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안녕하세요. 저는 근래 한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더 머물 계획이었지만, 지난 6개월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캘리포니아에는 어제 오후에 도착하였고 도착하고 보니 제 마음도 참 좋았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광활하고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햇살은 오랜 여행 후의 저에게 평온함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LA에 있으면서 수년간 우리가 조금씩 함께 꾸며온 리조트의 조경이나 조그만 동물농장 일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계획입니다.
몸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어떤 병마들과 싸워야 할지 익히 알아온 터라 이제는 견디기가 조금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식도나 대동맥도 모두 깨끗합니다. 종양은 여전하지만 이것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지녀야 되는 것이겠지요.
지난 6개월은 아마 제 인생에서 진지한 생각들을 가장 많이 하며, 하나님을 찾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은 저를 낮추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고 제가 영원한 생명을 찾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2009년 1월 1일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이 날을 맞이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에는 최악의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만 있는 제 모습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척 비참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누워 있는 동안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도 해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제주도에서 일할 때 만난 분을 통해 한 전도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사후의 삶이나, 하나님과 예수님,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흔히 말하는 삶이나 죽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후에는 바로 ‘제 삶의 이유 또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꼭 집어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전날까지도 병상에서 고민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아무 목적도 없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제 인생은 연약하고 걷잡을 수 없었기에, 돈이나 세상 재미 혹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어떠한 활동이나 장소에도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이 그러하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준비되어 있고, 지금의 삶은 그 굉장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대화가 계속되면 제 몸에 무리가 될 것을 안 그 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 1일이 되어 그분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유,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저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터였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죄에 매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께서 죽음이 예비된 이 땅에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지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당시 가축의 여물통이 있는 곳에 뉘이셨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일할 때 나무로 된 돼지 여물통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놀라웠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후 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죄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시더군요. 우리의 죄는 아담에서부터 피를 타고 유전적으로 들어왔다고 배워 왔던 터라, 당연히 저의 피 속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어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를 지은 후에도 그 죄는 여전히 내 피 속에 있는 것인가? 정확하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 분은 우리가 일단 죄를 지으면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가려지는 것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장애물은 바로 저의 죄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또한 아래의 말씀과 찬송가 가사를 보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해주셨기에 제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이미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더럽기가 한량없던 우리들
아무 공로 없이 구원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 지금 되었네
(찬송가 206장)
저에게는 한국어 가사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저는 제 힘과 의지로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선한 삶을 살려는 노력도 했습니다. 참 어리석었지요. 지금에야 당시 제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에 대한 답은 제 의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은 직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병의 고통이 저도 모르게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은 아직 없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 세상에서 펼쳐질 제 미래가 어떠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안녕하세요. 저는 근래 한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더 머물 계획이었지만, 지난 6개월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캘리포니아에는 어제 오후에 도착하였고 도착하고 보니 제 마음도 참 좋았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광활하고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햇살은 오랜 여행 후의 저에게 평온함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LA에 있으면서 수년간 우리가 조금씩 함께 꾸며온 리조트의 조경이나 조그만 동물농장 일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계획입니다.
몸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어떤 병마들과 싸워야 할지 익히 알아온 터라 이제는 견디기가 조금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식도나 대동맥도 모두 깨끗합니다. 종양은 여전하지만 이것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지녀야 되는 것이겠지요.
지난 6개월은 아마 제 인생에서 진지한 생각들을 가장 많이 하며, 하나님을 찾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은 저를 낮추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고 제가 영원한 생명을 찾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2009년 1월 1일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이 날을 맞이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에는 최악의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만 있는 제 모습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척 비참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누워 있는 동안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도 해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제주도에서 일할 때 만난 분을 통해 한 전도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사후의 삶이나, 하나님과 예수님,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흔히 말하는 삶이나 죽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후에는 바로 ‘제 삶의 이유 또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꼭 집어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전날까지도 병상에서 고민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아무 목적도 없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제 인생은 연약하고 걷잡을 수 없었기에, 돈이나 세상 재미 혹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어떠한 활동이나 장소에도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이 그러하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준비되어 있고, 지금의 삶은 그 굉장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대화가 계속되면 제 몸에 무리가 될 것을 안 그 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 1일이 되어 그분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유,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저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터였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죄에 매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께서 죽음이 예비된 이 땅에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지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당시 가축의 여물통이 있는 곳에 뉘이셨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일할 때 나무로 된 돼지 여물통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놀라웠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후 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죄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시더군요. 우리의 죄는 아담에서부터 피를 타고 유전적으로 들어왔다고 배워 왔던 터라, 당연히 저의 피 속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어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를 지은 후에도 그 죄는 여전히 내 피 속에 있는 것인가? 정확하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 분은 우리가 일단 죄를 지으면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가려지는 것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장애물은 바로 저의 죄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또한 아래의 말씀과 찬송가 가사를 보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해주셨기에 제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이미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더럽기가 한량없던 우리들
아무 공로 없이 구원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 지금 되었네
(찬송가 206장)
저에게는 한국어 가사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저는 제 힘과 의지로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선한 삶을 살려는 노력도 했습니다. 참 어리석었지요. 지금에야 당시 제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에 대한 답은 제 의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은 직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병의 고통이 저도 모르게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은 아직 없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 세상에서 펼쳐질 제 미래가 어떠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