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타향에서 꾸린 가정
저는 1971년, 독일에 간호사로 갔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저는 외국에 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프 지나 타임 지 같은 잡지들을 가지고 다녔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도 다녔습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꼴로 미국 영화들을 보러 극장을 다녔습니다. 그야말로 외국은 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한 한국을 보다가 유럽의 알프스 산 같은 곳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요. 또 이탈리아는 얼마나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정말 잘 사는 나라라고 하니까 꼭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을 구경할 마땅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간호사들이 독일, 미국, 캐나다 등 외국으로 많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나도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외에서 취업하면 외국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중학생 때부터 커서 간호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학교의 간호학과에 들어가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 후 1년 동안 메디컬센터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후에 독일 해외개발공사를 통해서 독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 가서는 월급을 받으면 제가 원하는 대로 외국 구경을 했습니다.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없는 다른 간호사들은 번 돈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구경하러 다니지 못했지만 저희 집은 제가 돈을 보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월급을 받으면 한 달간 휴가를 받아서 이탈리아, 프랑스 등 인접 국가들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박 씨를 알게 되었고 그와 다른 두 명의 남자들이 한국인 간호사가 많던 제가 있던 병원으로 놀러오고는 했습니다. 타지에서 서로 가진 것 없이 지내던 때라, 병원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던 다섯 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그 사람들도 같이 밥을 지어 먹으며 인사도 나누고 서로 이국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습니다.
외국 타향 생활에 외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게 된 박 씨와 빨리 정이 들었고, 3개월 만에 약혼하고 2개월 만에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제가 독일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1년만 있다 오겠다고 해서 유럽 여행하는 셈 치고 보냈더니, 갑자기 부모 없는 자식 같이 멀리서 자기들끼리 결혼한다고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표를 사 보낼 테니 당장 들어오라고 했지만, 저희 둘은 결혼 약속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주위 아는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은 가까운 교회에서 독일 목사의 주례 하에 치렀습니다.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저는 기독교와는 무관하게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살면서 교회 한 번 나가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가끔 절에 다니셨고, 할머니는 간혹 점을 치러 가시고는 했습니다. 남편은 총각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에서 결혼하고 8년을 살다가 1979년에 미국에 간호사 자격으로 취업 이민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인디아나 주에서 지냈는데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내리고 추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도 없어서 지내기 힘들어서 LA로 가기로 하고, 차에 짐을 싣고 가족들과 일주일을 걸려서 캘리포니아 주 LA로 이사를 왔습니다.
미국은 다른 주로 옮겨가서 간호사 일을 하려면 시험을 다시 봐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정식 간호사였지만, 미국에 와서는 양로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했습니다. 미국에는 여러 단계의 간호사 자격이 있습니다. LA에 와서도 석 달 정도 양로원에서 일하다가 시험을 봐서 정식 간호사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하지만 간호보조사보다는 윗 단계인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간 집회
1981년 즈음이었는데, 그때까지 저는 남편과 함께 일반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말을 쓰면서 밥도 같이 먹는 친교의 목적으로 일요일에 교회에 다녔는데 남자들의 경우 사업상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한인 사회에 어울리기 위한 사교적인 목적으로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공부해 보겠다는 마음은 없었고, 성경책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냥 일요일에 왔다갔다만 했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차라리 우리에게 당신을 한 번 보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좀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전도사에게 물어 보니 침례 교회에 가면 성경을 잘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침례 교회에 다녔습니다. 석달 정도 다니고 있었을 때, 우연히 신문에서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소식을 보았습니다.
당시 한인 신문에는 부흥회 관련 소식이 실리고는 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신문을 보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갑자기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기사에는 열 개 정도의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중동 사태, 이스라엘, 세계 종말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은 구원을 아느냐,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이 나와 있었습니다. 참 흥미로웠습니다.
집회 장소는 파라마운트 시였습니다. 당시 저는 코리아타운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었는데, 파라마운트 시까지는 40분 정도를 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집회 시간은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였는데, 그때 저는 병원에서 야간 11시부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회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먼저 한번 가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 남편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일요일에 꼬박꼬박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파티 같은 데에서 사회를 도맡아 할 정도로 잘 노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기사를 보더니 흥미 없다고 하지 않고 선뜻 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남편도 하나님을 많이 찾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남편은 집회 첫날 뒤에 앉아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만약 성경이 사실이면 나는 바로 지옥행이구나. 그중에서도 지옥 밑바닥에 가겠구나.’ 싶더랍니다. 그래서 ‘제대로 들어봐야겠다. 세상에서 처음 듣는 소리다.’ 싶어 둘째 날부터는 앞쪽에 앉아서 들었답니다. 그렇게 사흘, 나흘, 닷새 동안 듣고 마지막 날에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날 저녁 남편은 집에 들어오더니 서랍과 책상, 선반 위에 있던 담배와 술을 모두 버렸습니다. 저에게도 무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별 관심 없이 들어서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저 ‘그럼 나도 들어야겠다.’ 생각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집회가 끝난 뒤였습니다.
남편은 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신 집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제2회 미주 수양회 참석 차 미국에 오시면서, 수양회 일정보다 한 달 앞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LA에서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를 한 번 하셨는데, 그 집회에 남편이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권 목사님께서는 수양회를 위해 인디아나 주로 가셨다가, 수양회 후에는 뉴욕, 시카고를 죽 돌아 3주 후에 다시 LA를 올 것이라고 자신의 일정을 알려 주셨습니다.
남편은 이런 설교 말씀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면서, 만약에 이 집회를 코리아 타운에서 하면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을 테니, 권 목사님께 한 번 더 설교를 해달라고 했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에게, 3주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LA에 왔을 때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LA 집회를 한 번 더 하기로 했습니다. 그 집회에 제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밤 근무를 할 때였는데, 병원에 부탁하여 일주일 동안 휴가를 얻어 설교를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참석해서 같이 들었습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서 듣는데, 첫날 들어 보니 저도 이런 말씀은 태어나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어머나,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사교적인 목적이었지만,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들었던 성경 내용이 전부 연결되었습니다.
계속 설교를 들으면서 ‘그 말씀이 이런 의미에서 적혀 있는 것이었구나.’ 싶으면서 놀라웠고, 말씀이 하나하나 내 것이 되었습니다. 5분, 10분이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2시간이 흘러 있고는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적었던 것, 들었던 것들을 다시 성경에서 찾아보았고, 내일이 무척 기다려졌습니다. 그만큼 빨리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 내내 참석해서 앞자리에 앉아 권 목사님만 쳐다보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히브리서라든지 이사야서 44장 22절 말씀 등 여러 말씀들이 다 연결되어 갔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그림을 그리시면서 성경 속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이야기해 가셨는데,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보였지만 마지막에 제가 구원받고 보니 그 그림의 의미가 모두 확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지금 시대를 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내 자손들은 물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태어날 사람의 죄까지도 이미 2,000년 전에 해결해 놓으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었습니다. 그림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 끝까지 주님이 완전히 죄를 소멸하셨음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2) 하는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매해 지내던 제사를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피로서 모두 단번에 영원히 이루셨고 그로 인해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1981년 7월 7일에 구원받았습니다. 남편은 6월 6일에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 짓는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저희는 집회가 끝난 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고, 원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집회에 누가 인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신문을 보고 갔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설교를 참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저도 설교를 들으면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울고는 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뻘겋게 부은 것이 창피해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의 설교는 성경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 자극을 주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고, 영원한 속죄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있어도 하나로 꿰어야 완전한 목걸이가 되는데, 진주 한 알만으로는 소용이 없지요. 그는 말씀 하나 하나는 알고 있지만 꿸 줄은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율법, 십일조, 도덕적인 문제 등을 말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자극을 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 다시 다니던 교회로 돌아가 설교를 들어 보니, 그렇게 감명을 주던 설교가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머, 저게 아닌데.... 저것은 목사님이 틀렸다.’ 하며 자꾸만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상하지 않아? 전에는 저 분의 설교에 참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니 왜 저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씀이 왜 저렇지?” 하고 말했습니다. 남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오려 놓았던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신문 광고를 찾아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상황을 설명하고 당신들이 모이는 데가 혹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집회가 끝난 뒤 마지막 날, 남편과 저는 교회를 옮길 생각을 하고 권 목사님께 어디서 시무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LA 어디쯤에 교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권 목사님께서는 ‘저는 여기 살지 않습니다.’ 하시며 한국에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LA에는 교회가 없는 줄 알고 다니던 교회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도저히 설교를 못 들을 것 같아 연락처를 찾아 전화한 것이지요. 어디에 모이는 장소가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그 다음 주일부터 그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는 오렌지카운티에 있었습니다. 우리집에서는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미국의 한 교회를 빌려서 모이고 주중에는 형제자매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모였습니다. 그때는 모이는 가정이 몇 안 되어서 인원이 열서너 명 정도였습니다. 집회 때는 200명 정도가 모였고 마지막에는 구원받았다고 손 든 사람도 많았는데 집회 후 모임에 나오는 가정은 딱 두 집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와 한연수 씨 부부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저희를 보며 2만 불짜리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신문에 광고를 내는 데만 2만 불이 들었는데, 신문을 보고 온 사람이 딱 우리 부부 둘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를, 우스갯소리로 2만 불짜리 구원이라고 부르고는 했지요.
구원받은 후의 생활
그때 저는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 영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막 구원받았으니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 영원한 속죄를 받은 참 기쁨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몰랐습니다. 병원이나 집에서 일을 할 때 제 육신은 똑같이 죄를 짓고는 했습니다. 화를 내고, 필요할 때는 거짓말도 하고, 싸우고 시기하는 모습들이 이전과 똑같이 제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릅니다.
‘구원이 아닌 것일까? 구원받은 사람이 왜 바뀌지 않고 똑같이 죄를 지어?’
제 안의 속사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갈등이 계속 되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이에 전도인이 있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당시 미주 지역에는 전도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서, 혼자서 성경만 읽었습니다.
저희는 모이면 한국에서 해외로 보내온 오디오테이프에 녹음된 설교를 들었습니다. 열 다섯 명이나 스무 명의 형제자매들이 집에 모여 앉아 오디오플레이어를 크게 틀어 놓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일요일 설교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말씀 테이프를 들으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받은 것이고 육신은 아직 그대로 죄 속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는 이 육신이 조금씩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신은 단번에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백을 함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것, 그러한 내용을 요한일서 설교를 듣는 중에 알게 되었고, 갈등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주님은 항상 저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데 제가 죄를 짓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짓는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시며, 그래서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그 모든 것을 다 겪으시고 죄를 해결해 주셨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 육신의 약함과 강함, 더러움을 다 아시는 분이기에 나는 나의 주인에게 잘못했다는 자백만 하면,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는 그 말씀처럼 또 깨끗하게 정화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주님은 항상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피를 보이시면서 내 죄를 감싸 주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성경에서 그 내용을 보게 된 후에는 갈등은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일부러 죄를 지으려고 하지는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일들이 있었을 때는 자백했습니다. 그렇게 항상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멕시코 전도, 주님의 일에 쓰인다면
구원받기 전까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는 가고 살다가, 구원받고 나니 절대로 전처럼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삶의 우선순위를 교제에 두고 교제에 순종하며 움직여 살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주님을 순종한다. 그리고 교제의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항상 마음 한 곳은 허전했고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말씀에 온전히 맡기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도 항상 제가 제 삶을 주장하며 사는 것을 스스로 보았습니다. 내가, 내 생각대로,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인가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속이 허전했습니다. 주님은 흠도 없이 깨끗하게 온전히 맡기고 살아야 된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자꾸만 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 만약 지금 주님이 오시면 내가 주님 앞에 떳떳하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내놓을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멕시코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교제에 감사하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가정을 잘 꾸렸다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켰다거나, 언변이 좋다거나,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미약한 존재가 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에 쓰이라고 멕시코로 가서 전도하는 일을 하라고 하시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일하시는 것에 쓰이게 보내 주시는구나.’ 싶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예!’ 하고 멕시코로 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는 스페인어의 ‘네’, ‘아니오’도 몰랐기에 말도 통하지 않았고 한국 사람이 없어서 참 힘들었습니다. 전도하는 데는 꼭 통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희 둘만 일하기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전도집회를 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을 데려 왔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말씀을 틀어 주고 통역을 통해서 상담하고, 또 구원받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저만 멕시코 마사틀란에서 복음을 전하며 지내다가, 첫째 아들 토미가 구원받고 2011년 1월부터 멕시코로 와서 함께 지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임에 감사했습니다. 지금 토미는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이 교제가 아니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었을 뿐더러 저같이 미약한 사람이 하나님 일에 쓰일 수 있었겠는가 싶습니다. 지금은 저희 부부도 저의 건강 문제로 LA로 돌아왔지만 주님의 일에 쓰인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외국 타향에서 꾸린 가정
저는 1971년, 독일에 간호사로 갔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저는 외국에 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프 지나 타임 지 같은 잡지들을 가지고 다녔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도 다녔습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꼴로 미국 영화들을 보러 극장을 다녔습니다. 그야말로 외국은 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한 한국을 보다가 유럽의 알프스 산 같은 곳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요. 또 이탈리아는 얼마나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정말 잘 사는 나라라고 하니까 꼭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을 구경할 마땅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간호사들이 독일, 미국, 캐나다 등 외국으로 많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나도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외에서 취업하면 외국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중학생 때부터 커서 간호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학교의 간호학과에 들어가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 후 1년 동안 메디컬센터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후에 독일 해외개발공사를 통해서 독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 가서는 월급을 받으면 제가 원하는 대로 외국 구경을 했습니다.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없는 다른 간호사들은 번 돈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구경하러 다니지 못했지만 저희 집은 제가 돈을 보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월급을 받으면 한 달간 휴가를 받아서 이탈리아, 프랑스 등 인접 국가들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박 씨를 알게 되었고 그와 다른 두 명의 남자들이 한국인 간호사가 많던 제가 있던 병원으로 놀러오고는 했습니다. 타지에서 서로 가진 것 없이 지내던 때라, 병원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던 다섯 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그 사람들도 같이 밥을 지어 먹으며 인사도 나누고 서로 이국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습니다.
외국 타향 생활에 외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게 된 박 씨와 빨리 정이 들었고, 3개월 만에 약혼하고 2개월 만에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제가 독일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1년만 있다 오겠다고 해서 유럽 여행하는 셈 치고 보냈더니, 갑자기 부모 없는 자식 같이 멀리서 자기들끼리 결혼한다고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표를 사 보낼 테니 당장 들어오라고 했지만, 저희 둘은 결혼 약속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주위 아는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은 가까운 교회에서 독일 목사의 주례 하에 치렀습니다.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저는 기독교와는 무관하게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살면서 교회 한 번 나가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가끔 절에 다니셨고, 할머니는 간혹 점을 치러 가시고는 했습니다. 남편은 총각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에서 결혼하고 8년을 살다가 1979년에 미국에 간호사 자격으로 취업 이민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인디아나 주에서 지냈는데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내리고 추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도 없어서 지내기 힘들어서 LA로 가기로 하고, 차에 짐을 싣고 가족들과 일주일을 걸려서 캘리포니아 주 LA로 이사를 왔습니다.
미국은 다른 주로 옮겨가서 간호사 일을 하려면 시험을 다시 봐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정식 간호사였지만, 미국에 와서는 양로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했습니다. 미국에는 여러 단계의 간호사 자격이 있습니다. LA에 와서도 석 달 정도 양로원에서 일하다가 시험을 봐서 정식 간호사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하지만 간호보조사보다는 윗 단계인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간 집회
1981년 즈음이었는데, 그때까지 저는 남편과 함께 일반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말을 쓰면서 밥도 같이 먹는 친교의 목적으로 일요일에 교회에 다녔는데 남자들의 경우 사업상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한인 사회에 어울리기 위한 사교적인 목적으로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공부해 보겠다는 마음은 없었고, 성경책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냥 일요일에 왔다갔다만 했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차라리 우리에게 당신을 한 번 보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좀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전도사에게 물어 보니 침례 교회에 가면 성경을 잘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침례 교회에 다녔습니다. 석달 정도 다니고 있었을 때, 우연히 신문에서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소식을 보았습니다.
당시 한인 신문에는 부흥회 관련 소식이 실리고는 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신문을 보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갑자기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기사에는 열 개 정도의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중동 사태, 이스라엘, 세계 종말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은 구원을 아느냐,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이 나와 있었습니다. 참 흥미로웠습니다.
집회 장소는 파라마운트 시였습니다. 당시 저는 코리아타운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었는데, 파라마운트 시까지는 40분 정도를 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집회 시간은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였는데, 그때 저는 병원에서 야간 11시부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회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먼저 한번 가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 남편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일요일에 꼬박꼬박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파티 같은 데에서 사회를 도맡아 할 정도로 잘 노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기사를 보더니 흥미 없다고 하지 않고 선뜻 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남편도 하나님을 많이 찾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남편은 집회 첫날 뒤에 앉아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만약 성경이 사실이면 나는 바로 지옥행이구나. 그중에서도 지옥 밑바닥에 가겠구나.’ 싶더랍니다. 그래서 ‘제대로 들어봐야겠다. 세상에서 처음 듣는 소리다.’ 싶어 둘째 날부터는 앞쪽에 앉아서 들었답니다. 그렇게 사흘, 나흘, 닷새 동안 듣고 마지막 날에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날 저녁 남편은 집에 들어오더니 서랍과 책상, 선반 위에 있던 담배와 술을 모두 버렸습니다. 저에게도 무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별 관심 없이 들어서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저 ‘그럼 나도 들어야겠다.’ 생각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집회가 끝난 뒤였습니다.
남편은 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신 집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제2회 미주 수양회 참석 차 미국에 오시면서, 수양회 일정보다 한 달 앞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LA에서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를 한 번 하셨는데, 그 집회에 남편이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권 목사님께서는 수양회를 위해 인디아나 주로 가셨다가, 수양회 후에는 뉴욕, 시카고를 죽 돌아 3주 후에 다시 LA를 올 것이라고 자신의 일정을 알려 주셨습니다.
남편은 이런 설교 말씀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면서, 만약에 이 집회를 코리아 타운에서 하면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을 테니, 권 목사님께 한 번 더 설교를 해달라고 했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에게, 3주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LA에 왔을 때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LA 집회를 한 번 더 하기로 했습니다. 그 집회에 제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밤 근무를 할 때였는데, 병원에 부탁하여 일주일 동안 휴가를 얻어 설교를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참석해서 같이 들었습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서 듣는데, 첫날 들어 보니 저도 이런 말씀은 태어나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어머나,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사교적인 목적이었지만,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들었던 성경 내용이 전부 연결되었습니다.
계속 설교를 들으면서 ‘그 말씀이 이런 의미에서 적혀 있는 것이었구나.’ 싶으면서 놀라웠고, 말씀이 하나하나 내 것이 되었습니다. 5분, 10분이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2시간이 흘러 있고는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적었던 것, 들었던 것들을 다시 성경에서 찾아보았고, 내일이 무척 기다려졌습니다. 그만큼 빨리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 내내 참석해서 앞자리에 앉아 권 목사님만 쳐다보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히브리서라든지 이사야서 44장 22절 말씀 등 여러 말씀들이 다 연결되어 갔습니다. 권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그림을 그리시면서 성경 속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이야기해 가셨는데,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보였지만 마지막에 제가 구원받고 보니 그 그림의 의미가 모두 확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지금 시대를 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내 자손들은 물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태어날 사람의 죄까지도 이미 2,000년 전에 해결해 놓으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었습니다. 그림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 끝까지 주님이 완전히 죄를 소멸하셨음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2) 하는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매해 지내던 제사를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피로서 모두 단번에 영원히 이루셨고 그로 인해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1981년 7월 7일에 구원받았습니다. 남편은 6월 6일에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 짓는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저희는 집회가 끝난 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고, 원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집회에 누가 인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신문을 보고 갔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설교를 참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저도 설교를 들으면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울고는 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뻘겋게 부은 것이 창피해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의 설교는 성경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 자극을 주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고, 영원한 속죄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있어도 하나로 꿰어야 완전한 목걸이가 되는데, 진주 한 알만으로는 소용이 없지요. 그는 말씀 하나 하나는 알고 있지만 꿸 줄은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율법, 십일조, 도덕적인 문제 등을 말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자극을 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 다시 다니던 교회로 돌아가 설교를 들어 보니, 그렇게 감명을 주던 설교가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머, 저게 아닌데.... 저것은 목사님이 틀렸다.’ 하며 자꾸만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상하지 않아? 전에는 저 분의 설교에 참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니 왜 저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씀이 왜 저렇지?” 하고 말했습니다. 남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오려 놓았던 ‘성경은 사실이다’ 집회 신문 광고를 찾아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상황을 설명하고 당신들이 모이는 데가 혹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집회가 끝난 뒤 마지막 날, 남편과 저는 교회를 옮길 생각을 하고 권 목사님께 어디서 시무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LA 어디쯤에 교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권 목사님께서는 ‘저는 여기 살지 않습니다.’ 하시며 한국에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LA에는 교회가 없는 줄 알고 다니던 교회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도저히 설교를 못 들을 것 같아 연락처를 찾아 전화한 것이지요. 어디에 모이는 장소가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그 다음 주일부터 그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는 오렌지카운티에 있었습니다. 우리집에서는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미국의 한 교회를 빌려서 모이고 주중에는 형제자매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모였습니다. 그때는 모이는 가정이 몇 안 되어서 인원이 열서너 명 정도였습니다. 집회 때는 200명 정도가 모였고 마지막에는 구원받았다고 손 든 사람도 많았는데 집회 후 모임에 나오는 가정은 딱 두 집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와 한연수 씨 부부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저희를 보며 2만 불짜리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신문에 광고를 내는 데만 2만 불이 들었는데, 신문을 보고 온 사람이 딱 우리 부부 둘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를, 우스갯소리로 2만 불짜리 구원이라고 부르고는 했지요.
구원받은 후의 생활
그때 저는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 영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막 구원받았으니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 영원한 속죄를 받은 참 기쁨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몰랐습니다. 병원이나 집에서 일을 할 때 제 육신은 똑같이 죄를 짓고는 했습니다. 화를 내고, 필요할 때는 거짓말도 하고, 싸우고 시기하는 모습들이 이전과 똑같이 제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릅니다.
‘구원이 아닌 것일까? 구원받은 사람이 왜 바뀌지 않고 똑같이 죄를 지어?’
제 안의 속사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갈등이 계속 되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이에 전도인이 있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당시 미주 지역에는 전도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서, 혼자서 성경만 읽었습니다.
저희는 모이면 한국에서 해외로 보내온 오디오테이프에 녹음된 설교를 들었습니다. 열 다섯 명이나 스무 명의 형제자매들이 집에 모여 앉아 오디오플레이어를 크게 틀어 놓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일요일 설교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말씀 테이프를 들으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받은 것이고 육신은 아직 그대로 죄 속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는 이 육신이 조금씩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신은 단번에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백을 함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것, 그러한 내용을 요한일서 설교를 듣는 중에 알게 되었고, 갈등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주님은 항상 저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데 제가 죄를 짓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짓는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시며, 그래서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그 모든 것을 다 겪으시고 죄를 해결해 주셨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 육신의 약함과 강함, 더러움을 다 아시는 분이기에 나는 나의 주인에게 잘못했다는 자백만 하면,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는 그 말씀처럼 또 깨끗하게 정화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주님은 항상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피를 보이시면서 내 죄를 감싸 주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성경에서 그 내용을 보게 된 후에는 갈등은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일부러 죄를 지으려고 하지는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일들이 있었을 때는 자백했습니다. 그렇게 항상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멕시코 전도, 주님의 일에 쓰인다면
구원받기 전까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는 가고 살다가, 구원받고 나니 절대로 전처럼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삶의 우선순위를 교제에 두고 교제에 순종하며 움직여 살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주님을 순종한다. 그리고 교제의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항상 마음 한 곳은 허전했고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말씀에 온전히 맡기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도 항상 제가 제 삶을 주장하며 사는 것을 스스로 보았습니다. 내가, 내 생각대로,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인가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속이 허전했습니다. 주님은 흠도 없이 깨끗하게 온전히 맡기고 살아야 된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자꾸만 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 만약 지금 주님이 오시면 내가 주님 앞에 떳떳하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내놓을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멕시코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교제에 감사하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가정을 잘 꾸렸다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켰다거나, 언변이 좋다거나,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미약한 존재가 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에 쓰이라고 멕시코로 가서 전도하는 일을 하라고 하시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일하시는 것에 쓰이게 보내 주시는구나.’ 싶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예!’ 하고 멕시코로 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는 스페인어의 ‘네’, ‘아니오’도 몰랐기에 말도 통하지 않았고 한국 사람이 없어서 참 힘들었습니다. 전도하는 데는 꼭 통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희 둘만 일하기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전도집회를 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을 데려 왔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말씀을 틀어 주고 통역을 통해서 상담하고, 또 구원받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저만 멕시코 마사틀란에서 복음을 전하며 지내다가, 첫째 아들 토미가 구원받고 2011년 1월부터 멕시코로 와서 함께 지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임에 감사했습니다. 지금 토미는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이 교제가 아니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었을 뿐더러 저같이 미약한 사람이 하나님 일에 쓰일 수 있었겠는가 싶습니다. 지금은 저희 부부도 저의 건강 문제로 LA로 돌아왔지만 주님의 일에 쓰인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