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항상 있던 의심
저는 76살이고 여수시 서란면에 살고 있습니다. 1976년에 처음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당시는 고등학교를 빌려서 운동장에 임시로 건물을 짓고 수양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구원받은 동생과 자식과 함께 교제 가운데서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21살이던 1966년에 군대를 갔습니다. 훈련소에서는 복무 중에 반복적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교회에 지원해서 다녔습니다. 강원도 철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도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책에 적힌 말씀을 보고 그대로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도저히 천당에 갈 수가 없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날마다 죄를 짓는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젊을 때부터 가졌던 이 생각은 계속 이어졌고,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들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심이 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니 저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죽음은 딱 한 번이지 두 번일 수 없기에, 내가 들림을 받지 못한다면 나의 생은 그대로 끝이었습니다.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지난 40년 넘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누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창피해서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원과 관련된 구절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는 구절이나 이사야 44장 22절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는 구원과 관련된 구절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정의 장남입니다. 그래서 집안 제사를 지냈어야 했는데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제사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돈이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요, 우상이었습니다.
주님이 한 번 더 주신 기회
저는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4년 전에는 심근경색이 왔었습니다. 혈관이 막혀서 수술을 했고, 그 후로는 전보다 쉽게 숨이 가빠집니다.
당시 저는 흔들리는 이를 뽑고는 병원에서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가 지나 약을 한 봉지 먹었습니다. 그때 문득 노인정에 있는 할머니들에게 성경 이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인정으로 갔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아랫마을 이장이 오고, 다른 사람들도 와서 성경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서 가만히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몸에서 열이 화끈화끈 올랐습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병원에 다녀온 후라 몸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만약 그때 약을 먹고 논이나 밭으로 갔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쓰러졌다면 손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에서 쓰러졌고 마침 아들도 집에 와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1시간 45분 동안 인공호흡을 하고 산소 마스크를 끼는 등의 조치를 했는데도 숨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큰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숨이 돌아오지 않으니 장례 준비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병원 옆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에 제 호흡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눈을 떠 보니 아들 셋이 다 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못다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생명을 연장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됩니다.
<글소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
저는 여수 교회에서 매달 <글소리>를 빌려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에 실린 설교의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자니 어디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을 빌려 보는 과정이 보통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읽은 후에는 ‘내가 이것을 사면 한 번 더 읽어 볼 수 있을 텐데, 돌려주면 더 못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려주고는 했습니다. 후에 정기구독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매달 책을 받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책을 열심히 보던 어느 날 ‘세미한 소리’ 설교를 읽으면서 이 복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 교제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를 계속 읽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크게 실감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12월호 <글소리>에 실린 2006년 유럽 성경탐구모임 강연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읽다가 제가 늘 지녔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다 풀어졌습니다. 전에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에 0.001%의 의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100%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인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그 형편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사무치면서 모든 문제들이 다 풀려 버렸습니다.
그 설교에서 다루었던 성경 구절도 평소 성경에서 다 찾아 읽어 왔던 말씀들이었습니다. 전에는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은 오로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평생 열심히 성경책을 읽었고 또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 말씀이 맞다.’ 하고 생각해 왔지만 그 말씀이 저에게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어볼 때는 받았다고 대답했지만, 여수 형제자매들과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구원 간증을 할 때 제 차례가 돌아오면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간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받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나와 같이 헤매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싶어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입니다. 교제 가운데 몸만 왔다 갔다 하고 똑 부러지는 구원의 간증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꿈같은 사랑을 깨달은 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은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사람은 나이가 적든지 많든지 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다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도 불쌍한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든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위해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죄를 가릴 만한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의 모든 죄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 감사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분은 평생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말로는 ‘내 삶을 주님께 맡겨야지.’ 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내 생활을 주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내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는 근심과 걱정을 모두 주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주님께 맡기는 것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맡길 수 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든든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는 평생 묵은 수수께끼가 풀어졌습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평화가 왔습니다. 평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얼굴이 웃어서 평화가 아닙니다. 웃지 않아도 근심이 없으면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전에는 성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고리가 풀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창세기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는데 말씀을 들으면 조금씩 알게 됩니다. 얼른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어 안성 선교센터에 가 보고, 형제자매들도 만나고 싶습니다. 전에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피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참 만나 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손주들이 있습니다. 손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지만 제가 직접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아버지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교제에 계속 참석해 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구원받지 못했더라도 교제 속에서 살다 보면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항상 있던 의심
저는 76살이고 여수시 서란면에 살고 있습니다. 1976년에 처음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당시는 고등학교를 빌려서 운동장에 임시로 건물을 짓고 수양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구원받은 동생과 자식과 함께 교제 가운데서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21살이던 1966년에 군대를 갔습니다. 훈련소에서는 복무 중에 반복적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교회에 지원해서 다녔습니다. 강원도 철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도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책에 적힌 말씀을 보고 그대로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도저히 천당에 갈 수가 없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날마다 죄를 짓는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젊을 때부터 가졌던 이 생각은 계속 이어졌고,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들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심이 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니 저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죽음은 딱 한 번이지 두 번일 수 없기에, 내가 들림을 받지 못한다면 나의 생은 그대로 끝이었습니다.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지난 40년 넘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누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창피해서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원과 관련된 구절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는 구절이나 이사야 44장 22절의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는 구원과 관련된 구절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정의 장남입니다. 그래서 집안 제사를 지냈어야 했는데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제사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돈이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요, 우상이었습니다.
주님이 한 번 더 주신 기회
저는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4년 전에는 심근경색이 왔었습니다. 혈관이 막혀서 수술을 했고, 그 후로는 전보다 쉽게 숨이 가빠집니다.
당시 저는 흔들리는 이를 뽑고는 병원에서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가 지나 약을 한 봉지 먹었습니다. 그때 문득 노인정에 있는 할머니들에게 성경 이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인정으로 갔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아랫마을 이장이 오고, 다른 사람들도 와서 성경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서 가만히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몸에서 열이 화끈화끈 올랐습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병원에 다녀온 후라 몸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만약 그때 약을 먹고 논이나 밭으로 갔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쓰러졌다면 손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에서 쓰러졌고 마침 아들도 집에 와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1시간 45분 동안 인공호흡을 하고 산소 마스크를 끼는 등의 조치를 했는데도 숨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큰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숨이 돌아오지 않으니 장례 준비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병원 옆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에 제 호흡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눈을 떠 보니 아들 셋이 다 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못다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생명을 연장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됩니다.
<글소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
저는 여수 교회에서 매달 <글소리>를 빌려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에 실린 설교의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자니 어디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을 빌려 보는 과정이 보통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읽은 후에는 ‘내가 이것을 사면 한 번 더 읽어 볼 수 있을 텐데, 돌려주면 더 못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려주고는 했습니다. 후에 정기구독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매달 책을 받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책을 열심히 보던 어느 날 ‘세미한 소리’ 설교를 읽으면서 이 복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 교제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를 계속 읽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크게 실감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12월호 <글소리>에 실린 2006년 유럽 성경탐구모임 강연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읽다가 제가 늘 지녔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다 풀어졌습니다. 전에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에 0.001%의 의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100%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인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그 형편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사무치면서 모든 문제들이 다 풀려 버렸습니다.
그 설교에서 다루었던 성경 구절도 평소 성경에서 다 찾아 읽어 왔던 말씀들이었습니다. 전에는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은 오로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평생 열심히 성경책을 읽었고 또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 말씀이 맞다.’ 하고 생각해 왔지만 그 말씀이 저에게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어볼 때는 받았다고 대답했지만, 여수 형제자매들과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구원 간증을 할 때 제 차례가 돌아오면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간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받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나와 같이 헤매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싶어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입니다. 교제 가운데 몸만 왔다 갔다 하고 똑 부러지는 구원의 간증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꿈같은 사랑을 깨달은 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은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사람은 나이가 적든지 많든지 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다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도 불쌍한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든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위해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죄를 가릴 만한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의 모든 죄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 감사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분은 평생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말로는 ‘내 삶을 주님께 맡겨야지.’ 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내 생활을 주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내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는 근심과 걱정을 모두 주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주님께 맡기는 것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맡길 수 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든든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는 평생 묵은 수수께끼가 풀어졌습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평화가 왔습니다. 평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얼굴이 웃어서 평화가 아닙니다. 웃지 않아도 근심이 없으면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전에는 성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고리가 풀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창세기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는데 말씀을 들으면 조금씩 알게 됩니다. 얼른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어 안성 선교센터에 가 보고, 형제자매들도 만나고 싶습니다. 전에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피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참 만나 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손주들이 있습니다. 손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지만 제가 직접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아버지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교제에 계속 참석해 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구원받지 못했더라도 교제 속에서 살다 보면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