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사상에 젖었던 어린 시절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저희 부모님은 아들을 얻을 때까지 자식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위로 누나가 여섯이나 되고 밑으로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을 둔 2남 7녀의 장남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60년대 초에 어머니께서 어린 저를 안고 대구 2층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제가 태어났을 즈음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부모님의 사업은 어려워졌고, 재산을 모두 잃고 판잣집으로 옮겨야 했고,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고생하고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재산과 아들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시며 아들로 위로 받고 사셨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경조사나 특히 제사에는 저를 빼놓지 않고 데리고 다니시며 집안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또 어머니는 때만 되면 절에 가셔서 제 이름을 올려 두고 기도하셨고, 매년 초에는 점을 보고 와서 식구들의 한 해 운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가끔씩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에, 우리 집의 옆집이 헐리고 어느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어린 때는 재미 삼아 주일학교에 다녔고, 철이 들어서는 바로 위의 누나를 따라 동네에 있는 한 교회에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은 왜 그리 소란한지, 집 옆에 있는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만 되면, 특히 어두운 저녁에 기도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이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지만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평안한 누나의 모습
그러던 중에 천주교 재단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나를 성당에까지 데려가기도 했던 다섯째 누나(용복)가 대학에 들어가고 어느 날인가부터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넷째, 다섯째 누나는 모두 교육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성실하고 근면했던 넷째 누나가 성경 말씀을 듣고 온 어느 날부터인가 행동이 좀 다르게 변했고, 다섯째 누나도 그러면서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졌습니다.
일요일에 어디에 갔다 오기만 하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2) 라는 말씀은 2천 년 전에 없어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7-8 )는 말씀은 세상 끝의 징조가 그러하다는 것,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말씀은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등, 이스라엘과 세상 끝날과 그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제가 철없는 사춘기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마음속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지 하는 아주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외면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척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약소국들이 독립한 것을 생각하면 세상 역사를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섯째 누나의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지자 미신적인 토속 신앙에 빠져 있고 조금은 다혈질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예수 귀신이 붙었다며 다섯째 누나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노발대발하셨고, 성경책을 찢어 아궁이에 넣어 버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눈에 띄는 곳에는 성경책을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누나가 늦도록 집에 오지 않으면, 어려도 남자라며 중학생인 나와 초등학생인 남동생에게 누나를 찾아오라고 호령하셨습니다. 불같은 성격이신 어머니와 함께 밤에 누나가 다닌다는 교회가 있는 동네로 누나를 찾으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누나는 졸업 후 성주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교회 모임에 참석한 뒤 늦게야 오고, 집에도 불규칙적으로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의 불협화음으로 집안에는 시끄러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월을 꽤 오랫동안 지내오면서도 누나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얼굴은 항상 평안해 보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현실처럼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이 오랫동안 지하 굴속에 갇혀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과 꼭 같았는데, 굴속에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나병환자의 얼굴이어서 깜짝 놀라 깼습니다. 그러나 꿈속 누나의 얼굴 모습은 무척이나 평안해 보였습니다. 참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평안하고 온화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바라보니, 외형이 정상인 내 속에는 평안함이 전혀 없어 대조적이었습니다. 누나의 마음속에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 저는 바로 누나에게 교회 모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갈등과 해결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나온 그 주 일요일에 대구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2층 집회 장소에 앉았습니다. 계단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는데,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나와서 다양한 몸동작을 취하면서 힘차게 설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일반 교회에서 느꼈던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고 좀 다르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무렵 중학생인 남동생도 누나를 따라 모임에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누나는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세상 끝날의 징조와 복잡한 중동의 정세나 휴거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만 되면 시골 작은집에 며칠씩 놀러갔었는데, 여름에 매일 이 산 저 산으로 소를 먹이러 다녔습니다. 그때 본 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인간이 만든 어떤 위대한 과학의 힘도 웅장한 자연을 만든 능력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자연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분명히 누군가가 어떤 힘으로 만들었을 것이 확실했습니다. 만일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를 만든 창조주라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습니다. 또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무엇이 누나의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뒤 대구 교육회관에서 전도집회가 있다고 하여 제 발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권 목사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정리되면서 성경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했고, 나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기 전날 목사님께서는 오늘 밤에 집에 가서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시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제가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구원해 달라는 마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마지막이었던 다음 날 구원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해서 들으려고 해도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강연 시간 내내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노력했는데 마지막 날 해답을 듣지 못해서 허탈했습니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집회 후 답답한 마음에 대구 교회 앞의 산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뒤적이면서 읽었습니다.
그 후로는 교회에서 나온 크고 작은 여러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누나가 있는지 한 번씩 확인하고는 아직 휴거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놓기도 했습니다.
누나는 제가 대학교 여름방학을 맞을 때마다 성경탐구모임 일정을 조용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만은 끝까지 교회로부터 지키려 하셨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일주일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성경탐구보임에 갈 자신이 없어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마침 함께 자주 산행하던 학과 친구들과 방학을 맞아 일주일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께는 14박 15일간 여행을 떠난다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행 마지막 여정인 울진에서 친구들은 모두 대구집으로 돌아 갔고, 저만 혼자 배낭을 메고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강릉의 한 여인숙에서 일박을 하고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13회 수양회가 시작되는 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누나가 벌써 자리를 잡아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중반을 향해가면서부터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숨는다고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 덩어리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권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죄 문제를 예수님이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여러 말씀들을 들었지만, 내 죄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제불능인가 보다 하고 이 죄 덩어리를 구원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 다 포기하고 혼자 대구로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마지막 날 밤은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침례식 전에 다른 강사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습니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은 다 들었는데도 저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설교도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누나가 일단 설교를 한번 들어보라고 하여 그냥 앉아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모두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강사는 히브리서 9, 10장에 나오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예수님의 몸으로 드리는 영원한 제사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설교 소리는 제 귀를 스쳐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사실이 내 마음속에서 현재의 일로 이루어졌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 놓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지금을 보시는 것처럼, 그 사실이 지금 저에게 현재의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일던 사나운 바다의 풍랑들이 잠잠해지고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찬송가 84장의 3절이 제 마음과 꼭 같았습니다. 그 뒤로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는 말씀이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는 말씀들이 모두 제게 해당되는 말씀이었고, 전에 들을 때와는 달리 보였습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강사님이 구원받은 사람을 확인하셨는데 저는 좀 머뭇거리며 일어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어떤 한 구절의 말씀으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그것은 저의 경우와 비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침례 받는 것도 머뭇거렸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가 침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누나는 제게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임시로 만들어진 큰 침례장에는 많은 성도들이 둘러서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침례 받고 나오니, 이상하게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고 몸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볍고 마음도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그 기쁨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기뻤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침례가 끝나고 성찬식이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함께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다른 사람들이 볼까 싶어 남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수양회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 버스에서 차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전에는 부럽게만 보였던 교수님들도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일요일에 모임집에 가보니, 모이는 장소가 새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일요일마다 전도인이 설교를 하셨는데 어느 날은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죄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되었고, 감사하는 마음이 그제서야 우러났습니다. 갓 구원받았을 때는 구원받게 된 성경 구절이 분명히 있는 다른 사람과 제 자신이 비교되어 저의 구원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 같이 큰 구원을 제게 주셨음에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5개월 후인 1982년 1월 초에 저는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소에서도 포켓 성경을 지니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마다 성경을 읽었고, 전남 고흥의 경찰서에 배치 받아 근무하면서도 죽 성경을 읽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성경에는 온통 나를 구원해 주신 말씀들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흥은 섬이 많아서 유인도의 출장소에 파견 나가 몇 개월씩 근무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찬송가 84장(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4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75장(저 높고 푸른 하늘과)을 자주 불렀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목청껏 크게 부르는 노래 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서 사라지고는 했지만 말입니다.
제대 후 4학년에 복학하여 1985년에 졸업을 하면서 교직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에도 구원받은 학생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학생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대구 교회에서 모임의 심부름하는 일을 하라는 명을 받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예전과 달리 국내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줄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도 소가 고삐에 잡혀 끌려오듯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누나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우리집 같은 분위기에서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하기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도 저에게 교회에 가자거나 구원받아야 된다고 강요해서 거부감이 들게 하지 않고 제게 스스로 찾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면서, 지혜롭게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해준 누나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느껴져,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유교 사상에 젖었던 어린 시절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저희 부모님은 아들을 얻을 때까지 자식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위로 누나가 여섯이나 되고 밑으로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을 둔 2남 7녀의 장남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60년대 초에 어머니께서 어린 저를 안고 대구 2층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제가 태어났을 즈음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부모님의 사업은 어려워졌고, 재산을 모두 잃고 판잣집으로 옮겨야 했고,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고생하고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재산과 아들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시며 아들로 위로 받고 사셨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경조사나 특히 제사에는 저를 빼놓지 않고 데리고 다니시며 집안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또 어머니는 때만 되면 절에 가셔서 제 이름을 올려 두고 기도하셨고, 매년 초에는 점을 보고 와서 식구들의 한 해 운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가끔씩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에, 우리 집의 옆집이 헐리고 어느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어린 때는 재미 삼아 주일학교에 다녔고, 철이 들어서는 바로 위의 누나를 따라 동네에 있는 한 교회에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은 왜 그리 소란한지, 집 옆에 있는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만 되면, 특히 어두운 저녁에 기도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이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지만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평안한 누나의 모습
그러던 중에 천주교 재단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나를 성당에까지 데려가기도 했던 다섯째 누나(용복)가 대학에 들어가고 어느 날인가부터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넷째, 다섯째 누나는 모두 교육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성실하고 근면했던 넷째 누나가 성경 말씀을 듣고 온 어느 날부터인가 행동이 좀 다르게 변했고, 다섯째 누나도 그러면서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졌습니다.
일요일에 어디에 갔다 오기만 하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2) 라는 말씀은 2천 년 전에 없어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7-8 )는 말씀은 세상 끝의 징조가 그러하다는 것,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말씀은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등, 이스라엘과 세상 끝날과 그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제가 철없는 사춘기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마음속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지 하는 아주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외면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척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약소국들이 독립한 것을 생각하면 세상 역사를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섯째 누나의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지자 미신적인 토속 신앙에 빠져 있고 조금은 다혈질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예수 귀신이 붙었다며 다섯째 누나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노발대발하셨고, 성경책을 찢어 아궁이에 넣어 버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눈에 띄는 곳에는 성경책을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누나가 늦도록 집에 오지 않으면, 어려도 남자라며 중학생인 나와 초등학생인 남동생에게 누나를 찾아오라고 호령하셨습니다. 불같은 성격이신 어머니와 함께 밤에 누나가 다닌다는 교회가 있는 동네로 누나를 찾으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누나는 졸업 후 성주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교회 모임에 참석한 뒤 늦게야 오고, 집에도 불규칙적으로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의 불협화음으로 집안에는 시끄러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월을 꽤 오랫동안 지내오면서도 누나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얼굴은 항상 평안해 보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현실처럼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이 오랫동안 지하 굴속에 갇혀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과 꼭 같았는데, 굴속에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나병환자의 얼굴이어서 깜짝 놀라 깼습니다. 그러나 꿈속 누나의 얼굴 모습은 무척이나 평안해 보였습니다. 참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평안하고 온화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바라보니, 외형이 정상인 내 속에는 평안함이 전혀 없어 대조적이었습니다. 누나의 마음속에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 저는 바로 누나에게 교회 모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갈등과 해결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나온 그 주 일요일에 대구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2층 집회 장소에 앉았습니다. 계단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는데,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나와서 다양한 몸동작을 취하면서 힘차게 설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일반 교회에서 느꼈던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고 좀 다르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무렵 중학생인 남동생도 누나를 따라 모임에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누나는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세상 끝날의 징조와 복잡한 중동의 정세나 휴거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만 되면 시골 작은집에 며칠씩 놀러갔었는데, 여름에 매일 이 산 저 산으로 소를 먹이러 다녔습니다. 그때 본 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인간이 만든 어떤 위대한 과학의 힘도 웅장한 자연을 만든 능력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자연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분명히 누군가가 어떤 힘으로 만들었을 것이 확실했습니다. 만일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를 만든 창조주라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습니다. 또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무엇이 누나의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뒤 대구 교육회관에서 전도집회가 있다고 하여 제 발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권 목사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정리되면서 성경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했고, 나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기 전날 목사님께서는 오늘 밤에 집에 가서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시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제가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구원해 달라는 마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마지막이었던 다음 날 구원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해서 들으려고 해도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강연 시간 내내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노력했는데 마지막 날 해답을 듣지 못해서 허탈했습니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집회 후 답답한 마음에 대구 교회 앞의 산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뒤적이면서 읽었습니다.
그 후로는 교회에서 나온 크고 작은 여러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누나가 있는지 한 번씩 확인하고는 아직 휴거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놓기도 했습니다.
누나는 제가 대학교 여름방학을 맞을 때마다 성경탐구모임 일정을 조용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만은 끝까지 교회로부터 지키려 하셨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일주일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성경탐구보임에 갈 자신이 없어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마침 함께 자주 산행하던 학과 친구들과 방학을 맞아 일주일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께는 14박 15일간 여행을 떠난다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행 마지막 여정인 울진에서 친구들은 모두 대구집으로 돌아 갔고, 저만 혼자 배낭을 메고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강릉의 한 여인숙에서 일박을 하고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13회 수양회가 시작되는 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누나가 벌써 자리를 잡아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중반을 향해가면서부터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숨는다고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 덩어리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권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죄 문제를 예수님이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여러 말씀들을 들었지만, 내 죄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제불능인가 보다 하고 이 죄 덩어리를 구원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 다 포기하고 혼자 대구로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마지막 날 밤은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침례식 전에 다른 강사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습니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은 다 들었는데도 저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설교도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누나가 일단 설교를 한번 들어보라고 하여 그냥 앉아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모두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강사는 히브리서 9, 10장에 나오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예수님의 몸으로 드리는 영원한 제사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설교 소리는 제 귀를 스쳐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사실이 내 마음속에서 현재의 일로 이루어졌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 놓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지금을 보시는 것처럼, 그 사실이 지금 저에게 현재의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일던 사나운 바다의 풍랑들이 잠잠해지고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찬송가 84장의 3절이 제 마음과 꼭 같았습니다. 그 뒤로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는 말씀이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는 말씀들이 모두 제게 해당되는 말씀이었고, 전에 들을 때와는 달리 보였습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강사님이 구원받은 사람을 확인하셨는데 저는 좀 머뭇거리며 일어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어떤 한 구절의 말씀으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그것은 저의 경우와 비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침례 받는 것도 머뭇거렸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가 침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누나는 제게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임시로 만들어진 큰 침례장에는 많은 성도들이 둘러서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침례 받고 나오니, 이상하게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고 몸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볍고 마음도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그 기쁨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기뻤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침례가 끝나고 성찬식이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함께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다른 사람들이 볼까 싶어 남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수양회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 버스에서 차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전에는 부럽게만 보였던 교수님들도 불쌍하게만 보였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일요일에 모임집에 가보니, 모이는 장소가 새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일요일마다 전도인이 설교를 하셨는데 어느 날은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죄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되었고, 감사하는 마음이 그제서야 우러났습니다. 갓 구원받았을 때는 구원받게 된 성경 구절이 분명히 있는 다른 사람과 제 자신이 비교되어 저의 구원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 같이 큰 구원을 제게 주셨음에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5개월 후인 1982년 1월 초에 저는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소에서도 포켓 성경을 지니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마다 성경을 읽었고, 전남 고흥의 경찰서에 배치 받아 근무하면서도 죽 성경을 읽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성경에는 온통 나를 구원해 주신 말씀들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흥은 섬이 많아서 유인도의 출장소에 파견 나가 몇 개월씩 근무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찬송가 84장(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4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75장(저 높고 푸른 하늘과)을 자주 불렀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목청껏 크게 부르는 노래 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서 사라지고는 했지만 말입니다.
제대 후 4학년에 복학하여 1985년에 졸업을 하면서 교직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에도 구원받은 학생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학생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대구 교회에서 모임의 심부름하는 일을 하라는 명을 받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예전과 달리 국내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줄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도 소가 고삐에 잡혀 끌려오듯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누나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우리집 같은 분위기에서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하기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도 저에게 교회에 가자거나 구원받아야 된다고 강요해서 거부감이 들게 하지 않고 제게 스스로 찾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면서, 지혜롭게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해준 누나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느껴져,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