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사망의 어둠의 길을 헤매다 얻은 평안


10대 시절부터 나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환경적인 조건에 열등감이 컸다.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집이 가난해 형제들도 많이 배우지 못했고 각자 먹고 사느라 바빠 소통할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때에 술 때문에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많은 고생을 하셨다. 나는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엄마가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고 공납금도 제때 내지 못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그 일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고 성적도 자꾸만 떨어지면서 몸도 안 좋아져 나중에는 오른쪽 팔로는 글씨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삶이라는 것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왜 인간은 스스로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때에 생명을 받아서 이렇게 씁쓸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과연 내 미래에 비전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하는 생각들만 계속해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라즈니쉬라든지 마하리쉬, 바가바드기타, 법정 스님 같은 분들이 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TV에서 어떤 아가씨가 참선 수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래, 저거다. 책에서 보면 지극한 평화의 경지, 어떤 상황이나 조건, 한계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의 절대 경지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이 생에서 찾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그 마음을 품고 직장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사귀던 남자친구에게도 내 생각을 빨리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생각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안국동에 있는 어느 절을 우연히 알게 되어 3개월 동안 매일, 그곳에서 반나절 동안 참선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한 모임에 참석하면서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오신 어느 분을 알게 되었다. 서로 만남이 있던 중에 그분의 후배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얀마에서 위파사나(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미얀마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께 내 생각을 말했더니, 지금 4월은 미얀마 날씨가 너무 덥고 나와 같은 초보의 상태로는 갈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어떤 고생이 있더라도 가겠다고 재차 졸라댔고 그분도 그 정도 마음이라면 가야 될 인연인 것 같다며 나에게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나는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고 어머니께는 직장 일로 외국에 나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짐을 싸서 미얀마로 갔다.

 

 


나는 미얀마의 수행센터에서 위파사나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원에는 한국에서 오신 스님들이 계셨고, 불교에 관심이 있는 신자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분들 중 한 비구니 스님은 내게 미얀마에 있는 동안 머리를 한 번 깎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머리를 깎게 되면 지난날의 업이 많이 소멸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며칠 고민한 후 머리를 깎고 소승불교의 법을 지키는 딜라신(우리나라의 비구니 스님에 해당하는 여자 수행자)이 되었다. 그리고 3개월이었던 예정 기간보다 3개월을 더 그곳에서 보내며 참선과 걷기 수행을 계속했고, 소승불교의 계에 따라 오후불식(낮 12시 이후에는 음료수 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을 행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센터 옥상에 올라가서 마음을 들여다보며 정리를 해 보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결론은 내 앞으로의 길은 구도자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오직 절대 평화의 경지, 불완전하고 씁쓸한 생을 다시 받지 않는 열반에 이르는 것만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였기에,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한국에 돌아가서 대승불교 쪽의 스님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얀마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인가 하는 것만이 내게 선택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어머니께는 전화만 드리고 미얀마에서 만나 뵈었던, 한국에 돌아오면 당신 절로 찾아오라고 했던 부산 큰 절의 비구니 스님을 기억하고 그 절에 가서 두 달을 보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고, 목탁을 두드리고, 일을 하는 그 큰 절의 분위기가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아 그 절을 나왔다. 그런 뒤 미얀마에서 친하게 지냈던, 나보다 한 살 위의 행자 스님이 기거한다는 지리산 작은 암자에 찾아가 거기서 3년을 지냈다. 그곳에는 노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해발 800미터에 있는 산속이라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생활이 여러 가지로 고생스러웠고 할 일도 많았다.

 

 


그 절에서 지내면서 사미니계*를 받고, 농사를 짓고, 목탁을 두드리고, 제사를 지내며 3년을 보냈지만 마음의 갈증은 하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노스님은 내가 승가대학에 가서 공부를 마치기를 바랐지만 나는 불경을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실제로 내 눈으로, 내 몸으로 그 지극한 열반의 경지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거기 머무르는 3년 내내 미얀마 생각을 했지만, 노스님의 몸이 좋지 않으신데다가 같이 지내던 행자 스님이 승가대학으로 가버려서 그곳에는 나와,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 한 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은 시간을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에 3년째 되던 해에 노스님께 미얀마로 가야겠다고 말씀드리고는 암자를 떠났다.

 


 

나는 다시 짐을 싸서 처음 묵었던 미얀마 사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본격적인 참선 수행을 해 나갔다. 그런 생활은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4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지만 내가 찾고자 했던 지극한 열반의 경지는 내게 오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다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통증을 하나하나 자각하고 알아차리고 견디어 나가고,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낱낱이 살폈지만, 그래서 호흡이 아주 작은 점처럼 미세해질 때까지 집중했지만, 그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걷고, 정지하고, 앉고, 눕는 네 가지 동작)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멸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며 아무리 노력해도,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고통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매일 노력했지만 마음에는 행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힐책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쁜가? 왜 더 노력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게으른가? 왜 집중력이 부족한가? 왜 알아차림이 부족한가? 왜 죽기를 각오하지 않는가? 소위 말하는 세속의 삶도 별 볼일 없는 실패자의 삶이었는데 승(僧)의 세계에서도 또 실패할 것인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그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를 시도했지만 결국 나는 4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너무나 피폐해졌고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조용히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돈을 조금 더 마련하고 힘을 회복해서 다시 미얀마로 와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스물아홉에 이 길을 걷기 시작해서 서른아홉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가족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속을 너무 많이 썩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결심을 아시고 기왕이면 큰스님이 되라며 나를 보내셨는데 그런 어머니께 부끄럽고 초라한 나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가 빌려준 30만원으로 고시원을 잡고 우연히 본 생활정보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고등학교의 식당에서 하는 일이었는데 삭발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모자를 쓰고 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식당에서는 내가 막내라서 천 개가 넘는 식판 설거지와 잔밥을 처리해야 했다. 일은 너무 힘들고, 한 달에 70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가던 중 언덕바지 어느 지점에선가 ‘아! 내 인생은 실패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돈도 없고 몸도 피폐해지고 나이만 먹어 버린 초라한 실패자의 인생이 되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앞으로 돈을 모아 미얀마로 돌아간다고 해도 열반의 경지는 이 생에서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런 형용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식당 몇 군데를 전전하다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조그만 회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언니들을 사귀게 되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3개월을 쉬는 동안 회사를 그만 둔 언니가 우유 대리점을 하게 되었고 나에게 전화로 우유 판촉을 권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과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던 터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안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우유 판촉을 하기 시작했다. 소개해 준 언니의 말대로 정말로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식당에서 일하며 힘겹게 벌었던 월급의 몇 배가 넘는 돈을 벌게 되었다.

 

 


그러다가 6개월 정도 후 동료들과 대구 동부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일을 한 지 보름 정도 지나 다른 분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나만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쪽 총판 사장님은 내게 참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나는 타지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일을 했는데, 일도 잘 되었다. 그러던 중 2009년 추석 즈음, 총판 사장님께서 함께 성경 모임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사장님은 대구의 어느 교회 뒤편에 있는 어떤 집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그곳에서 내게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성경 강연을 보여 주셨는데 권 목사님의 말씀이 참 공감이 되었다. 목사의 신분으로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면서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살아가는 삯꾼, 위선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매일매일 울면서 고통스러워했다던 그분의 말씀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그런 분의 말씀이라면 한번 진지하게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왔고 점심을 먹고 나서 졸음이 오면 일어서서라도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 자막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문구가 자주 나왔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이틀째 저녁에는 여섯 번째 강연을 보았는데 죄에 대한 말씀이었다. 나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냄, 분노, 시기, 질투, 무지 등은 어떤 대상을 만나게 되면 내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 공부를 하면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알아차림으로 저지하는 수행을 했었다. 그러면 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과연 무엇일지 정말 궁금했다. 옆에서 같이 말씀을 들어주시던 사장님께서는 자신이 언젠가 구원받아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이 좀 웃기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구원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게 있어서 교회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아주 어렸을 때 교회에 가서 계란을 얻어먹었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교회의 분위기가 나와는 맞지 않았고, 내가 찾는 것을 교회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강연을 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도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다음 날 아침 일곱 번째 강연부터 죽 보기 시작했다. 목사님께서는 복음 구절을 하나하나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9장 12절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고 이사야, 히브리서, 로마서를 오가며 말씀을 계속해 나가셨다.

 


 

그 말씀들을 들으며 ‘아, 열반의 경지, 지극한 평화의 경지는 내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사야 44장 22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동아줄이 척 주어질 때 다른 아무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줄을 잡는 심정으로 이 말씀을 붙들었다.

 

 


이 말씀밖에는 내 인생을 풀어 줄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가서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 품에서 쉬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 가슴 중앙에는 과거에 해내지 못한 수행의 실패, 미련, 회한,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즉 생에 생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짐 덩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강연에서 복음의 말씀이 계속되면서 내 가슴은 시원하고, 시원하고, 또 시원하고, 시원했다. 가슴에 있던 앙금이 풀어지고, 풀어지고, 또 풀어졌다. 권 목사님께서 처음 말씀하셨던, 깨달음이란 머리로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응어리져 있던 것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눈물이 나왔다. 정말 많이 울었다. 옆에 계신 사장님과 화장지 한 통을 다 쓰도록 같이 울었다. 사장님은 왜 그렇게 우느냐고 울면서 물어보셨고, 나는 울면서 예수님께 죄송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갔고 그 고생했던 세월이 다 해결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머릿속이 무척 복잡하고 혼란스러웠고, 무섭기까지 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러다 그날 새벽에 내린 결론은 ‘진리가 이끄는 쪽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영주에서 집회가 열렸고 대구 형제자매들과 함께 참석했다. 김 강사님이 죄 사함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나는 내가 완벽하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예수님의 피로 나를 영원히 속죄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졌고 나는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닌, 저주의 상태에서 풀려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도를 깨치기 위해, 열반을 위해 수행하는 그 사망의 어둠의 길을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 시선이 자꾸 간다. 그리고 그들이 그 짐 덩어리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혼의 영원한 자유를 얻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