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소식

흑암의 삶에 종지부를 찍던 날까지


1979년 2월 3일 0시. 이날은 26년간의 나의 기나긴 흑암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었다. 어떻게 그 많던 의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만으로 다 사라져 버릴 수 있었는지, 아직도 참으로 오묘하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죄가 많았으니 의문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의문 많은 학창 시절


나는 어려서부터 귀찮을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컨대, ‘눈은 꼭 이 자리에만 있어야 하나? 손만 간단히 움직이면 좁은 공간이나 높은 곳이라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손가락 끝에 붙어 있으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 코, 입, 귀들도 나름 그럴듯하게 여기저기로 옮기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몇 가지만 편리해지고 전부 불편하여져서 결국 다 제자리로 돌려놓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뿐 아니라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정말 곤란한 질문 하나를 아버지께 했다. “내가 부탁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낳으셨어요?” 대답하지 못 하실 것을 뻔히 알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내 생각을 알려 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놀라실까봐 수위를 낮추어 농담 비슷하게 여쭈었었다.



아버지는 당신도 내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하셨으나 나처럼 어른들께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혼자 내리신 결론이 ‘순리’였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이해는 되었지만 이 대답을 들은 나는 ‘결혼은 정말로 무심코 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만약에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하필 나를 닮아서 “엄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의 이상형, 즉 ‘롤 모델’이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냉엄하셨지만 반면에 문학, 음악, 자연을 사랑하는 아주 자상하고 가정적인 분이셨다. 또 매일 잠드시기 전에는 꼭 자기반성을 하셨다. 한 번은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자연 속에서 살아야 될 짐승을 괜히 집에서 키우다가 죽였다고 후회하시며 키우던 새들도 놓아주고, 자신도 모르게 밟아 죽인 개미가 얼마나 많을까도 걱정하셨다. 그렇게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은 나에게도 유전되어서, 아버지와 나는 서로 잘 통했다.
나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잡다한 의문들 때문에 현실에 몰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나를 말씀으로 데려다 준 몽학선생이 되었기에, 후에는 거꾸로 감사하게 되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매사에 불효만 하는 것 같아 항상 죄송스럽고 애처로워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자라면서 아버지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일단 37살까지만 살기로 했다. 아버지가 넉넉잡아 70세까지 사신다는 가정 하에 나도 그때까지 살겠다고 계산한 것이었다. 어차피 결혼도 안할 테고, 아버지가 먹여 살려 주시지 않으면 나 혼자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아무런 목적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었다. 나는 평생에 두 번 성당에 가보았다. 내 학창 시절에는 중, 고등학교 모두 입시 제도가 있었다. 평소엔 무심하게 지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입시 때가 다가오니까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원자가 많으니 누군가는 떨어질텐데, 만약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나를 입시에서 떨어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나를 성당에 데려 가라고 부탁했더니 그 친구가 웬일이냐며 굉장히 좋아했다. 물론 나의 마음은 숨겼다.



크리스마스 날 나는 친구와 성당 맨 뒷자리 구석에 가서 앉았다. 친구는 하얀 보자기를 머리에 쓰더니 뭘 받아먹고 오겠다며 앞으로 갔고, 나는 얼른 살짝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게 “저 왔어요.”라고 인사하고는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에 붙었다. 그때 만약 내가 입시에 실패했더라면 빨리 알아챘을 텐데, 붙는 바람에 붙은 이유를 확실하게 모른 채 아리송한 상태로 3년을 보내고 나니 또 대학 입시가 다가왔다. 정확히 3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또 그해 크리스마스에도 그 친구와 그 성당, 그 자리에 앉아서 두 번째로 “저 또 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 왔다. 대학에 또 붙었다. 정말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있었어도 붙었을 것을 괜히 인사하러 갔었나 싶기도 해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100% 확실한 것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다. ‘99%’도 ‘0’이 될 수가 있고 ‘1%’가 ‘100’이 될 수도 있는, ‘확률’이란 것을 나는 원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이라든지 ‘비교적’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교적’ 행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항상 슬프고 불행하고 비참했다. 나만 행복하면 뭘 하나? 친구가, 친척이, 옆집이, 길 가는 사람이 불행하면 그들의 불행이 내 불행이 되었다. ‘우리 집에 밥 해주러 와 있는 저 불쌍한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나는 무얼 잘 했기에 여기에 이렇게 사는 것일까? 입장이 뒤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아찔하기도 하고 한편 다행스럽기도 한 것 같아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부터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내가 만든 내 것’이 없었다. 무언가 항상 떳떳하지 못하고 죄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철저하게 숨기고 오히려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처럼 위장하고 살았다. 그런 중에도 대학교까지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아버지 다음으로 중요한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둡고 무거운 슬픈 음악들은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대학도 음악이 있었기에 진학했고, 학교도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는 학교(연세대학교)로 선택해서 갔다. 연세대학교 작곡과는 전국에서 정원이 가장 적은 과(그 당시 10명)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쟁률이 걱정되어 다른 대학을 가라고 말리셨지만 대학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교수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기에 지원한 것을 아버지는 모르셨다.





답을 모른 채 미국 유학길로


그렇게 대학을 가기는 했지만 교과 과정이 현대 음악 위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와 학교는 처음부터 맞지가 않았고, 배울 것도 없다고 여겨졌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현대 음악이라는 것은 ‘소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일단 교수님들 마음에는 들어야 학점이 나오니까 네 것도 내 것도 아니게 적당히 작품을 만들어서 발표도 하고 상도 탔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잣대에 의해서 내 작품이 좋다 나쁘다, 맞았다 틀렸다 평가 받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음악이 내 삶의 전부인데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마지막 4학년 때에는 학교에 꼭 가야 하나 하는 회의마저 생겼다.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는 억지 목표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차분히 생각해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해도 문제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바흐, 헨델,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등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이 세상에 생산해 놓은 작품들이 차고 넘치는데 내 까짓게 무엇을 더 보탤 것이 있는가 말이다. 어느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다 완성되고 끝이 난 일이었다. 나는 그저 음악애호가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나의 그런 딱한 사정도 모르고 주위에서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느냐고 성화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나에게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딱 죽어야만 될 처지인데, 죽지 못할 이유가 살지 못할 이유만큼이나 있었다. 4남 1녀 중 유일한 딸인, 안 그래도 불효투성이인 내가 죽어 버린다면 남은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게 될 것이었다. 또 나도 모르게 누가 살짝 죽여준다면 몰라도 내가 나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죽으면 끝이 나는 것인지, 만약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죽지도 못하고 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나중에 성경에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지옥이라는 곳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바로 그 ‘지옥’에 살고 있었다.



고민 끝에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교수님께 이런 사정을 대강 말씀드렸더니, “그럼 너는 이제 죽어서 없어졌다 치고 지금부터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하셔서 괜찮은 생각이니 고려해 보겠다고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무리 죽었다고 여겨 보려고 해도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었다. 역시 그런 문제는 누구에게 물어볼 사안이 아니었다. 나를 낳으신 부모님도 모르실텐데 교수님인들 어찌 아실 수 있을까? 어차피 태어난 것부터가 내 의지와 아무 상관없었으니까 죽을 때(최소한 37살)까지는 무조건 살아야 했다. 무조건….



이 모순투성이인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제일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 ‘왜 태어났나?’를 알지 못하는데, 그 다음 수순인 ‘어떻게?’를 내가 도대체 어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우연히 어디서 태어나서, 우연히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우연히 죽는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최소한 나에게 만은 모든 것이 꼭 ‘필연’이라야만 했다. 분명히 내 인생인데 내 계획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다른 어떤 힘이 분명히 존재해야만 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나는 그것이 조물주, 또는 창조주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점쟁이나 귀신이 확실히 있다면, 상대적으로 조물주나 창조주도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계셨다.



오랜 고민 끝에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한국 전통 음악을 공부한 것이 아니니까 서양 음악의 본 고장에 가면 혹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일단은 무조건 살아야 하니까. 처음에는 성당에 나를 데리고 갔던 친구와 같이 독일로 갈 준비를 했는데, 내가 워낙 생활력이 없고 독립적이지도 못한 데다가 결혼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는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몹시 불안해 하셨다. 나도 자신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오빠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성악하는 그 친구와 나는 결국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떠나기 바로 전날 아버지는 녹음기를 들고 내 방으로 오셨다. 떠나는 기념으로 노래를 하나 부를 테니 반주를 해 달라고 하시며 평소에 자주 부르시는 18번 노래를 녹음하셨다.



가면 갈수록 멀고먼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싫더라



대강 이런 내용의 가사였는데,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라는 유명한 곡에 어떤 사람이 본래 가사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가사를 붙인 노래였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도 내 마음과 같은지 나도 무척이나 이 노래를 좋아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다른 데에서 이런 노랫말로는 들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디서 또 희한한 것을 찾아 내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후렴까지 다 부르시고 나에게도 테이프를 하나 주셨다.



공항에서 아버지는 반드시 미국에 도착하면 읽어 보라며 얇은 책만큼이나 두툼한 편지를 주셨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보니 내가 살던 곳이 점점 작아지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까지 내가 저런 점보다도 작은 곳에서 아옹다옹하며 살았나 싶어 나의 존재가 더없이 처량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큰 오빠가 있는 미시간에 무사히 도착하여, 아버지 말씀대로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열어 보았더니 실로 엮어서 책처럼 만든, 거의 유서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아마도 비행기에서 읽었다면 통곡을 했으리라. 그럴까봐 도착한 후에 읽으라고 미리 배려를 하신 것이었다.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까 꼭 전도서를 컨닝해서 베껴 놓은 것과 흡사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울보인 나는 당장에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같이 어찌나 슬프던지 혼자 방에 쳐 박혀서 엉엉 울었다.




성경이 어쩌면 나를 구해줄지도 모른다


오자마자 오빠는, 피아노를 배울 아이가 있다며 이미 약속을 해놓았으니까 가르쳐야 된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남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처지가 아니었고, 그런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어서 무조건 지금은 안하겠다고 버텼다. 오빠는, 자신은 공부가 거의 끝났기 때문에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너만 남을 텐데 한국에서 살던 식으로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소극적으로 살면 안 된다며 설득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실 나도 혼자 살아남을 일이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겠지만 평소 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말고, 대신 꼭 해야 하는 것은 철저히 하자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하는 일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가령 먹고, 자고, 씻는 일처럼 안하면 절대로 안 되는,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들만 주로 열심히 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오빠 말을 듣기로 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까.



앤아버라는 도시에 미시간 대학이 있고 이곳에 있는 한 한인 교회에서 성가대원들 10여 명이 그 당시에 막 구원받았는데, 그중에 조 선생님이라는 분이 자기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고 내 오빠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유학생들 중에 오빠에게 전도하려던 후배가 몇 있었는데, 내가 온다는 이야기에 마침 반주자도 없으니 잘 되었다고 그렇게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오빠는 그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지만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도착하고 한 달쯤 지나서부터 조 선생님 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러 가기 시작했다.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레슨이 끝나고 저녁을 얻어먹고 나면 금방 어두워졌고,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만 돌아올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서너 시간을 이렇게 같이 있게 되니 그분들과 함께 지내는 분위기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처음 몇 주간은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조 선생님의 아내 분이 부엌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흥얼거리면서 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를 안 다녀도 그 노래가 유명한 찬송가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종교인들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의는 갖추되 적당히 거리를 두어서 말려들지 않도록 처신을 잘 해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나는 교회와 무관하게 대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도 은근히 핍박을 받았다. 연세대학교는 모체가 신학대학이었고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종교 음악이었기 때문에, 특히 연세대학교의 음악대학은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음대 교수님들과 학생들 대다수가 성가대 중심의 교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 음악과 학생들은 모범적인 것을 넘어 지나칠 정도로 종교적이어서 다른 과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는 필수과목인 채플 시간마저도 졸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출석했고, 대리출석도 누가 해주면 좋아했다.



그런 내게 조 선생님이 드디어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어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나는 당연히 안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조물주나 창조주는 있어야 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일 테니까 두고 보라고 해서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진작에 알았지, 내 주위에 하나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눈치 빠른 내가 그것도 몰랐을라고?’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아주 가끔씩, 하는 일이 잘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길 때면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툭 튀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재빨리 “조물주님”이나 “창조주님”으로 고쳐서 불러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호칭을 “선생님”으로 바꾸고 연습을 좀 해 두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대부분 학교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 선생님은 내게 성경 이야기를 무척이나 하고 싶어하셨다. 나는 그런 것도 취미의 일종인가 보다 생각하고, 어른이 이야기하시니까 예의상 ‘네, 네.’ 하고 호응만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기가 막히게 깜짝 놀랄 구절을 듣게 되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라는 구절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말이…. 그렇지, 맞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누가 감히 이런 말을 책에 이렇게 자신 있게 단정적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알았을까? 이 세상 사람을 다 만나봤나?’ 정말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고 약간은 불안하고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 놓았다니.



그런데 이번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가복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혼자 읽어 내려가다가 더 기막힌 대목을 만나게 되었다. 나도 나름대로 지성인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성경책을 가지고는 있었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비슷한 말들이 성경 여기저기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구절을 “남도 생각하며 살아라”는, 말 안 해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격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다 읽고 보니까 이 글은 절대로 사람이 쓴 글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이제껏 상식으로 생각하던 대화가 전혀 아니었다.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거꾸로 물으셨다. 답이 이렇게 분명하게 나왔는데도 똑똑하기 짝이 없는 이 율법사는 잘난 척하다가 자기가 못 알아들은 줄도 모르고 사팔뜨기 대답을 하고 가 버렸다. 예수님이 물으신 질문에 대답은 정확하게 잘 했는데 그 질문을 하신 의도는 전혀 포착하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내 처지를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정확하게 지적해준 이 말을 나는 천만다행히도 알아들었다.



아버지와 내가 믿는 조물주나 창조주가 정말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며, 그렇다면 이 성경이 나를 살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날 어렴풋이 생겼다. ‘나는 나를 구해줄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SOS(구원 요청)를 쳐야 하나? 아니면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보고 오는 것인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날


또 한 주가 지났다. 조 선생님이 나에게 죄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저는 원래 죄가 많아요.” 나도 모르게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고 보니까 ‘젊은 여자가 무슨 죄가 많다고 하나.’ 하고 수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보충 설명을 했다.



나는 한 친구를 미워했는데, 미워하는 것 자체보다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밉고, 만약에 성능 좋은 지우개가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전부 지워 버리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 처남(김홍식)이 가까이에 사는데 성경을 많이 아니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 보라며 전화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음식 한 접시를 들고 처남 부부가 오셨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조 선생님이 자기 처남과 나에게만 2층으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갑자기 마음에 반항심이 생기며 굉장히 불쾌해졌다. 죄가 있다고 하니까 이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하려는 것인가 싶었다. 2층에는 촛불도 켜 놓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이상한 장치들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따라 올라갈 수도 없어서, 잠깐 망설이였다. 그러다가 ‘그렇다, 일단 올라가자. 올라가서 살펴보고 이상하면 그때 내려와도 늦지 않을 테니까.’라고 마음 먹고 따라 올라갔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한 것이 없었다.



김 형제는 구약 시대의 제사법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하셨다. 이런 죄를 지으면 이렇게, 저런 죄를 지으면 저렇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옛날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런가 하고 적당히 듣고 넘어갔다. 그런 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소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아, 그럼 이제 됐구나, 이제 끝났구나, 이제 자유다.’ 하고 맥이 탁 풀렸다.



그 다음에도 뭐라고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서 멍 하니 있으니까 김 형제가 뭐라고 또 물으셨지만, 이제 그만해도 되니까 내려가자고 했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 분이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내려오니까 그분들이 찬송가를 부르자고 해서 시계를 보니 밤 12시였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오빠가 걱정할 텐데 이분들이 돌았나 싶어 기가 막혔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고 노래를 좋아 해도 그렇지 지금이 몇 시인데, 그것도 아파트에서. 게다가 나더러 피아노 반주까지 하라고 했다.



어른들 부탁에 싫다고 할 수도 없어서 약음기를 누르고 조그맣게 피아노를 쳐 주는데 앞부분은 무심히 지나가고 후렴에 가서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찬송가 209장) 하는데, 바로 내 이야기였다. 우연의 일치인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리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그것이 구원인지도 몰랐다. 그때까지 구원이란 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구원받으려고 성경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주말에 어느 집 저녁 초대에 가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형제자매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날 비로소 나는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강도 만난 사람과 죄인은 결국 동일인이었다. 질문은 율법사가 하고 답은 내가 얻었다.



파란만장했던 지옥의 삶에서 나는 빠져나왔다. 아버지가 날 왜 낳으셨는지, 이제는 거꾸로 내가 아버지께 가르쳐 드려야 하게 생겼다. 대학교 다닐 때 문과대학 앞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쓰여 있는 비석을 지나다니다 보며, 무슨 진리가 무엇을 자유롭게 해 준단 말인가 하고 알쏭달쏭했는데, 이제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고, 내가 궁금했던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찬송가 545장)




철저한 성격의 아버지, 구원받다


나는 해결이 되었으나 당장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몰라서 고통 당하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급했다. 그때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성경을 보시고 성경을 아시게 되면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실 것이라고 하며, 무턱대고 성경을 보셔야 된다고 성화를 하니까 아버지는 좋아하시기는커녕 너무 놀라셔서 오히려 그때부터 나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게다가 나는 구원받고 이제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공부를 그만둬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나셨다. 한다던 공부는 안하고 오히려 광신자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미련했다. 오빠는 옆에 있으니까 나 때문에 더 많은 피해를 보았다. 주위에 이렇게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많은데 어떻게 아직도 구원을 안 받고 있나, 내가 오기 전에 먼저 구원받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답답하고 급한 마음에 오빠에게 말실수를 어지간히도 했다.



오빠는 자기 친구들이, 동생이 엉뚱한 데 빠졌다고 비난하면 같이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대로는 그렇지 않다고 거꾸로 설명을 하고는 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오빠까지 이상한 눈으로 보아서, 실제로 나보다 더 많은 핍박을 받았었다. 그래도 오빠는 자기가 크리스천이 아니라서 그렇지 만약에 크리스천이라면 우리 교회처럼 믿을 것 같다고 나에게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도 만나면 자기는 아직 아니라고 하면서 피하고는 해서, 헤어질 때는 항상 기분이 좋지 않다.
그해 여름에 감격스러운 제 1회 미주 성경탐구모임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그 동안 거의 같은 시기에 구원받은 많은 형제자매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 장관은 지금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 해 여름에 오빠 졸업식 때 부모님이 미국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급했다. 오빠가 먼저 구원받아야만 합심해서 부모님께 복음을 전해 볼 텐데 아무래도 오빠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초조해 하는 것을 눈치챈 오빠는, 부모님이 오시면 너희 교회에 모셔다 드릴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좋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말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한마디 했다. 오빠는 독약일까봐 안 먹으면서 어떻게 부모님께는 몸에 좋을지도 모르니까 드시라고 할 수 있느냐며 달려들었다. 원래 나는 소극적이고 얌전한 성질인데 점점 표독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해 ‘제 2회 미주 성경탐구모임’ 중에 부모님이 미국에 도착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경탐구모임에 가 있었다. 그랬는데도 부모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성경탐구모임이 끝나고 내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얼마나 섭섭하고 화가 나셨을지 과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도착하시는 날부터 잔잔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빠는 약속대로 부모님을 교회에 모셔다 드렸고, 부모님도 궁금한 것이 많으니까 따라 나서셨다. 말씀에 거부감이 없으셨는지 아버지의 인상이 별로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워낙에 걱정을 많이 하셨던 터라 오히려 직접 와서 보니까 내가 이상해진 것 같지는 않아서 조금 안심은 하셨지만, 그래도 마음 편해 하시지는 않으셨다. 권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려 드렸더니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왜 남의 종교를 비난하시는지 그런 것은 좀 안 좋다고 하셔서,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다. 당시 당신 속이 편치 않으시니까 직접 주시지는 못 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나에게 보낸 편지를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너는 무엇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네가 순식간에 크리스천이 된 것처럼 아버지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아버지는 무종교인이다. 불서를 10년 동안 읽고 있으나 불도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버지도 알 도리가 없다. 아버지는 성서를 많이 읽고, 이해하고, 소화하지 않으면 결코 기독교인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 시간 동안에, 혹은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에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잘 동화하고, 공감을 잘 하고, 타협을 잘 하고, 이해를 빨리 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성서에 대한 너의 지식은 깊지 않다고 판단된다. 그런 지식으로 아버지를 이해시키기에는 좀 곤란하다. 그러기 때문에 너와의 성서에 관한 토론에서 아버지는 공감을 얻을 수 없으니까 답답하고, 너는 충분히 설명이 안 되니까 답답할 뿐이다. 앞으로 더 정리해 가지고 대화를 하자. 아버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너는 간단하다고 생각해서 초조할 것이지만, 아버지는 중대사라고 생각하니 문이 안 열리고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더 공부하도록 하자.



떠나시는 날 공항에서 아버지와 나는 약속을 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고 아버지는 성경에 대해 더 알아보시기로.
역시 아버지는 신사였다. 나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 했지만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셨다. 도착하신 직후에 서울 교회를 찾아가셔서 자진해서 공부를 하시고 결국은 구원받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다.
소개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하시며 어떻게 성서가 당신 인생의 의문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는지 믿을 수가 없고,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먼저 크리스천이 되라고 내 이름에 ‘성(聖)’자를 넣은 것 같다며 무척 좋아하셨다. 나도 내가 구원받은 것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부녀 형제자매가 되었다. 어설프게 맺어있던 부녀 관계를 싹싹 갈아서 강력 접착제로 딱 붙여 주신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아버지에게도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아버지’가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이제 우리 집 전도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효자이니까 아버지가 한 마디만 하시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서 한동안은 아버지의 구원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다시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재촉을 하니까 아버지는, 아들 넷이 전부 결혼을 해서 그런지 아무리 간곡한 말로 해도 ‘대답만 잘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지 않는 맏아들’ 같아서 참 어렵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변명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직접 부딪혀 보니까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 남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한때나마 아버지를 의심했던 것이 너무 죄송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37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어머니는 성격이 순하신데다가 워낙 아버지가 철저하시니까 아버지만 하늘처럼 믿고 사셨기 때문에, 더 이상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이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제야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셨고 그 이듬해에 뉴욕 집회에 참석하셨으나 해결이 안 되었는데, 고맙게도 권 자매님께서 상담을 해 주셨고 그 자리에서 해결되셨다.




내 안에 거하라


구원받고 몇 달 동안을 성가대 출신이 대부분인 유학생 그룹에서 노래로써 교제만 하다 보니 좀 답답해졌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지만, 구원받기 전에 했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이 새로 생겼다.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나?”라는 고민이 “이렇게 살려고 구원받았나?”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이것 말고 다른 보람 있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두리번거리는데 동부 쪽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시간에는 동쪽의 디트로이트 모임(의사 중심)과 서쪽의 앤아버 모임(유학생 중심)을 중심으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알아보니까 한국 모임과 연결이 되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오빠가 귀국하고 나만 남게 되어 어른들과 의논하여 일단 거처를 동쪽에 계신 어느 성도의 집으로 옮기고 나도 그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나는 제대로 잘 하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많이 했다. 전부 내 적성과는 맞지 않는 일들이었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사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내 자신을 누르고 조금이나마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심 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불어 닥친 IMF 돌풍으로 우리 교회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권 목사님도 돌아가시고 교회도 어려워지니까, 내 기분에는 교회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더불어 내 인생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이제까지 내가 무엇을 향해서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나?’ 하소연 할 대상도 없이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까지 울지 않았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웬만한 것은 그냥 넘어가는데 이것은 나의 신앙의 생사에 관한 문제였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제까지 내가 한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다 아실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울면서 따졌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들을 조목조목 써 보기로 했다. 회계장부를 맞추어 봐야 할 테니까. 종이를 꺼내 놓고 막상 쓰려고 하니까 너무 구질구질해서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나니까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누구 앞에 이런 더러운 것을 내놓으려고 하고 있는가 싶었다. 하나님 앞은커녕 내 자신이 혼자 몰래 보기에도 창피한 것들이었다. 지금은 지났으니까 밝힐 수 있지만 그때 당시는 정말 너무너무 창피했다. 나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도 꼭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온몸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책상 밑으로 쑤셔 박았다.



잘 살기는커녕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축이 많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내 장부는 마이너스로 빚만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나는 ‘아벨’처럼 살아야만 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벨’이 아닌 ‘가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구원받고 만 17년 동안 그렇게 욕을 했던 ‘가인’이 바로 ‘나’였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명히 잘못되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마 6:31-32 는 말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먹어야 된다는 말씀일까? 첫 번째 소제목을 “무엇을 먹을까?”로 정하고 창세기부터 여기 저기 찾아서 깨알같이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너무너무 많아서 중간에 포기하고, 그 다음 제목인 “무엇을 마실까?”로 넘어갔다. 마실 것도 역시 너무 많아서 넘어가고, 세 번째 “무엇을 입을까?”로 갔다. 이런 식으로 수십 개의 소제목을 정해 놓고 차근차근 찾아가다 보니까 묘하게도 초점이 정확하게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동안의 나의 문제점에 대한 답이 확연히 드러났다.



요한복음의 포도나무 비유가 떠올랐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15:5)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의 관계가 분명히 알아졌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요15:3-4) 그렇다, 주님은 이미 나를 깨끗하게 해 놓으셨다. 그러니까 그 다음 말씀도 내 것으로 이미 실제 상황이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2), 옆에 있었는데 몰랐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던 장님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던 것이었다. 눈을 뜨고 보니 없어진 줄 알았던 교회가 어마어마한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IMF라는 벼락을 맞은 줄 알았는데 그를 통해 질소비료를 공급하시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역시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전화위복의 명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고 하셨다. “I AM THAT I AM”, “I AM WHO I AM” 이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이름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너는 나 하나만으로 충분해.”, “내가 너의 모든 것이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어떻게 한 마디로 그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부도수표를 백지수표와 바꾸어 주셨다. 게다가 80년대에 들었던 요한복음 강연과는 다르게 현실감 있는 말씀으로 새롭게 들렸다. 이런 기쁨을 주시려고 나에게 그런 고통을 주셨구나 싶으니까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원받고 만 17년이나 지난 그때까지도 구원에 관한 찬송 몇 개 외에는 별 감동이 없었다. 남들은 은혜로운 찬송이라고 좋다고들 해도 나는 내가 음악을 해서 그런가 하여 별 느낌도 없었다. 엉뚱하게, 음악 공부한 것만을 탓하며 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 많은 찬송들이 나에게는 미래에 관한 것이거나 희망사항이었고,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노래들로만 여겼을 뿐, 내 자신에게는 전혀 실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 18:13 는 말씀이 어렴풋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하나님의 사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곡조만 읊어대고 있었으니 나에게 감동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비로소 나도 모르게 찬송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수 안에 있는 법을 내가 배워 얻었네’ 하고 시작은 했는데, 가사의 순서가 뒤죽박죽되어 한번 제대로 불러 보려고 찾으니까 책이 없었다. 이 책 저 책을 한참 뒤져서 마침 그 곡을 찾았더니 무슨 보물이나 발견한 듯이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주님이 날 찾으셨을 때는 이보다 더 기쁘셨겠지.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324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465장)
양 아흔아홉 마리는 우리에 있으나 (191장)
내 주는 살아 계시고 날 위해 비심을 (16장)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169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410장)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221장)



감상적이던 찬송이 씩씩한 행진곡으로 변했다. 끝없이 스며 나오는 찬송을 부르며 이때를 위하여 그동안 그렇게 많은 찬송을 익혀 두었었나 하고 다시 놀랐다. 구원받은 지 만 17년 만에 맛본, 구원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의 “기쁘고 기쁜 날”이었다.

그 날 이후 오늘 이 순간까지 눈에 보이는 상황은 더 어려워져 가고 있을지 모르나, 넘쳐나는 기쁨으로 인한 감사함은 오히려 커져만 간다. 그럴수록 더욱 더 범사에 그를 인정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신다.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함께하지는 못 하지만 늘 시대를 앞서 가시는 주님의 신묘막측한 메시지에 마음을 함께하고자 한다. 그리고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고 사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항상 내 마음을 울리는 어느 분의 글을 덧붙인다.



생이별로 못 만난 날
너무나 오랜 세월
애타게도 보고픈 그 얼굴들
떠나던 날 못 데려온
사연이 죄밑 되어
한 없이 뉘우쳐도 용서 안돼
보고픈 형님 누나 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