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저는 어떤 시 하나를 읽고 ‘이 사람 돌았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활이 즐거운 노래처럼 흘러만 간다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온갖 일 얽히고 답답한 중에도
얼굴에 미소 띄울 수 있다면
더욱 보람있는 생이라 하리니
‘온갖 일 얽히고 답답하면 그대로 얼굴이 찌그러지지 미소를 띄울 수 있겠나?’ 이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느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파랗게 젊지만 언젠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면 연세 많은 분들과 같이 나도 갈 텐데. 단풍이 들 그날이 곧 올 텐데.
그러던 저는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1961년 12월 마지막 밤, 스물한 살 마지막 밤이 아쉬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과 모여 망년회를 가질 때였습니다. 여느 망년회가 그렇듯 망년회는 먹자판이었고 술을 마셔대는 친구들의 행태는 어릴 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술주정뱅이들의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런 것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한 번쯤 앞으로의 계획이나 젊음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이런 식의 망년회는 해마다 있는 것이니 오늘만은 머리를 맞대고 앞날을 위한 계획도 한 번 해 보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 년 후면 우리들의 모습도 뚜렷하게 드러날 터이니 오늘밤 한 발짝 멋지게 디뎌보자.”
그때 먹고 마시기에 바빴던 한 친구가 외쳤습니다.
“철학자 같은 소리 그만 해!”
느닷없이 목 뒤가 이상한 느낌으로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입으로 안 먹으면 목으로라도 마셔야 된다며 거나하게 취한 한 친구가 제 옷 속에 술 한 잔을 부어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유쾌하게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마시고 또 마셨고, 취하고 또 취한데다가 뒤죽박죽으로 이 노래 저 노래들을 불러댔습니다. 저는 그 분위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 길로 한 삼십 리 길을 혼자 걸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정돈되지 않는 기억들의 끝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출세를 자신하고 있는 내가 가장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의문에 생각을 자꾸만 던져 보았습니다.
참 꿈 많던 시절,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키는 작았어도 욕심은 키 큰 사람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결국은 생활 수준만 높은 외톨이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감수성 풍부한 소년 시절에 사귄, 심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던 친구들과도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나는데 사회인이 된 후에 사귈 친구들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서로 다른 추억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성장한 바탕 위에서 벌어질 생존 경쟁 세계에서 교육이나 교양으로 도금된 이기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기란 매우 어려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폭넓게 사귀어가다 보면 어린 시절을 많이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지기만 했습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남들과는 달리 무언가 다른 것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대책 없는 고민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뒤 새벽이 왔을 때 저는 두 가지를 결정하였습니다.
죽음으로도 해결 못할 갈등이 이어질 것은 분명하지만 가벼운 행동으로 삶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고 십 년이 지난 후에 꿈에도 그리워하던 우이동 삼각산 입구 추억이 놓인 곳에 내 아틀리에를 가져야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지막 그림 한 장 그리고 친구들 불러 모아 놓고 조용히 눈을 감아야겠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젊은 날들을 사회의 불행을 향한 봉사와 희생 정신으로 살자. 대충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 유쾌한 웃음으로 새해 아침을 맞았습니다.
1962년 1월 1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했던 일로 마음속에 일고 있는 뉘우침대로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에 갔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부흥강사의 설교 요지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2400여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무엇이 다를까. 마치 장님에게 거울을 주면서 얼굴을 살펴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속수무책의 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설교자의 말을 듣기 전부터 나는 이미 일기장을 통해 항상 나 자신을 살펴왔다는 자만심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을 통해서는 나를 살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저는 상당히 종교적인 열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일학교 반사 일을 맡았고 찬양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 집회에 참석했던 저는 커다란 성경책 한 권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시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일등을 한 것입니다. 상을 주던 선교사는 내 표정을 유심히 보더니 이 사람은 성경책을 가져가도 계속해서 읽을 사람이 못된다는 표정을 지었고, 저 역시 속으로는 이런 큰 성경책 대신에 차라리 내가 읽지 않은 문학책 중에 좋은 것을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책을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오는데 밖에서 안내를 담당하던 영국 의사 한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오늘 참 기쁘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나는 나면서부터 교인이며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도 열심히 잘 다니고 있고, 주일학교 반사, 찬양대원 등 교회 활동에도 열심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퍽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상으로 받은 성경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습니다. 상을 준 선교사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성경을 평생 동안 읽을 것이고, 또 하나님 당신이 참으로 계신다면 내가 이 성경을 읽는 것을 지켜 봐 달라고. 눈을 뻔히 뜬 오만불손한 몰골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첫 장 첫 구절이 제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모든 이론이나 주장들, 책을 통해 들은 창조냐 진화냐 하는 의문이나 질문 따위는 모두 무시한,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의 수고스런 변증법으로 이해와 동정을 구걸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절대적인 주관의 소리는 내가 믿든 믿지 않든 그냥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어떻고 하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답답하고 복잡한 내 마음 상태, 살아오는 동안 목표도 없이 방황했던 어둡고 답답한 내 영혼을 밝게 하실 하나님의 참된 빛이 필요하다는, 전에 없었던 마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욕심으로 꽉 채워진 캄캄한 어두움 뿐인 곳에 한줄기의 빛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 성경을 읽어내려 가던 중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때에 롯의 두 딸이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해놓고는 엉뚱한 짓을 했다는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성경에 왜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서 그와 비슷한 남녀 관계 이야기를 읽었다면 거부감 없이 읽어 내려갔을 텐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에 대해서만 도전적인 마음이 생겼을까. 성경은 내 마음속에 죄성이 잠재해 있음을 지적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이 법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시간에는 주로 구약 성경을, 아침 시간에는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5, 6, 7장을 읽는데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암송 대회에 나가려고 여러 번 읽어가며 외웠던 대목 중 몇 구절이 마음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1-22)
이 성경은 마음속에 앙심을 품으면 그것도 살인죄에 해당되며 실제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가능성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남이 보기에 나는 참을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서 미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언제나 신사적이었고 정의를 앞세웠지만, 그렇게 감정 표출을 억제하다 보니 내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27-30)
저는 제 마음속에 더러운 것이 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또래 청년들과는 달리 애정을 논하는 일에도 몹시 둔한 편이었고, 스스로 꽤나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듯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이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미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책들을 꽤 많이 읽었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 또한 내심 강했습니다. 그런 속마음 상태는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 앞에 저를 비추어 놓고 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런 현상과는 차원이 다른 내적인 죄의 본질과 맞닿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이 말씀은 내부에 도사린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밝은 등불 빛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행동만 깨끗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앞세우고 행동의 원인이 되는 속마음은 도덕이나 종교로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럽고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습니다. ‘나는 저 가운데 들어가 앉을 자격도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소설에나 나옴직한 마귀 상이었습니다. 얼마나 처절하고 불쌍해 보이던지.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든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때 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04장)
왠지 그 찬송 소리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다 거룩하게 느껴지면서 천국에는 저런 사람들만 들어갈 것이고,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내가 가진 죄 보따리가 그곳에서 악취를 낼 것이고, 그러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어 보자고 생각하고 집회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4)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예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였고, 누구든지 그 예복을 입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2천 년 전에 벌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다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영혼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셨으니 이제 내가 용서받았구나. 번민과 고통이 순간 사라져 버리고 캄캄한 어둠이 빛 앞에서 무색하듯 내 마음이 밝아졌고 즐거움에 넘치는 웃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죄를 씻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같이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식으로 사랑하려고 했던 노력은 끝나고 잔잔한 평안이 내 마음을 모두 채운 것입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는 소리 없는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은 1962년 4월 7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올 때는 발걸음이 하도 가벼워져서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듯 가볍게 발을 옮겨 놓았습니다. 바깥 날씨는 꽤나 음산했던 것 같았는데 내 마음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민과 양심의 고통, 그리고 죄로 인한 깊은 고민과 탄식만 가득했던 조그마한 골방에서 찬송이 밝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동정녀 탄생이라든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그런 대로 믿고 알고 지냈지만, 그날처럼 확실하게 모든 의심이 사라져 버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내 양심에는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가 있나?’ 또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날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을 안고서도 잘 믿어 보려는 노력이 늘 따랐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이 믿어져 버린 이후로는 성경에 대한 어떤 의심도, 의문도 모두가 눈 녹듯이 녹아 없어진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또 순간적으로라도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되셨다는 사실이나 그의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전 신앙생활에서 가졌던 성경에 대한 의심들에 대해서는 완전한 기억 상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끔씩 저는 내가 읽은 만큼, 내가 아는 만큼 성경을 다 외운다 할지라도 만약 주님이 그때 내 죄를 사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확정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고민에 고민,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 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그렇게 고민스러웠던 노래도 달라졌습니다.
내 죄의 짐 나를 항상 눌렀고
이 육신 눈 앞을 보지 못했네
주 십자가 나를 놓아주시니
그 밝은 빛을 보고 따라가겠네 (합동찬송가 200장)
그 일 이후, 제게는 꽤나 오랫동안 웃는 버릇이 계속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즐거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렵기만 했던 성경 구절들이 더 밝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내 것이 되어 가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흔히들 주옥 같은 글이라고 하는 그 어떤 글을 읽는 것보다도 성경에 나를 죄악에서 건져 주셨다는 그 구절들을 찾아갈 때, 그것을 보아 마음이 즐겁고 위안이 되고 사랑이 넘치는 것을 발견할 때 가질 수 있는 이 행복. 이것을 누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 즐거움은 예전에 느끼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눈과 생각, 그리고 마음을 통해서 성경 읽는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분반 공부를 다 마치고 어린 주일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선생님들이 교회당 안을 열심히 청소하며 의자들을 옮기고 있었는데, 누군가 찬송가를 흥얼거렸습니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어떤 북받치는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주여,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는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꿈같이 헛된 세상 일 취할 것 무어냐
이 수고 암만 하여도 헛된 것뿐일세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살같이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온 몸과 맘을 바치고 힘써서 일하세 (찬송가 376장)
참으로 내 마음 모두가 이러했고, 또 이런 일에 나의 일생이 정해지는 것에 대한 감사의 북받침이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같이 찬송가를 부르던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들이었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제 얼굴 표정이 여러 사람들의 눈에 이상스러우리만큼 평화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많은 말들 가운데 담긴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믿었으며 어떻게 들었는가 하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일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으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아직 얻지 못한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빛이 없는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에는 한 사람이 흔들흔들 꺼져가는 등불을 조그마한 초롱에 담아서 들고 가면 여러 사람이 줄지어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 성경 구절만 생각하면 꼭 그 장면이 생각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오늘 우리들이 읽고자 하는 성경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고 가야 될 성경이, 여러분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확실하게 여러분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자기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을 자기의 등으로 삼고 성경을 자기 가까이에 둘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어떤 시 하나를 읽고 ‘이 사람 돌았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활이 즐거운 노래처럼 흘러만 간다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온갖 일 얽히고 답답한 중에도
얼굴에 미소 띄울 수 있다면
더욱 보람있는 생이라 하리니
‘온갖 일 얽히고 답답하면 그대로 얼굴이 찌그러지지 미소를 띄울 수 있겠나?’ 이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느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파랗게 젊지만 언젠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면 연세 많은 분들과 같이 나도 갈 텐데. 단풍이 들 그날이 곧 올 텐데.
그러던 저는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1961년 12월 마지막 밤, 스물한 살 마지막 밤이 아쉬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과 모여 망년회를 가질 때였습니다. 여느 망년회가 그렇듯 망년회는 먹자판이었고 술을 마셔대는 친구들의 행태는 어릴 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술주정뱅이들의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런 것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한 번쯤 앞으로의 계획이나 젊음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이런 식의 망년회는 해마다 있는 것이니 오늘만은 머리를 맞대고 앞날을 위한 계획도 한 번 해 보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 년 후면 우리들의 모습도 뚜렷하게 드러날 터이니 오늘밤 한 발짝 멋지게 디뎌보자.”
그때 먹고 마시기에 바빴던 한 친구가 외쳤습니다.
“철학자 같은 소리 그만 해!”
느닷없이 목 뒤가 이상한 느낌으로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입으로 안 먹으면 목으로라도 마셔야 된다며 거나하게 취한 한 친구가 제 옷 속에 술 한 잔을 부어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유쾌하게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마시고 또 마셨고, 취하고 또 취한데다가 뒤죽박죽으로 이 노래 저 노래들을 불러댔습니다. 저는 그 분위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 길로 한 삼십 리 길을 혼자 걸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정돈되지 않는 기억들의 끝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출세를 자신하고 있는 내가 가장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의문에 생각을 자꾸만 던져 보았습니다.
참 꿈 많던 시절,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키는 작았어도 욕심은 키 큰 사람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결국은 생활 수준만 높은 외톨이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감수성 풍부한 소년 시절에 사귄, 심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던 친구들과도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나는데 사회인이 된 후에 사귈 친구들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서로 다른 추억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성장한 바탕 위에서 벌어질 생존 경쟁 세계에서 교육이나 교양으로 도금된 이기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기란 매우 어려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폭넓게 사귀어가다 보면 어린 시절을 많이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지기만 했습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아가기만 하는 남들과는 달리 무언가 다른 것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대책 없는 고민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뒤 새벽이 왔을 때 저는 두 가지를 결정하였습니다.
죽음으로도 해결 못할 갈등이 이어질 것은 분명하지만 가벼운 행동으로 삶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고 십 년이 지난 후에 꿈에도 그리워하던 우이동 삼각산 입구 추억이 놓인 곳에 내 아틀리에를 가져야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지막 그림 한 장 그리고 친구들 불러 모아 놓고 조용히 눈을 감아야겠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젊은 날들을 사회의 불행을 향한 봉사와 희생 정신으로 살자. 대충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 유쾌한 웃음으로 새해 아침을 맞았습니다.
1962년 1월 1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했던 일로 마음속에 일고 있는 뉘우침대로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에 갔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부흥강사의 설교 요지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2400여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무엇이 다를까. 마치 장님에게 거울을 주면서 얼굴을 살펴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속수무책의 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설교자의 말을 듣기 전부터 나는 이미 일기장을 통해 항상 나 자신을 살펴왔다는 자만심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을 통해서는 나를 살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저는 상당히 종교적인 열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일학교 반사 일을 맡았고 찬양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 집회에 참석했던 저는 커다란 성경책 한 권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시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일등을 한 것입니다. 상을 주던 선교사는 내 표정을 유심히 보더니 이 사람은 성경책을 가져가도 계속해서 읽을 사람이 못된다는 표정을 지었고, 저 역시 속으로는 이런 큰 성경책 대신에 차라리 내가 읽지 않은 문학책 중에 좋은 것을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책을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오는데 밖에서 안내를 담당하던 영국 의사 한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오늘 참 기쁘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나는 나면서부터 교인이며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도 열심히 잘 다니고 있고, 주일학교 반사, 찬양대원 등 교회 활동에도 열심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퍽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상으로 받은 성경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습니다. 상을 준 선교사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성경을 평생 동안 읽을 것이고, 또 하나님 당신이 참으로 계신다면 내가 이 성경을 읽는 것을 지켜 봐 달라고. 눈을 뻔히 뜬 오만불손한 몰골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첫 장 첫 구절이 제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모든 이론이나 주장들, 책을 통해 들은 창조냐 진화냐 하는 의문이나 질문 따위는 모두 무시한,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의 수고스런 변증법으로 이해와 동정을 구걸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절대적인 주관의 소리는 내가 믿든 믿지 않든 그냥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어떻고 하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답답하고 복잡한 내 마음 상태, 살아오는 동안 목표도 없이 방황했던 어둡고 답답한 내 영혼을 밝게 하실 하나님의 참된 빛이 필요하다는, 전에 없었던 마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욕심으로 꽉 채워진 캄캄한 어두움 뿐인 곳에 한줄기의 빛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 성경을 읽어내려 가던 중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때에 롯의 두 딸이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해놓고는 엉뚱한 짓을 했다는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성경에 왜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서 그와 비슷한 남녀 관계 이야기를 읽었다면 거부감 없이 읽어 내려갔을 텐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에 대해서만 도전적인 마음이 생겼을까. 성경은 내 마음속에 죄성이 잠재해 있음을 지적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이 법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시간에는 주로 구약 성경을, 아침 시간에는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5, 6, 7장을 읽는데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암송 대회에 나가려고 여러 번 읽어가며 외웠던 대목 중 몇 구절이 마음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1-22)
이 성경은 마음속에 앙심을 품으면 그것도 살인죄에 해당되며 실제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가능성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남이 보기에 나는 참을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서 미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언제나 신사적이었고 정의를 앞세웠지만, 그렇게 감정 표출을 억제하다 보니 내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27-30)
저는 제 마음속에 더러운 것이 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또래 청년들과는 달리 애정을 논하는 일에도 몹시 둔한 편이었고, 스스로 꽤나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듯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이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미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책들을 꽤 많이 읽었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 또한 내심 강했습니다. 그런 속마음 상태는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 앞에 저를 비추어 놓고 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런 현상과는 차원이 다른 내적인 죄의 본질과 맞닿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이 말씀은 내부에 도사린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밝은 등불 빛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행동만 깨끗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앞세우고 행동의 원인이 되는 속마음은 도덕이나 종교로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럽고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습니다. ‘나는 저 가운데 들어가 앉을 자격도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소설에나 나옴직한 마귀 상이었습니다. 얼마나 처절하고 불쌍해 보이던지.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든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때 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04장)
왠지 그 찬송 소리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다 거룩하게 느껴지면서 천국에는 저런 사람들만 들어갈 것이고,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내가 가진 죄 보따리가 그곳에서 악취를 낼 것이고, 그러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어 보자고 생각하고 집회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4)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예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였고, 누구든지 그 예복을 입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2천 년 전에 벌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다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영혼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셨으니 이제 내가 용서받았구나. 번민과 고통이 순간 사라져 버리고 캄캄한 어둠이 빛 앞에서 무색하듯 내 마음이 밝아졌고 즐거움에 넘치는 웃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죄를 씻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같이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식으로 사랑하려고 했던 노력은 끝나고 잔잔한 평안이 내 마음을 모두 채운 것입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는 소리 없는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은 1962년 4월 7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올 때는 발걸음이 하도 가벼워져서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듯 가볍게 발을 옮겨 놓았습니다. 바깥 날씨는 꽤나 음산했던 것 같았는데 내 마음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민과 양심의 고통, 그리고 죄로 인한 깊은 고민과 탄식만 가득했던 조그마한 골방에서 찬송이 밝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동정녀 탄생이라든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그런 대로 믿고 알고 지냈지만, 그날처럼 확실하게 모든 의심이 사라져 버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내 양심에는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가 있나?’ 또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날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을 안고서도 잘 믿어 보려는 노력이 늘 따랐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이 믿어져 버린 이후로는 성경에 대한 어떤 의심도, 의문도 모두가 눈 녹듯이 녹아 없어진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또 순간적으로라도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되셨다는 사실이나 그의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전 신앙생활에서 가졌던 성경에 대한 의심들에 대해서는 완전한 기억 상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끔씩 저는 내가 읽은 만큼, 내가 아는 만큼 성경을 다 외운다 할지라도 만약 주님이 그때 내 죄를 사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확정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고민에 고민,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 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그렇게 고민스러웠던 노래도 달라졌습니다.
내 죄의 짐 나를 항상 눌렀고
이 육신 눈 앞을 보지 못했네
주 십자가 나를 놓아주시니
그 밝은 빛을 보고 따라가겠네 (합동찬송가 200장)
그 일 이후, 제게는 꽤나 오랫동안 웃는 버릇이 계속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즐거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렵기만 했던 성경 구절들이 더 밝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내 것이 되어 가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흔히들 주옥 같은 글이라고 하는 그 어떤 글을 읽는 것보다도 성경에 나를 죄악에서 건져 주셨다는 그 구절들을 찾아갈 때, 그것을 보아 마음이 즐겁고 위안이 되고 사랑이 넘치는 것을 발견할 때 가질 수 있는 이 행복. 이것을 누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 즐거움은 예전에 느끼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눈과 생각, 그리고 마음을 통해서 성경 읽는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분반 공부를 다 마치고 어린 주일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선생님들이 교회당 안을 열심히 청소하며 의자들을 옮기고 있었는데, 누군가 찬송가를 흥얼거렸습니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어떤 북받치는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주여,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는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꿈같이 헛된 세상 일 취할 것 무어냐
이 수고 암만 하여도 헛된 것뿐일세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살같이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온 몸과 맘을 바치고 힘써서 일하세 (찬송가 376장)
참으로 내 마음 모두가 이러했고, 또 이런 일에 나의 일생이 정해지는 것에 대한 감사의 북받침이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같이 찬송가를 부르던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들이었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제 얼굴 표정이 여러 사람들의 눈에 이상스러우리만큼 평화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많은 말들 가운데 담긴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믿었으며 어떻게 들었는가 하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일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으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아직 얻지 못한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빛이 없는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에는 한 사람이 흔들흔들 꺼져가는 등불을 조그마한 초롱에 담아서 들고 가면 여러 사람이 줄지어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 성경 구절만 생각하면 꼭 그 장면이 생각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오늘 우리들이 읽고자 하는 성경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고 가야 될 성경이, 여러분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확실하게 여러분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자기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을 자기의 등으로 삼고 성경을 자기 가까이에 둘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