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어느 날, 서울 종각 지하철역 근처에서 학교 종강 파티가 있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종강파티 후 밤 11시쯤 되어 서둘러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인천행 전철표를 사려고 매표소 앞에 선 나는 뇌리를 떠나지 않는 어떤 모습 때문에 표를 사지 못하고 발걸음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급히 지나치면서 눈에 띄었던, 지하철역 입구에 엎드려 있던 거지의 모습이 잊히질 않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돌아온 나는 지나가는 행인들 때문에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움켜쥔 채 그 거지 근처를 초조하게 서성였다. 내가 그를 돕는 것을 사람들이 보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인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을 때 얼른 내가 가진 돈 전부를(3, 4천 원 정도의 얼마 되지 않은 액수였지만 당시의 나에겐 꽤 큰돈이었다. 어머니에게 매일 5백 원씩 받아서 다니던 때였다.) 그 거지 앞에 던지다시피 하고는 급히 전철표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마음에 정말 편안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젯밤 나는 분명 거지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쪽 주머니에는 인천까지 올 차표를 살 돈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다 주었어야 옳은 행동이었는데.’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 해 여름 나는 다니던 교회에서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해 초에 교회학교 선생님으로 임명된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초등학생 아이들과 여름 성경학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창세기 첫 구절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말씀들이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 2절, 3절 ... 26절을 죽 가르치다가, 드디어 입이 꽉 막혀 버렸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이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창세기 1장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크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그냥 죽 읽어주면 된다.’라고만 대답해 주셨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성경학교가 시작된 지 이틀 혹은 사흘 만의 일이었다. 목사님께 더 이상 교회학교 교사를 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다음날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가난한 이와 부자의 차이가 없이 똑같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순수예술은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적인 예술을 해야 한다. 네가 그 선봉에 서야 한다.’고 하면서 수십 권의 책도 권해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나 마음속에 증거가 없으면서도 그네들의 사상 속에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나는 못마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무언가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기에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과 자주 언쟁을 벌였고, 결국 그들과의 친교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 2년, 그러니까 1980년 11월 1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 날 전까지의 생활은 정말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철저히 혼자였던 시절이었다. 무척 외롭기도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향해 거의 대들다시피, 당신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며 울부짖었다. 한편으로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구성된 사회를 바라보며 많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80년 9월인지 10월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던 친누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몇 가지를 이야기하며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전도서를 펼치면서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비록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사실 전도서의 존재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가톨릭교도인 주제에 감히 나에게 성경을 이야기하다니!’ 하는 생각도 들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지만 못이기는 척하고 함께 전도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의 존재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누나와 성경 이야기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주 일요일에 누나와 한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를 오래 다녀왔기 때문에 그 교회의 무언가 다른 모습에 의구심이 생길 법도 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새로웠고 예배 분위기도 새로웠다. 그리고 바로 참석하게 된 전도집회에서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들을 듣게 되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그제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전도집회가 하루 이틀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게 되었다. 하지만 전도집회에서 말씀을 듣기 전부터도 괴로워하던 문제인 죄 문제가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동안 지은 죄로 인해 이제는 그 존재를 확실히 믿게 된 하나님과 영영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아니 그 죄 때문에 내가 지옥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전도집회 말미에는 정말 무서워서 발걸음 하나도, 눈동자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롬 3:10-11),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4) 1980년 10월 마지막 날 권 목사님은 죄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나를 향해 이런 설교를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 3:20) 는 구절을 읽으시고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그동안 지은 죄를 낱낱이 기억해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일 만나자는 것이었다.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내가 지은 죄가 한없이 자꾸 생각이 났고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마나 손등에 666이 씌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말 무서웠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집회 마지막 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말씀을 듣던 나를 구원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동안 내 마음을 꽉 누르던 죄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멍해졌다. ‘아! 이제 나는 죄와 상관이 없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셨구나.’ 이제는 내가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들로 인해 괴로워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당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영원히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그날 이후 그토록 어렵기만 하던 성경 말씀이 그렇게 쉽게 읽혀질 수가 없었다. 신약 성경 처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토록 열심히 해보려던 음악도 이젠 내게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의미 없게 느껴져서 한때 음악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저 하염없이 찬송가를 부르고 또 부르곤 했었다.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구원 받은 지 29년이 지난 요즘, 교제의 대열 맨 끝자락에 서서 매순간 나를 노리는 아말렉의 존재를 등 뒤에 느끼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나를 이 거룩한 대열에서 이탈시키지 않으시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1) 는 말씀을 근거로 나오는 엄청난 메시지를 접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찬송가 456장)
1979년 12월 어느 날, 서울 종각 지하철역 근처에서 학교 종강 파티가 있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종강파티 후 밤 11시쯤 되어 서둘러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인천행 전철표를 사려고 매표소 앞에 선 나는 뇌리를 떠나지 않는 어떤 모습 때문에 표를 사지 못하고 발걸음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급히 지나치면서 눈에 띄었던, 지하철역 입구에 엎드려 있던 거지의 모습이 잊히질 않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돌아온 나는 지나가는 행인들 때문에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움켜쥔 채 그 거지 근처를 초조하게 서성였다. 내가 그를 돕는 것을 사람들이 보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인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을 때 얼른 내가 가진 돈 전부를(3, 4천 원 정도의 얼마 되지 않은 액수였지만 당시의 나에겐 꽤 큰돈이었다. 어머니에게 매일 5백 원씩 받아서 다니던 때였다.) 그 거지 앞에 던지다시피 하고는 급히 전철표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마음에 정말 편안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젯밤 나는 분명 거지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쪽 주머니에는 인천까지 올 차표를 살 돈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다 주었어야 옳은 행동이었는데.’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 해 여름 나는 다니던 교회에서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해 초에 교회학교 선생님으로 임명된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초등학생 아이들과 여름 성경학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창세기 첫 구절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말씀들이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 2절, 3절 ... 26절을 죽 가르치다가, 드디어 입이 꽉 막혀 버렸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이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창세기 1장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크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그냥 죽 읽어주면 된다.’라고만 대답해 주셨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성경학교가 시작된 지 이틀 혹은 사흘 만의 일이었다. 목사님께 더 이상 교회학교 교사를 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다음날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가난한 이와 부자의 차이가 없이 똑같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순수예술은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적인 예술을 해야 한다. 네가 그 선봉에 서야 한다.’고 하면서 수십 권의 책도 권해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나 마음속에 증거가 없으면서도 그네들의 사상 속에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나는 못마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무언가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기에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과 자주 언쟁을 벌였고, 결국 그들과의 친교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 2년, 그러니까 1980년 11월 1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 날 전까지의 생활은 정말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철저히 혼자였던 시절이었다. 무척 외롭기도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향해 거의 대들다시피, 당신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며 울부짖었다. 한편으로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구성된 사회를 바라보며 많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80년 9월인지 10월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던 친누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몇 가지를 이야기하며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전도서를 펼치면서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비록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사실 전도서의 존재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가톨릭교도인 주제에 감히 나에게 성경을 이야기하다니!’ 하는 생각도 들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지만 못이기는 척하고 함께 전도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의 존재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누나와 성경 이야기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주 일요일에 누나와 한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를 오래 다녀왔기 때문에 그 교회의 무언가 다른 모습에 의구심이 생길 법도 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새로웠고 예배 분위기도 새로웠다. 그리고 바로 참석하게 된 전도집회에서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들을 듣게 되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그제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전도집회가 하루 이틀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게 되었다. 하지만 전도집회에서 말씀을 듣기 전부터도 괴로워하던 문제인 죄 문제가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동안 지은 죄로 인해 이제는 그 존재를 확실히 믿게 된 하나님과 영영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아니 그 죄 때문에 내가 지옥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전도집회 말미에는 정말 무서워서 발걸음 하나도, 눈동자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롬 3:10-11),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4) 1980년 10월 마지막 날 권 목사님은 죄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나를 향해 이런 설교를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 3:20) 는 구절을 읽으시고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그동안 지은 죄를 낱낱이 기억해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일 만나자는 것이었다.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내가 지은 죄가 한없이 자꾸 생각이 났고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마나 손등에 666이 씌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말 무서웠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집회 마지막 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말씀을 듣던 나를 구원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동안 내 마음을 꽉 누르던 죄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멍해졌다. ‘아! 이제 나는 죄와 상관이 없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셨구나.’ 이제는 내가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들로 인해 괴로워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당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영원히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그날 이후 그토록 어렵기만 하던 성경 말씀이 그렇게 쉽게 읽혀질 수가 없었다. 신약 성경 처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토록 열심히 해보려던 음악도 이젠 내게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의미 없게 느껴져서 한때 음악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저 하염없이 찬송가를 부르고 또 부르곤 했었다.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구원 받은 지 29년이 지난 요즘, 교제의 대열 맨 끝자락에 서서 매순간 나를 노리는 아말렉의 존재를 등 뒤에 느끼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나를 이 거룩한 대열에서 이탈시키지 않으시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1) 는 말씀을 근거로 나오는 엄청난 메시지를 접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찬송가 45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