 내 구원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던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놓아버린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도집회가 따로 없었고 일 년에 한 번씩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성경책을 들고 기숙사 비상구 계단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와 같이 비장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계단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가까이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가로등 불빛 아래로 가서까지 구원을 찾고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기력이 없었습니다. 성경도 덮은 채 ‘이제는 정말 안 되나 보다.’ 하고 엎드려 울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저의 죄를 사해주셨다고 하셨으니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분을 믿지 못했던 죄까지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구원받았습니다. 그때가 1974년 7월 10일 저녁 8시 45분경이었습니다.
불안한 어린 시절
저는 경북 의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1남 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와 띠동갑인 큰 언니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고, 여덟 살 많은 3대 독자인 오빠와 두 살 위의 언니,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2대 독자로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신 아버지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셨습니다. 한문과 같은 학문에는 능하셨지만 바깥 활동은 일체 하지 않으셨고, 농사일에도 전혀 소질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거나 편지를 써 주며 소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 소득도 없이 집안에만 계시는 아버지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사이의 불화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떠나 충청도 어디에선가 따로 생활하셨고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오셨는데, 다시 가시는 날에는 온 집안을 쭉 둘러보시고 어린 저희들에게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며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떠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던 것이 어렸을 때 기억의 전부입니다.
철이 들면서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사춘기였던 오빠는 그런 환경을 비관하였나 봅니다. 여름날의 길고 긴 낮에는 방에 누워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갖 치장을 하고는 밖으로 돌았습니다. 오빠의 그런 생활이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지면서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서로 죽느니 사느니 하는 치열한 다툼으로 번져갔습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으로 양잿물을 마시기도 했고 저수지에도 몇 차례나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에게는 그나마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하교 시간만 되면 가슴이 쿵덕거렸고, 집이 가까워질수록 증세는 심해져 집 앞에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지붕과 담장을 확인하는 버릇(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지붕에 옷을 올리고 담 위에 신발을 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이 생겼을 정도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염세주의적 기질이 강한 바로 위 언니까지 이상한 행동만 했습니다. 저의 생일은 공교롭게도 언니와 같은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언니는 생일만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을 원망하면서 그릇 중에 제일 찌그러지고 낡은 양은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저녁이면 죽을 끓여서 함께 먹자고 했습니다. 생일이 되면 오래 살자는 의미로 국수를 먹던 풍습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에는 저와 동생 둘을 불러놓고 큰 바늘을 가지고 와서 숨골을 찔러 모두 같이 죽자고 한 적도 있었고, 항상 교복 주머니에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등 언니는 죽을 궁리만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욕심이 많았던 저는 하루라도 빨리 커서 이 집을 벗어나 스스로 돈을 벌어서 서울대에도 가고 좋은 직장도 얻는 등, 출세를 하여 잘 살고 싶었지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언니의 인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언니는 경산에 있는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회사 기숙사에 들어갔고, 그 1년 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언니는 휴가나 명절 때 집에 오면, 돌아가신 아버지께 쓴 그간의 편지들을 모아 불에 태우고 재를 하늘로 올려 보내면서 울다가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1973년 5월의 어느 날, 저는 언니가 보낸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성경의 전도서를 인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그 당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이제 언니가 죽으려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왠지 싫었습니다. 제 느낌에는 언니가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편지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계속되었는데, 이제는 저에게 자신이 다니는 회사로 일하러 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예전에 언니는, 제가 언니가 다니는 곳에 가서 2년만 돈을 벌겠다고 해도 동생까지 공장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며 절대로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 삶의 목적은 오로지 서울대에 진학하고 출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만 졸업한 상태였지만 공부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고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제게는 대학에 들어갈 돈을 모으는 것이 급했습니다. 그런 와중이었던지라 언니의 취직 제안은 저의 계획과도 맞아떨어졌고 언니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려는 언니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입사를 했던 것입니다.
입사 후, 저의 예상대로 언니는 검고 두꺼운 성경이란 책을 가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게 찾아와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언니는 주로 전도서를 펴놓고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했는데 저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은 언니처럼 비정상적인 사람만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단정지었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따라가 설교가 끝날 때까지 졸다가 돌아오곤 했고, 언니의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자 언니는 “짐승처럼 먹고 자고 일하다가 죽어서 지옥에나 가라!”고 저를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저를 어떤 언니에게로 데리고 갔는데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언니의 첫 마디가 “너 예수 믿을래?”였습니다. 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예수가 누군데요?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그 예수를 말하는 거예요?”라고 말했고, 그 언니는 웃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다 같은 사람일 뿐인데, 예수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같은 사람끼리 믿고 말고 할 것이 있나요?”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 언니는 그래도 웃기만 하더니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면 믿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고 안 믿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믿어져야 믿지요.”라고 했더니 그 언니는 손뼉을 치며 “너 참 똑똑하다.”라고 말하고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종종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가고는 했습니다. 저는 맨 뒤에 앉아서 잠만 잤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언니에게서 “지옥에나 가라.”는 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증거
그러던 10월의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갔습니다. 실컷 졸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50분이었습니다. 11시에 시작한 설교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서 ‘이 목사님 참 열정적이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3시간 가까이 졸다 일어나니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았고, 처음으로 설교 내용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설교는 그 해 일어났던 중동 전쟁(1973년 10월)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시사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뉴스에서 중얼중얼 기도를 하며 전투를 치르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교회 설교 시간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설교 내용은 1972년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해서 독일 올림픽을 중단시킨 사건과 국제 사회에서 미움을 받는 이스라엘 이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쟁들은 세상 끝날 때까지 하나님이 아니면 말릴 자가 없다고 하면서,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예수라는 분이 나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급해진 저는 이 성경이 사실인지부터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덜컹거리는 버스의 흔들림에도 겁이 났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분명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언니가 매일 말하던 그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마음속에는 답답함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제발 성경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다는 말씀이나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을 설명하신 말씀, 로마서 1장 20절, 욥기 26장 7절, 28장 5절, 38장 이후의 말씀들 앞에 성경이 사실이라고 인정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구원을 너무나도 갈망했던 나머지 스스로 믿고자 애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몰라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구원받은 줄 알고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아니었고 자존심이 강했던 저는 그 사실을 주위에 털어놓지 못한 채 9개월이라는 시간을 괴로워하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인 1974년 7월, 하계 휴가 기간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휴가를 당번제로 실시하고 있었는데, 제 차례가 다가와도 괴로운 마음은 심해졌고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는 휴가를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가 기간에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 도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불이익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휴가를 갈 수 없었습니다.
휴가를 이틀 앞두고부터는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더는 이 상태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퇴근 후 같은 기숙사의 한 언니를 찾아가서 이제껏 내 구원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던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놓아버린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도집회가 따로 없었고 일 년에 한 번씩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성경책을 들고 기숙사 비상구 계단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와 같이 비장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계단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가까이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가로등 불빛 아래로 가서까지 구원을 찾고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기력이 없었습니다. 성경도 덮은 채 ‘이제는 정말 안 되나 보다.’ 하고 엎드려 울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저의 죄를 사해주셨다고 하셨으니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분을 믿지 못했던 죄까지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구원받았습니다. 그때가 1974년 7월 10일 저녁 8시 45분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