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하나님 안에서 참된 교사가 되게 해 주세요


저는 올해 31살 된, 비슷한 상황에 있는 친구들이 그러하겠지만 하늘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게 된 사람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먼저 구원받으시고 이어서 어머니도 구원받으셨습니다. 두 분은 형제자매들이 모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고 어린 저 역시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뛰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배고프면 형, 동생들과 함께 배 밭에 들어가 배를 따먹고, 더우면 웅덩이에 가서 수영하는 등 주변의 모든 것들이 놀이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뛰놀며 아무 걱정 없이 해맑았던 그때가 제일 마음 편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던 꼬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종종 걸음으로 4, 50여 분을 걸어 등교했던 1학년 시절, 시골에 홀로 계시는 할아버지를 모시며 전도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저희 가족은 시골집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전도로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삼촌, 고모들까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셨고 행복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역할이 다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주님의 도구로 다 쓰셨던 것일까요? 제가 8살이 되던 1987년, 무서울 정도로 따스했던 어느 봄날에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주님의 품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동안 저를 보살펴주시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내 편인, 친구이고 가장이며 아버지였던 분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하셨던 어머니는 건강식품 상담원을 시작하셨고, 8살 된 아들을 집에 두고 건강식품이 든 무거운 박스를 들고서 이곳저곳을 다니셨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때부터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위해 저는 남편이며, 가장이며, 아들로서의 역할을 하려 했고 이는 같은 나이의 또래 친구들에 비해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저를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혹시나 어머니에게 큰일이 나지는 않을까 싶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대리점에 전화해서 어머니가 계시는지 물었고, 그래서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시는 어르신들은 저를 보면 놀리곤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저 자신은 밤을 지독히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여름에는 성경탐구모임, 겨울에는 전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부모형제 간이라도 영을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며 꼬박꼬박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어머니는 항상 제게 “너 구원받았니?”라고 물으셨고, 그러면 저도 모르게 “으응” 하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으면 군중심리에 휩쓸려 저도 구원받았다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찾았는데 어린 마음에 저는 그런 것이 구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1994년 1월 어느 날,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꿈 같은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이사야 44장 22절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는 말씀에서였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구원은 내가 억지로 받으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이구나....’ 저는 울었고 난생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지식으로만 구원을 얻으려 했던 어리석음을 후회하였습니다. 머리털보다 많은 내 죄를 예수께서 자신의 피로 2천 년 전에 이미 사해주신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이 예수이신 것이 확실히 믿어지고 ‘이제는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저는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주 십자가에 달리사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 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나 주께 영광 돌릴때 이 평화 충만 하도다
주 하나님 은혜로써 이 평화 누리도다


이 평화를 얻으려고 주 앞으로 나아갈 때
주 예수님 우리에게 이 평화 주리로다

 

(후렴)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찬송가 468장)



 

저는 이 찬송가를 부르며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제 생활은 단번에 받은 사랑으로 인해 달라졌고 열정적으로 변하였습니다. 학업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나름 열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새삼 느낄 즈음에, 어머니도 새로운 분을 만나시어 모든 것이 안정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조금의 소홀해진 틈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군에 입대한 후 점점 말씀과 멀어지는 생활 속에서 달라지는 저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곱씹으며 살아야 하는데, 성경도 잘 안 보게 되고 세상 것이 더 좋아 보이고 그쪽에 더 많은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왜 이렇게 달콤한지요. 저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기에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십사 주님을 붙들며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큰 꿈을 꾸고 제대를 했건만 세상이라는 곳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 앞에는 취업대란이라는 현실이 있었고, 사범대에 진학하여 7-8년 이상 교사만을 꿈꾼 저에게 임용고시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듯 긴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가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보내주신 생활비로 2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거의 1년을 공부만 했습니다. 어느덧 주님을 잊어버린 채 말이지요. 그런 제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합격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합격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두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저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경 한 줄 읽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교제 없이 생활하다보니 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해에도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너무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기에 이제는 다시 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필리핀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오는 것이 어떻겠니?”라고 권하셨습니다. 당시는 필리핀의 일로일로에서 폭발적으로 복음이 퍼져가는 상황이었는데, 그럴 때에 필리핀에 간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뛰고 날고 있는데 저는 뒷걸음질을 하여 떨어져서는 주님을 잊고 내 앞길만 보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보자!’




그곳에서 저는, 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아이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요. ‘나는 주님께 받을 상이 하나도 없구나. 주님도 모르고 나만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무슨 복을 받겠는가. 내가 주님을 위해 삶의 목적을 정확히 둘 때 분명히 하나님은 날 도구로 쓰실 텐데 지금의 내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 보이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제에 동참하며 과연 교사가 나의 길인지 현장에서 경험해보고, 만약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향집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의 학교 관사에 살며 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였고 가르치는 것에 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매 주말에는 고향에 와서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 활동을 하였는데, 예전만큼 많이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참 행복했고 즐거웠습니다. 먼 거리를 오가는 시간에도 찬송가를 부르며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그 해, 뜻밖에도 전북 지역의 임용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아무런 연고지가 없는 낯선 곳에 내가 오게 되었을까?’ 후에 그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필리핀에 갔을 때 전주 지역의 한 자매님을 알게 되었는데, 홀로 타지 생활하는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신 그 분은 한 자매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자매와 친해질 겨를도 없이 그 자매의 아버님과 함께 전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전도집회 기간 동안 함께 말씀을 들으며 성경 구절들을 찾아드렸고, 매일 성경과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자매의 아버님은 처음에는 구원에 대해 두려운 모습을 보이셨지만 집회 마지막 날에는 이제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감사해 하셨습니다. 단 한 명의 생명을 위해 주님은 큰 사랑을 주시고, 그런 사랑 가운데 일이 진행됨을 느꼈습니다. 저는 구원받으신 아버님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전주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지금 그 분은 제 장인어른이 되셨습니다.




전도집회가 끝난 후 아버님과 함께 교회를 다니다가 전주 교회 내에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가 없고 교회 중고등학생들의 모임도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주 어른 분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전주에 적응하기도 전에 저는 학생들 모임을 맡게 되었고, 작은 능력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일을 맡은 첫 해에는 교제 가운데서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아이들과 함께 해보았지만 큰 변화도 없었고 결과도 없었습니다. 2년간 혼자서 끙끙대는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교회학교의 이상석 교장 선생님이 “혼자 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복이 없는 것이다. 교제도 마찬가지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넘어지려고 하면 일으켜도 주고 내가 넘어지려 하면 도움도 받으며 그렇게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선생님들이 모였고, 좀 더 발전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전주 교회학교만의 수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성경 읽기표를 실어 성경을 한 번씩이라도 꾸준히 읽도록 하고, 가요보다 찬송가를 흥얼거릴 수 있도록 찬송가를 실었고, <꿈 같은 사랑>과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알아두면 좋은 구절을 암송하게 성경 구절도 넣고, 말씀 들을 때 필요한 메모지도 넉넉하게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함께 뜻을 나눈 선생님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학생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주말에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졸거나 지루해하며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수첩에 그날 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고 성구를 암송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도와 태권도, 미술, 영어, 요리까지 함께 병행하였고, 그에 함께하며 교제의 방향을 따르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인 우리 아이들이 밝고 어긋나지 않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제 소명을 다시 한번 잡아 보았습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그동안 저는 왜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모르고 세상에 한눈팔려 있었는지요. 이제는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겠습니다. 저 위에서 받을 상급을 위해 부지런히 달려갈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세요. 저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