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충남 예산에서 1973년 8월 여름의 끝자락에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불교에 열심이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도 어렸을 때부터 절에 다니며 불교인으로 자랐습니다. 또한 저희 집은 유교 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집안이라 고조부 대까지 제사를 지내며 한 달에 거의 한두 번은 친척들의 제사로 큰댁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누가 먼저 숭늉을 차지하느냐가 어린 우리들에게는 불꽃 튀는 경쟁이었는데, 제사 지낸 숭늉을 마시면 무서움을 없애준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불교와 유교는 같은 종교도 아니고, 오히려 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며 유교에 의해 불교가 배척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우리 집안은 그런 구별 없이 불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유교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정말 힘든 우상종합세트종교 가정이었던 셈이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 4학년쯤이었던 때로 기억하는데, 부모님과 함께 어느 먼 사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 주지는 전생과 점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저의 전생이 스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당시 들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생각나는데, 은근히 뿌듯하면서도 ‘왜 하필 결혼도 못해 본 스님이었을까? 금생에도 스님이 되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랫동안 저를 불교에 꽤 열심인 신자로 꽁꽁 묶어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색이 전생에 스님이었다는데 설렁설렁한 불교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일요일이면 예불을 보러 절에 다니는 것은 당연했고, 사월초파일 연등 행사 때는 목탁을 치며 맨 앞에서 학생회를 이끌었고 불경독송 대회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방학 때는 참석한 수련회에서 밤새도록 부처상 앞에서 3천배를 수행하였고 수련회가 끝날 때는 향불로 팔뚝을 지지면서 받는 법명(천주교의 세례명 같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를 거치면서 그러한 종교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고, 특히 가을이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전함과 영원에 대한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벗 삼아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래도 불교사상으로 똘똘 뭉친 저에게 다른 종교는 바늘만큼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잠시 틈을 허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가정에 복음이 처음 들어오기 2년 전, 저의 형이 먼저 구원받고 저에게 성경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인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주 잠시였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제게 충격을 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가끔씩 하나님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번은 세계 지도를 펼쳐 보이시더니, “원래 지구의 땅은 하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찢어놓으셨다. 그래서 대륙들을 이어 붙이면 딱 들어맞는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실제로 지도를 들여다보고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대륙이동설을 배우면서 애써 자연현상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이 사건은 제게 처음으로 불교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당시 대전에 있던 형이 지금은 형수님이 되신 분과 교제 중이었는데 1년여 동안의 종교 싸움 끝에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저는,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려는 형의 첫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에 들어오려던 복음은 부처와 제사라는 엄청난 벽에 부딪쳤고, 사실 그 벽은 저보다는 부모님에게 더욱 높았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변해버린 형이, 그것도 집안의 제사를 책임질 장남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화가 났고, 종교 문제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형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시면서 저희 가정은 캄캄한 암흑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회복이 어렵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였고 우리들은 종교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와 저는 부처님에게, 구원받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형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았다며 아버지는 확실히 일어나실 것이니 안심하라고 우리를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이나 우리나 모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반면 의사도 아닌 형은 평온하게 변하여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은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기도의 대상이 나뉘면 안 되지 않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하여, 그때부터 비록 형식상일 뿐이지만 우리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부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다음날 전혀 다른 대상인 하나님께 기도하려니 무척 어색했지만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기독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큰 고비와 어려움은 있었지만 형의 믿음대로 아버지는 의사들도 놀랄 만한 회복력을 보이셨고 몇 개월 후 퇴원하시면서 차츰 일상생활로 돌아오셨습니다. 형에게는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하게 된 큰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형은 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실 때는 24시간 내내 아버지의 간병을 하느라, 그리고 그 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제대로 교제에 동참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이 처음 몇 년을 교제도 없이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 나머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역부족인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의 열심을 닮아서인지, 저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기독교에도 열심을 내었습니다. 대학 진학 후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서 활동하며 성경 공부도 하고 교회도 다니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휴가 나온 형과 만날 때는 늘 충돌이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어렵게 기독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종교생활’을 하지 마라, 확실히 구원받아야 한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형의 질문들 때문에 저는 형을 이상하게 보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형과는 신앙의 선을 확실하게 구분지었습니다. 하지만 제 속에서 일어나는, 형과 같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양심의 소리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가는 동안, 형은 처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여자분과 헤어지게 되었고 교제도 없이 생활하여 더욱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 어머니께서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구원받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게 되자 형은 더욱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막연했던 우리들과 달리 어머니의 사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형의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집에 오면 괴로움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세상 친구들과 밖으로만 다녔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형은, 지금도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립니다. 형은 그 후 말씀과 교제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헤어졌던 여자분과도 다시 만나면서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이번에는 제가 군대에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몇 년 전과 같은 증상으로 또다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일은 그때까지도 복음에 완고하던 누나의 마음을 무너뜨렸고, 누나는 지금의 형수님과 함께 <성경은 사실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본 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군에서 그 소식을 들은 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나는 기독교로 개종만 했지 종교적이지 못했고 저는 나름 열심인 기독교인이었기에,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면 누나보다는 내가 먼저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뜻밖인 누나의 구원은 제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몇 달 후 제가 제대하자마자 형과 누나는 여름 성경탐구모임에 저를 참석시켰는데,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확신이 생기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경탐구모임의 막바지가 되어서도 제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어렵지도 않았고 제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바랐던 것도 아닌데 말씀을 들을수록 제 양심은 마치 깨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점점 더 단단해져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이 제가 죄인임을 알려주는데도 괴로워지지 않는 양심은 화인이라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수학공식처럼, 죄를 인식하여 양심이 괴롭고 구원받게 된다는 제 나름대로의 공식이 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마지막 설교가 끝이 났을 때 제 마음은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상태가 되었고 개인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상담해 주시는 분은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말씀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역사를 이야기하다, 세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세 명 다 피는 발랐는데, 피를 발라놓고 몹시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낸 사람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의심하며 밤을 지새운 사람과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피 바르라니까 발라놓고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설명하신 후, 저에게 이 세 사람 중에서 아침이 되었을 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은 어느 집이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세 집 다지요!!!!”
저 스스로 대답을 하면서, 그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는구나!’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13)
몇 개월 후 형은 결혼을 하였고 형수님까지 총 네 명이 구원받은 우리 집은 교제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쓰러지셨던 아버지는 뇌수술을 하신 후 회복하시기는 했지만 예전만큼의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하시고 생각이 어린아이처럼 되셔서 복음을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옮기는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병자를 고치셨다는 누가복음 5장 내용에 힘을 얻었고, 아버지는 상담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셔서 힘들어 하셨지만 병상에 누워 계실 때 <꿈 같은 사랑>을 읽어드리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시면서 좋아하고는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손주 한 명도 못 보고 돌아가신 것이 육신적으로는 매우 안타깝지만 아버지께서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고 10년이 흐른 지금, 일곱 명의 손주들이 세상의 한 부분을 채우며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주님의 생명이 심길 날을 소망하며 말씀과 교제에 몸과 마음을 맡겨봅니다.
저는 충남 예산에서 1973년 8월 여름의 끝자락에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불교에 열심이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도 어렸을 때부터 절에 다니며 불교인으로 자랐습니다. 또한 저희 집은 유교 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집안이라 고조부 대까지 제사를 지내며 한 달에 거의 한두 번은 친척들의 제사로 큰댁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누가 먼저 숭늉을 차지하느냐가 어린 우리들에게는 불꽃 튀는 경쟁이었는데, 제사 지낸 숭늉을 마시면 무서움을 없애준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불교와 유교는 같은 종교도 아니고, 오히려 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며 유교에 의해 불교가 배척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우리 집안은 그런 구별 없이 불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유교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정말 힘든 우상종합세트종교 가정이었던 셈이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 4학년쯤이었던 때로 기억하는데, 부모님과 함께 어느 먼 사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 주지는 전생과 점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저의 전생이 스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당시 들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생각나는데, 은근히 뿌듯하면서도 ‘왜 하필 결혼도 못해 본 스님이었을까? 금생에도 스님이 되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랫동안 저를 불교에 꽤 열심인 신자로 꽁꽁 묶어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색이 전생에 스님이었다는데 설렁설렁한 불교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일요일이면 예불을 보러 절에 다니는 것은 당연했고, 사월초파일 연등 행사 때는 목탁을 치며 맨 앞에서 학생회를 이끌었고 불경독송 대회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방학 때는 참석한 수련회에서 밤새도록 부처상 앞에서 3천배를 수행하였고 수련회가 끝날 때는 향불로 팔뚝을 지지면서 받는 법명(천주교의 세례명 같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를 거치면서 그러한 종교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고, 특히 가을이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전함과 영원에 대한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벗 삼아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래도 불교사상으로 똘똘 뭉친 저에게 다른 종교는 바늘만큼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잠시 틈을 허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가정에 복음이 처음 들어오기 2년 전, 저의 형이 먼저 구원받고 저에게 성경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인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주 잠시였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제게 충격을 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가끔씩 하나님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번은 세계 지도를 펼쳐 보이시더니, “원래 지구의 땅은 하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찢어놓으셨다. 그래서 대륙들을 이어 붙이면 딱 들어맞는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실제로 지도를 들여다보고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대륙이동설을 배우면서 애써 자연현상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이 사건은 제게 처음으로 불교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당시 대전에 있던 형이 지금은 형수님이 되신 분과 교제 중이었는데 1년여 동안의 종교 싸움 끝에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저는,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려는 형의 첫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에 들어오려던 복음은 부처와 제사라는 엄청난 벽에 부딪쳤고, 사실 그 벽은 저보다는 부모님에게 더욱 높았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변해버린 형이, 그것도 집안의 제사를 책임질 장남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화가 났고, 종교 문제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형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시면서 저희 가정은 캄캄한 암흑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회복이 어렵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였고 우리들은 종교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와 저는 부처님에게, 구원받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형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았다며 아버지는 확실히 일어나실 것이니 안심하라고 우리를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이나 우리나 모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반면 의사도 아닌 형은 평온하게 변하여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은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기도의 대상이 나뉘면 안 되지 않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하여, 그때부터 비록 형식상일 뿐이지만 우리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부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다음날 전혀 다른 대상인 하나님께 기도하려니 무척 어색했지만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기독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큰 고비와 어려움은 있었지만 형의 믿음대로 아버지는 의사들도 놀랄 만한 회복력을 보이셨고 몇 개월 후 퇴원하시면서 차츰 일상생활로 돌아오셨습니다. 형에게는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하게 된 큰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형은 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실 때는 24시간 내내 아버지의 간병을 하느라, 그리고 그 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제대로 교제에 동참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이 처음 몇 년을 교제도 없이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 나머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역부족인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의 열심을 닮아서인지, 저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기독교에도 열심을 내었습니다. 대학 진학 후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서 활동하며 성경 공부도 하고 교회도 다니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휴가 나온 형과 만날 때는 늘 충돌이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어렵게 기독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종교생활’을 하지 마라, 확실히 구원받아야 한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형의 질문들 때문에 저는 형을 이상하게 보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형과는 신앙의 선을 확실하게 구분지었습니다. 하지만 제 속에서 일어나는, 형과 같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양심의 소리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가는 동안, 형은 처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여자분과 헤어지게 되었고 교제도 없이 생활하여 더욱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 어머니께서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구원받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게 되자 형은 더욱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막연했던 우리들과 달리 어머니의 사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형의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집에 오면 괴로움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세상 친구들과 밖으로만 다녔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형은, 지금도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립니다. 형은 그 후 말씀과 교제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헤어졌던 여자분과도 다시 만나면서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이번에는 제가 군대에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몇 년 전과 같은 증상으로 또다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일은 그때까지도 복음에 완고하던 누나의 마음을 무너뜨렸고, 누나는 지금의 형수님과 함께 <성경은 사실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본 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군에서 그 소식을 들은 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나는 기독교로 개종만 했지 종교적이지 못했고 저는 나름 열심인 기독교인이었기에,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면 누나보다는 내가 먼저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뜻밖인 누나의 구원은 제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몇 달 후 제가 제대하자마자 형과 누나는 여름 성경탐구모임에 저를 참석시켰는데,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확신이 생기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경탐구모임의 막바지가 되어서도 제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어렵지도 않았고 제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바랐던 것도 아닌데 말씀을 들을수록 제 양심은 마치 깨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점점 더 단단해져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이 제가 죄인임을 알려주는데도 괴로워지지 않는 양심은 화인이라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수학공식처럼, 죄를 인식하여 양심이 괴롭고 구원받게 된다는 제 나름대로의 공식이 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마지막 설교가 끝이 났을 때 제 마음은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상태가 되었고 개인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상담해 주시는 분은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말씀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역사를 이야기하다, 세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세 명 다 피는 발랐는데, 피를 발라놓고 몹시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낸 사람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의심하며 밤을 지새운 사람과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피 바르라니까 발라놓고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설명하신 후, 저에게 이 세 사람 중에서 아침이 되었을 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은 어느 집이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세 집 다지요!!!!”
저 스스로 대답을 하면서, 그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는구나!’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13)
몇 개월 후 형은 결혼을 하였고 형수님까지 총 네 명이 구원받은 우리 집은 교제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쓰러지셨던 아버지는 뇌수술을 하신 후 회복하시기는 했지만 예전만큼의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하시고 생각이 어린아이처럼 되셔서 복음을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옮기는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병자를 고치셨다는 누가복음 5장 내용에 힘을 얻었고, 아버지는 상담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셔서 힘들어 하셨지만 병상에 누워 계실 때 <꿈 같은 사랑>을 읽어드리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시면서 좋아하고는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손주 한 명도 못 보고 돌아가신 것이 육신적으로는 매우 안타깝지만 아버지께서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고 10년이 흐른 지금, 일곱 명의 손주들이 세상의 한 부분을 채우며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주님의 생명이 심길 날을 소망하며 말씀과 교제에 몸과 마음을 맡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