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기적 같은 나의 이야기


우리 집은 딸만 다섯이다. 엄마는 생활고 해결을 위해 밖으로 나가셔야 했기에 막내로 태어난 나는 두 살 때부터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바로 윗 언니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아 나이차도 커서 나는 항상 혼자였던 기억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싫다.

 

 


나의 외로움의 탈출구는 조그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와 책을 보는 것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책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그 때, 학교 선생님께 질문하면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자유롭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제대로 못했던 그런 시절,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나의 여고 시절은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못하는 내 형편이 원망스러워 외로움이 가득한 회색빛의 나날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우여곡절을 겪고 대학을 가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나의 외로움을 채워 주었고 심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형편이 되는대로 나를 채워주었고,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격려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해주려 노력하고 항상 보호자 역할을 해주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후 나는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시어머님께서 절에 다니신 터라 나도 청평에 있는 절에 함께 다니기도 했다. -지금도 남편은 자기는 사기를 당했다고, 분명히 절에도 다니고 제사도 지내는 그런 여자와 결혼한 줄 알았는데 사기였다며 남편은 나를 타박한다.-

 



결혼을 결정하고 난 그 즈음에 바로 윗 언니네로 인사를 하러 갔다. 그때 마침 형부는 어딘가를 일주일 다녀온 후 무언가에 심취한 상태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막 구원받고 무척 기뻐 자신의 기쁨을 나누려고 했던 때였던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인간적으로는 언니가 많이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어 주지 않고 혼자 어딘가 다녀온 형부가 나는 싫었다. 그런 못마땅한 나에게 형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함께 간 남편은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터라 앉은 자리에서 형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아마도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내 감정을 조절해서 형부의 이야기를 잘 들었더라면 그 때까지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던 남편과 함께 복음을 깨닫고 알콩달콩 신앙생활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후회도 해 보곤 한다.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한 채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조차 든다.

 



결혼 후 둘째아이를 임신해서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급하게 병원에 가니 의사들도 병명을 빨리 알아내지 못했고 여러 의사들이 나의 자궁을 들여다보았다. 요즘은 초음파로 아기의 상태를 알아본다고 하는데, 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27년 전에는 촉진으로 진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의사들과 하다못해 인턴들까지 한 번씩 다 보고 간 후 몇 시간을 술렁거리더니 맹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기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마취를 하고 남들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술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취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때부터는 아기가 발로 배를 차기 시작했다. 아기를 피해 수술을 하느라 남들보다 수술 부위가 더 컸는데 그 부위를 뱃속에 있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신호로 발로 차면서 자꾸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아기의 건강을 위해 진통제를 먹을 수도 없었다. 고통이 올 때마다 나는 다리가 마비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넷째 언니가 자기가 퇴원하면 병간호를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아기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 큰 수술을 한지라 한 달 정도는 회복 기간이 필요했다. 큰아이는 그때 두 살이었는데 시어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뱃속의 아기가 발로 차서 수술 부위는 계속 아프고 큰아이와 떨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정말 서글펐다.

 



그러던 중에 언니가 권 목사님의 <성경을 사실이다> 설교를 들려주었다. 나는 기독교 재단의 중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정규 과목으로 성경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있었고 예배시간도 있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등 왜 기념하는지도 모른 채 따라 했고 시험도 보았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시험도 꽤 잘 보았다. 그런 이유로 당시 구원받았다고 하는 언니보다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아프면서도 테이프를 들으면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그 와중에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어겨 에덴동산을 쫓겨날 때 그냥 내보내신 것이 아니라 가죽옷을 입혀서 내보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도 저렇게 내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마음도 하늘을 나는 듯 가벼워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나를 너무나 사랑해 주었던 남편도 생각났고 어떻게든 복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걱정부터 앞섰다. 그 해에 한 고등학교에서 열렸던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해 큰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영혼이 걱정되었으리라. 그 때 정신없이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며 너무 순서 없이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의 전도 방법이 엇나가 29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의 영혼 문제는 나의 숙제로 남아 있다.

 

 


지금도 남편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은 그때 몸조리하라고 나를 언니에게 보냈는데 테이프인지 뭔지를 듣고는 사람이 변해서 왔다고.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남편이 너무 크게 반대해 일단 출근을 시킨 후 편지를 써놓고 도망가다시피 집을 나와 참석하기도 했었다.

 



일주일을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면 겪어야 할 남편의 야단을 각오했지만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낼 때는 아이들이 크지도 않았는데 세뇌시키지 말라고 역정을 내서 내가 방패가 되어 아이들을 교회에 보냈다. 생각해보면 정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흘려간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지금은 자라서 교제 가운데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남편을 전도인에게 혹은 전도집회에 데려가기 위해 고심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던 날들도 많았다. 그런 날들이 남편에게는 더 많이 외로웠으리라. 밀어붙였던 나로 인해 가리워진 주님의 빛이 이제는 정말 남편에게 비추었으면 한다. 혼자 외롭게 살아왔던 남편의 속마음을 알아가면서 오늘도 그의 마음에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