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없는 종교 생활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을까? 죽으면 허무하게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과 어울려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기타를 배우고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등산을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회사에 가서 일하고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그리고 잠자는,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은 반복된 생활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삶이 너무 허무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개를 적시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의미없는 삶을 살도록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창조주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창조주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자고 결심하여 머리를 중같이 밀어버렸습니다. 모자도 쓰지 않고 생활하면서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동안 나를 새롭게 키워 보자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다 자랐어도 원래의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으로 돌아왔을 뿐 새로운 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봄날, 꽃나무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봉오리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꽃의 꿀을 빨아먹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꽃나무도 벌도 아무런 지능이 없지만, 봄이 되면 꽃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자기의 필요에 의해 꿀을 빨아 먹는 벌로 인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로운 자연의 법칙이 우연히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저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20세 되던, 1969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본래 산골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주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하자 어머니는 저의 식사 등 뒷바라지를 위해 전주에 와서 함께 사셨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예 전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던 시점에 어머니는 몸이 심하게 약해지셨습니다. 어머니는 본래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셨는데, 교회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교파의 아주 작은 교회로 병 고치고 방언하는 한국의 어느 교파와 비슷하였습니다. 그곳에 다니며 처음으로 성경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저는 창세기 4장을 읽다가 ‘성경은 엉터리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으니 이제 겨우 가족이 4명이 된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도망가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네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불신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매주 수요일 밤과 일요일에 어머니를 부축하여 그 예배당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그곳에서 제게 다음 주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한 번도 기도를 해본 적이 없던 저는 고민을 하다 기독교 서점에 가서 <기도하는 법>이라는 책을 사서 좋은 문장을 베껴 기도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책의 기도문의 처음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베껴 작성한 기도문을 암기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 예배시간이 되어 기도를 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는 암기했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곁눈질로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른 적어둔 기도문을 꺼내서 읽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끝나자 여러 사람들이 기도를 참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의 종교 생활에서 저는 점점 더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아픈 사람의 병이 낫는 일도 있었고, 귀신 들린 할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이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교회 본부에서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저는 거기에서 그간 열망했던 방언을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물’은 침례이고 ‘성령’은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니 이제는 확실히 거듭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확신과 평안을 찾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가서 새벽기도를 했고 밤에도 기도하러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관습대로 기도를 하러 산에 가서 큰소리로 울면서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도 해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환상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음성을 듣기도 했다는데, 저에게는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예배당에서 살면서 주일학교 교사도 해보고 중고등반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거듭난 사실이 없는 괴로움
그렇게 지내던 중 1972년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대하기 전 서울에 있는 그 교파의 신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제대하고 나면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약속하고 학비는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지원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목표는 분명히 정해졌습니다. 목사가 되어 나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입대 후에도 열심히 군인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일요 예배가 끝나고 고참병들은 따뜻한 난로 앞을 차지하고 졸병들은 그 뒤에서 난롯불을 쬐고 있었는데, 키가 큰 한 일등병이 저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어이, 이등병 자네는 거듭났는가?”하고 물어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사람은 지사 교회에서 구원받고 나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한 김 형제였습니다. 그 물음에 “예. 거듭났는데요.”라고 대답하자 “어떻게 거듭났는데?”하고 다시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니던 교회의 교리대로 침례도 받고 방언도 했으니 거듭났다고 하니 “에이, 그것이 거듭난 것이라고? 참으로 거듭나면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오는데, 자네 마음에 평안이 있는가?”라고 다시 물어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후 저는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전주의 회사 연구실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친구로부터 온 편지였는데, 그 편지에 본인은 이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참으로 평안하고 감사하다며 저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으니 꼭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곰곰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참으로 평안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점검해도 제게는 평안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등병 월급을 받고 난 뒤 빵 두 개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급식으로 나온 밥이 적어서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내무반으로 가지고 와서 막 빵을 먹으려는 순간, 같은 내무반의 동료가 손을 내밀면서 빵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그 빵 두 개를 가지고 도망가서 혼자 먹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니 저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육신 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죄성과 과거에 지은 죄도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생각나는 모든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기도해보았지만 어떤 답도, 확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휴가를 나가면 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해 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하던 25일간의 첫 휴가를 받아서 전주에 왔습니다.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다니던 예배당에 가서 먹고 자면서 일주일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참으로 살아 계신다면 나에게 답을 주십시오.”라고 매달려 보았지만, 무정하게도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는 집에 들어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답답함을 이야기하자 저를 전주 교회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때가 1973년 10월이었고 전주 교회의 초창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계시던 김 집사님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그는 많은 성경 구절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 앞에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며 3년간이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고 난 며칠 후, 지사 교회에서 오신 분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설교를 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외식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에만 충실한 말씀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그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분 역시 저에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라 불렀는데 그분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떤 분은 이사야서에서 구원받았고, 어떤 분은 요한복음에서 구원받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아! 이사야서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이튿날 성경책 한 권만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 밤, 전주 시내 변두리의 집에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 끝의 완산 칠봉산까지 오랜 시간 걸으면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죄인일 수가 없었습니다. 문학에 관심이 있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글을 써왔고 그 글들을 본 친구들은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하곤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니 그것도 위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과는 상반되는 좋은 단어들만 나열하여 사람들이 읽기 좋게 했을 뿐, 하나님 앞에는 다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첫 휴가 25일이 다 지나갈 무렵, 하도 답답하여 전주 교회의 김 집사님을 다시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집사님은 마태복음 5장을 말씀하시면서 한쪽 손을 자르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한쪽 손을 자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바로 이 자리에서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김 집사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이 담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내용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전 교회에서 이미 습관화되어 있던, 가슴 속에 화끈하고 뜨거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아, 이곳이 진짜 복음을 전하는 곳이구나.”라고만 생각했을 뿐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기쁜 날
너무나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귀대했지만 저는 날마다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잠을 자기 전에는 지옥불이 아른거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입맛도 없었습니다. 자나 깨나 거듭나는 문제만 생각했습니다. 김 집사님이 이야기해 주던 복음 구절들을 적어서 모조리 외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싶었지만 죄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니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격 훈련을 갔는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도르래를 타고 내려가 강물에 뛰어 내리는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밑의 파란 강물을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정말 간절히 ‘하나님, 여기서 죽으면 저는남 지옥에 갑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저의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제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얼굴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소대장님이 저를 불러서 혹시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제 개인의 다른 문제이니 소대장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권신찬 목사님께서 극동방송국에서 ‘은혜의 아침’이라는 방송을 하고 계셨는데, 제가 군 생활하던 원주에서는 그 방송을 청취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끝에 권 목사님께 저의 답답한 심정을 5장이나 되는 긴 편지로 썼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답을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고대하던 답장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보았는데, “시간을 내어 극동방송국에 한번 들리십시오. 권신찬.”이라고만 쓰여 있어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군에 몸담고 있는 병사가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 서적을 읽으며 평안과 확신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복음 구절을 알고 있는데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괴로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겨우 몇 십 센티 안 되는 거리가 왜 그렇게 멀기만 했던지.
1974년 2월, 제가 속해있는 통신대대에서 찬송가 시합이 열렸습니다. 대대장이 기독교인이라 찬송가 시합에서 1등한 중대의 참가자는 일주일간의 특별 휴가를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대에서는 군인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4명이 선발되었는데 그 네 명에 저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행군 나팔 소리로 주의 호령 났으니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나가세” (찬송가 402장) 하는 가사의 찬송가를 군가처럼 씩씩하게 불렀습니다. 곡 선정이 좋았고 군인들에게 딱 맞는 찬송가여서 우리 중대가 1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임시 휴가를 받자마자 곧바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물어 물어서 버스를 타고 권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강당에 도착했습니다. 강당의 1층은 가득 차 있었고 목사님은 이미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2층에서 빈자리를 겨우 찾아 그곳에 앉아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날의 설교는 히브리서 9장 내용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제사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는 그 모든 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의 그림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 라는 말씀 내용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뒤 부활하시고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자신의 피로써 진짜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그의 피를 뿌려놓았으니, 우리의 죄는 이미 하나님 앞에 깨끗이 용서되었습니다.”라고 힘주어 외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제 마음속에서 믿어졌고 주님의 크신 사랑이 제 마음을 적셔 감사함이 넘쳐났습니다. 그와 함께 기쁨의 눈물이 계속 흘려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뿌려져 있는 주님의 피로 인해 저는 언제든지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저는 계속 찬송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찬송가 189장 찬송가를 부르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의 생애를 주님께 바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1974년 2월의 그날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쁜 날이었습니다.
평안 없는 종교 생활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을까? 죽으면 허무하게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과 어울려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기타를 배우고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등산을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회사에 가서 일하고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그리고 잠자는,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은 반복된 생활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삶이 너무 허무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개를 적시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의미없는 삶을 살도록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창조주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창조주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자고 결심하여 머리를 중같이 밀어버렸습니다. 모자도 쓰지 않고 생활하면서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동안 나를 새롭게 키워 보자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다 자랐어도 원래의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으로 돌아왔을 뿐 새로운 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봄날, 꽃나무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봉오리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꽃의 꿀을 빨아먹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꽃나무도 벌도 아무런 지능이 없지만, 봄이 되면 꽃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자기의 필요에 의해 꿀을 빨아 먹는 벌로 인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로운 자연의 법칙이 우연히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저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20세 되던, 1969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본래 산골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주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하자 어머니는 저의 식사 등 뒷바라지를 위해 전주에 와서 함께 사셨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예 전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던 시점에 어머니는 몸이 심하게 약해지셨습니다. 어머니는 본래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셨는데, 교회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교파의 아주 작은 교회로 병 고치고 방언하는 한국의 어느 교파와 비슷하였습니다. 그곳에 다니며 처음으로 성경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저는 창세기 4장을 읽다가 ‘성경은 엉터리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으니 이제 겨우 가족이 4명이 된 것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도망가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네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불신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매주 수요일 밤과 일요일에 어머니를 부축하여 그 예배당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그곳에서 제게 다음 주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한 번도 기도를 해본 적이 없던 저는 고민을 하다 기독교 서점에 가서 <기도하는 법>이라는 책을 사서 좋은 문장을 베껴 기도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책의 기도문의 처음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베껴 작성한 기도문을 암기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 예배시간이 되어 기도를 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는 암기했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곁눈질로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른 적어둔 기도문을 꺼내서 읽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끝나자 여러 사람들이 기도를 참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의 종교 생활에서 저는 점점 더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아픈 사람의 병이 낫는 일도 있었고, 귀신 들린 할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이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교회 본부에서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저는 거기에서 그간 열망했던 방언을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물’은 침례이고 ‘성령’은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니 이제는 확실히 거듭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확신과 평안을 찾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가서 새벽기도를 했고 밤에도 기도하러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관습대로 기도를 하러 산에 가서 큰소리로 울면서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도 해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환상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음성을 듣기도 했다는데, 저에게는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예배당에서 살면서 주일학교 교사도 해보고 중고등반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거듭난 사실이 없는 괴로움
그렇게 지내던 중 1972년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대하기 전 서울에 있는 그 교파의 신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제대하고 나면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약속하고 학비는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지원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목표는 분명히 정해졌습니다. 목사가 되어 나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입대 후에도 열심히 군인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일요 예배가 끝나고 고참병들은 따뜻한 난로 앞을 차지하고 졸병들은 그 뒤에서 난롯불을 쬐고 있었는데, 키가 큰 한 일등병이 저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어이, 이등병 자네는 거듭났는가?”하고 물어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사람은 지사 교회에서 구원받고 나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한 김 형제였습니다. 그 물음에 “예. 거듭났는데요.”라고 대답하자 “어떻게 거듭났는데?”하고 다시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니던 교회의 교리대로 침례도 받고 방언도 했으니 거듭났다고 하니 “에이, 그것이 거듭난 것이라고? 참으로 거듭나면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오는데, 자네 마음에 평안이 있는가?”라고 다시 물어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후 저는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전주의 회사 연구실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친구로부터 온 편지였는데, 그 편지에 본인은 이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참으로 평안하고 감사하다며 저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으니 꼭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곰곰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참으로 평안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점검해도 제게는 평안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등병 월급을 받고 난 뒤 빵 두 개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급식으로 나온 밥이 적어서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내무반으로 가지고 와서 막 빵을 먹으려는 순간, 같은 내무반의 동료가 손을 내밀면서 빵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른 그 빵 두 개를 가지고 도망가서 혼자 먹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니 저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육신 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죄성과 과거에 지은 죄도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생각나는 모든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기도해보았지만 어떤 답도, 확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휴가를 나가면 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해 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하던 25일간의 첫 휴가를 받아서 전주에 왔습니다.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다니던 예배당에 가서 먹고 자면서 일주일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참으로 살아 계신다면 나에게 답을 주십시오.”라고 매달려 보았지만, 무정하게도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는 집에 들어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답답함을 이야기하자 저를 전주 교회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때가 1973년 10월이었고 전주 교회의 초창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계시던 김 집사님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그는 많은 성경 구절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 앞에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며 3년간이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고 난 며칠 후, 지사 교회에서 오신 분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설교를 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외식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에만 충실한 말씀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그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분 역시 저에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라 불렀는데 그분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떤 분은 이사야서에서 구원받았고, 어떤 분은 요한복음에서 구원받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아! 이사야서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이튿날 성경책 한 권만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 밤, 전주 시내 변두리의 집에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 끝의 완산 칠봉산까지 오랜 시간 걸으면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죄인일 수가 없었습니다. 문학에 관심이 있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글을 써왔고 그 글들을 본 친구들은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하곤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니 그것도 위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과는 상반되는 좋은 단어들만 나열하여 사람들이 읽기 좋게 했을 뿐, 하나님 앞에는 다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첫 휴가 25일이 다 지나갈 무렵, 하도 답답하여 전주 교회의 김 집사님을 다시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집사님은 마태복음 5장을 말씀하시면서 한쪽 손을 자르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한쪽 손을 자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바로 이 자리에서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김 집사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이 담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내용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전 교회에서 이미 습관화되어 있던, 가슴 속에 화끈하고 뜨거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아, 이곳이 진짜 복음을 전하는 곳이구나.”라고만 생각했을 뿐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기쁜 날
너무나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귀대했지만 저는 날마다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잠을 자기 전에는 지옥불이 아른거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입맛도 없었습니다. 자나 깨나 거듭나는 문제만 생각했습니다. 김 집사님이 이야기해 주던 복음 구절들을 적어서 모조리 외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싶었지만 죄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니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격 훈련을 갔는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도르래를 타고 내려가 강물에 뛰어 내리는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밑의 파란 강물을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정말 간절히 ‘하나님, 여기서 죽으면 저는남 지옥에 갑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저의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제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얼굴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소대장님이 저를 불러서 혹시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제 개인의 다른 문제이니 소대장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권신찬 목사님께서 극동방송국에서 ‘은혜의 아침’이라는 방송을 하고 계셨는데, 제가 군 생활하던 원주에서는 그 방송을 청취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끝에 권 목사님께 저의 답답한 심정을 5장이나 되는 긴 편지로 썼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답을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고대하던 답장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보았는데, “시간을 내어 극동방송국에 한번 들리십시오. 권신찬.”이라고만 쓰여 있어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군에 몸담고 있는 병사가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 서적을 읽으며 평안과 확신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복음 구절을 알고 있는데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괴로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겨우 몇 십 센티 안 되는 거리가 왜 그렇게 멀기만 했던지.
1974년 2월, 제가 속해있는 통신대대에서 찬송가 시합이 열렸습니다. 대대장이 기독교인이라 찬송가 시합에서 1등한 중대의 참가자는 일주일간의 특별 휴가를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대에서는 군인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4명이 선발되었는데 그 네 명에 저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행군 나팔 소리로 주의 호령 났으니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나가세” (찬송가 402장) 하는 가사의 찬송가를 군가처럼 씩씩하게 불렀습니다. 곡 선정이 좋았고 군인들에게 딱 맞는 찬송가여서 우리 중대가 1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임시 휴가를 받자마자 곧바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물어 물어서 버스를 타고 권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강당에 도착했습니다. 강당의 1층은 가득 차 있었고 목사님은 이미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2층에서 빈자리를 겨우 찾아 그곳에 앉아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날의 설교는 히브리서 9장 내용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제사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는 그 모든 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의 그림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 라는 말씀 내용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뒤 부활하시고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자신의 피로써 진짜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그의 피를 뿌려놓았으니, 우리의 죄는 이미 하나님 앞에 깨끗이 용서되었습니다.”라고 힘주어 외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제 마음속에서 믿어졌고 주님의 크신 사랑이 제 마음을 적셔 감사함이 넘쳐났습니다. 그와 함께 기쁨의 눈물이 계속 흘려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뿌려져 있는 주님의 피로 인해 저는 언제든지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저는 계속 찬송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찬송가 189장 찬송가를 부르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의 생애를 주님께 바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1974년 2월의 그날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쁜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