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3살이고, 현재 수원에서 공군으로 복무 중입니다.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이 있는 군부대 안에 있으면서 교제가 더 그리웠습니다.
약 10년 전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했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하는 상황에서 저는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으러 갔고 상담해 주시는 분은 예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크고 엄청난 것,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너무나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자꾸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던 중에 성경탐구모임이 끝났습니다.
원래 교회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저는 중·고등학생 때는 아예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가끔 성경탐구모임에는 참석했지만 내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은 채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수년간 당뇨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합병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심각성을 느끼신 어머니는 구원이 확실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까지 아버지 귀에 성경 말씀과 <꿈 같은 사랑> 내용, 그리고 찬송가를 자꾸 들려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저는 제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잊고 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참석하고 성경탐구모임에도 갔습니다. 그 무렵 결국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구원 간증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채로 이별을 하니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아버지와 교제도 나누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떠나가시던 날, 저는 ‘아버지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후 교제 안의 각종 행사와 봉사 활동에 참여하며 지내다가 작년 6월에 있었던 안성 대전도집회에도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제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 저에게 확실하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도 하고 말씀도 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지난 10월 안성 대전도집회에 봉사자로 참여했습니다.
저는 전일을 참석했는데, 이번 집회에는 전일 봉사자로 참여하는 분들이 전보다 많았습니다. 거기다 며칠씩 참여하는 분들까지 합하니 봉사자가 30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교제 안의 다양한 분들을 알게 되는 것은 저에게 정말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좋았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간단한 일에도 어른들이 칭찬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셔서 기분도 좋았고 보람차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성경 찾기 도우미가 되어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옆에 앉아 성경을 찾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찾아 드리고, 간식도 챙겨 드리고, 졸려 하시면 손과 어깨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미리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식당 일에 지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옆에 있지 못하게 된 것이 신경이 쓰였는데, 일이 끝난 뒤 할아버지께서 저만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저를 찾아 주셨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말씀 시간에 할아버지께 성경 도우미를 해 드리러 갔는데 처리할 일이 있다며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에
<꿈 같은 사랑> 책자를 꼼꼼히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집회 기간 중 ‘성경은 사실이다’ 말씀을 듣다가 이사야 38장 17절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하는 말씀에서, ‘큰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그것이 양심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제 스스로가 원치 않는 죄를 속으로 너무 많이 짓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항상 제 양심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평안을 주려 하시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진짜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상태로 마지막 날 간증을 듣는 시간에, 감동을 받고 또 축하하는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당장에 내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집회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봉사자로 참여하는 동안 정말 행복하면서 뜻 깊었고 제 현재 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서울 대학생들이 교제하는 자리에서 대전도집회 후기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자매가 동생을 구원받게 하려고 인도자로 참석했다가 자신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자매는 ‘성경은 사실이다’ 말씀을 6편부터 9편까지 들어 보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자매의 말을 듣고 ‘나도 그 말씀을 들으면 구원받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교제 자리를 쫓아다녔던 저는, 12월에 있을 ‘꿈 같은 사랑 암송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범위 단락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분들은 <꿈 같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청년 형제자매들이 교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습니다. 관련된 글 몇 개를 보다가 “꿈 같은 사랑이 저에게 준 변화”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다가 구원에 의문이 생긴 분이었습니다. 저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 읽어 보니, <꿈 같은 사랑>을 107단락부터 읽던 중 자신의 믿음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어 힘을 얻고 감사하게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꿈 같은 사랑>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 장인 ‘넓고 크고 높고 깊은 사랑’부터 유심히 읽어 갔습니다. 죽 읽다 보니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해 나가야 할 나의 목표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는 죄인인 나를 이미 구원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자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때 와닿았던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전에는 구원받는 것이 내 행위가 필요한 것, 무언가 엄청난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통해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니 ‘아, 하나님. 저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군요. 이제야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들이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도,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생각나는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제 마음속에 이 찬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11월 3일 오후 4시경,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확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참 평안합니다.
저는 23살이고, 현재 수원에서 공군으로 복무 중입니다.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이 있는 군부대 안에 있으면서 교제가 더 그리웠습니다.
약 10년 전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했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하는 상황에서 저는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으러 갔고 상담해 주시는 분은 예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크고 엄청난 것,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너무나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자꾸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던 중에 성경탐구모임이 끝났습니다.
원래 교회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저는 중·고등학생 때는 아예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가끔 성경탐구모임에는 참석했지만 내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은 채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수년간 당뇨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합병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심각성을 느끼신 어머니는 구원이 확실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까지 아버지 귀에 성경 말씀과 <꿈 같은 사랑> 내용, 그리고 찬송가를 자꾸 들려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저는 제가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잊고 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참석하고 성경탐구모임에도 갔습니다. 그 무렵 결국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구원 간증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채로 이별을 하니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아버지와 교제도 나누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떠나가시던 날, 저는 ‘아버지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후 교제 안의 각종 행사와 봉사 활동에 참여하며 지내다가 작년 6월에 있었던 안성 대전도집회에도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제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 저에게 확실하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도 하고 말씀도 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지난 10월 안성 대전도집회에 봉사자로 참여했습니다.
저는 전일을 참석했는데, 이번 집회에는 전일 봉사자로 참여하는 분들이 전보다 많았습니다. 거기다 며칠씩 참여하는 분들까지 합하니 봉사자가 30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교제 안의 다양한 분들을 알게 되는 것은 저에게 정말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좋았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간단한 일에도 어른들이 칭찬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셔서 기분도 좋았고 보람차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성경 찾기 도우미가 되어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옆에 앉아 성경을 찾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찾아 드리고, 간식도 챙겨 드리고, 졸려 하시면 손과 어깨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미리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식당 일에 지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옆에 있지 못하게 된 것이 신경이 쓰였는데, 일이 끝난 뒤 할아버지께서 저만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저를 찾아 주셨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말씀 시간에 할아버지께 성경 도우미를 해 드리러 갔는데 처리할 일이 있다며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에
<꿈 같은 사랑> 책자를 꼼꼼히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집회 기간 중 ‘성경은 사실이다’ 말씀을 듣다가 이사야 38장 17절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하는 말씀에서, ‘큰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그것이 양심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제 스스로가 원치 않는 죄를 속으로 너무 많이 짓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항상 제 양심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평안을 주려 하시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진짜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상태로 마지막 날 간증을 듣는 시간에, 감동을 받고 또 축하하는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당장에 내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집회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봉사자로 참여하는 동안 정말 행복하면서 뜻 깊었고 제 현재 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서울 대학생들이 교제하는 자리에서 대전도집회 후기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자매가 동생을 구원받게 하려고 인도자로 참석했다가 자신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자매는 ‘성경은 사실이다’ 말씀을 6편부터 9편까지 들어 보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자매의 말을 듣고 ‘나도 그 말씀을 들으면 구원받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교제 자리를 쫓아다녔던 저는, 12월에 있을 ‘꿈 같은 사랑 암송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범위 단락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분들은 <꿈 같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청년 형제자매들이 교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습니다. 관련된 글 몇 개를 보다가 “꿈 같은 사랑이 저에게 준 변화”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다가 구원에 의문이 생긴 분이었습니다. 저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 읽어 보니, <꿈 같은 사랑>을 107단락부터 읽던 중 자신의 믿음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어 힘을 얻고 감사하게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꿈 같은 사랑>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 장인 ‘넓고 크고 높고 깊은 사랑’부터 유심히 읽어 갔습니다. 죽 읽다 보니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해 나가야 할 나의 목표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는 죄인인 나를 이미 구원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자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때 와닿았던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전에는 구원받는 것이 내 행위가 필요한 것, 무언가 엄청난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통해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니 ‘아, 하나님. 저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군요. 이제야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들이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도,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생각나는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제 마음속에 이 찬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11월 3일 오후 4시경,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확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참 평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