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권신찬 목사 (1923-1996)
우리 집은 예배당 옆에 있었다. 그런 탓인지 교회 손님이 오면 항상 우리 집으로 왔다. 방이 두 칸뿐이니 손님이 오면 아버지와 손님이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나머지 가족은 한 방에 모여서 자야만 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장로교인으로 믿는 생활을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성경 암송대회나 그 외에 주일학교 학생이 탈 수 있는 모든 상은 거의 다 탈 정도로 열심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는데 잠들기 전에,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한 번의 말씀이 나의 생애의 목표가 되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예배당 옆에 있었다. 그런 탓인지 교회 손님이 오면 항상 우리 집으로 왔다. 방이 두 칸뿐이니 손님이 오면 아버지와 손님이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나머지 가족은 한 방에 모여서 자야만 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장로교인으로 믿은 생활을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성경 암송대회나 그 외에 주일학교 학생이 탈 수 있는 모든 상은 거의 다 탈 정도로 열심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는데 잠들기 전에,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한 번의 말씀이 나의 생애의 목표가 되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웃지 못할 일이 기숙사에서 벌어졌다. 신학생끼리 부엌에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밥 양이 너무 적으니까 빨리 자기 밥을 먹고 나서 밥솥에 있는 누룽지를 끓여다가 먹는데 그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천사들이 모인 곳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차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되었다. 누룽지 때문에 저렇게 핏대를 올리며 원수같이 싸운대서야 어떻게 나가서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겠는가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한 번은 교회에서 새로 큰 예배당을 짓는다는 광고를 들었다. 신학교 학생들도 5일간 봉사를 하기로 하였다. 주로 건축 자재나 벽돌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학생들의 상당수가 말로만 봉사한다고 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그냥 빙빙 돌다 가는 것이었다. 나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그런 학생들을 속으로 비판하였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진실해야 하고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보통학교 시절 (첫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웃지 못할 일이 기숙사에서 벌어졌다. 신학생끼리 부엌에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밥 양이 너무 적으니까 빨리 자기 밥을 먹고 나서 밥솥에 있는 누룽지를 끓여다가 먹는데 그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천사들이 모인 곳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차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되었다. 누룽지 때문에 저렇게 핏대를 올리며 원수같이 싸운대서야 어떻게 나가서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겠는가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195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졸업식
한 번은 교회에서 새로 큰 예배당을 짓게 된다는 광고를 들었다. 신학교 학생들도 5일간 봉사를 하기로 하였다. 주로 건축 자재나 벽돌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학생들의 상당수가 말로만 봉사한다고 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그냥 빙빙 돌다 가는 것이었다. 나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그런 학생들을 속으로 비판하였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진실해야 하고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거듭나기 전에 시무했던 영양읍 교회
1950년 11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도사 고시 중에 설교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환도 잡은 현실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쳤을 때에 주님이 꾸짖으시기를 환도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하셨다. 지금 현실 교회는 환도를 잡고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설교를 마쳤을 때 여러 목사들이 찾아와서 통쾌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 후에 이곳저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흥 강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번도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겉옷을 벗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목사 꼴이 참 말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흰쌀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거리에 노숙하며 떨고 배곯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도 설교 강단에 서면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위선인가. 결국 나는 위선자이며 삯꾼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이지 성령의 진리가 내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길기수 선교사와의 만남
대구 칠성 교회에 있을 때 길기수(Keith Glas)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 도중에 설교자가 '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고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예"라고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은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적인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지식의 믿음인 것이었다.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이층 방
설교 준비를 하다 거듭난 대구 칠성동 집 이층 방
어느 토요일 아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주제로 설교 준비를 하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대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셨는데 그 의가 바로 내 의이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죄를 함부로 지으면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시니 함부로 방종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고 10여 년간 양심을 짓누르던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위선자란 생각도 사라졌다.
1950년 11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도사 고시 중에 설교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환도 잡은 현실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쳤을 때에 주님이 꾸짖으시기를 환도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하셨다. 지금 현실 교회는 환도를 잡고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설교를 마쳤을 때 여러 목사들이 찾아와서 통쾌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 후에 이곳저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흥 강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번도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동촌 강 서쪽에 있는 정자 밑에서 길기수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교회의 장로를 전원 모이라고 하고 그 앞에서 나는 참례를 받았노라고 알렸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해있던 장로교에서는 침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1962년 11월 21일 대구 영락교회에서 4,500여 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교재판을 받게 되고 목사 직을 면직당하게 된다.
사실 그 재판은 예수님을 재판한 것이 된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침례를 받은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인가? 원래 거듭나기도 전에 위선자로서 받은 목사직이니 면직된 것이 오히려 짐이라도 벗은 것같이 시원했다.
수개월 후 나는 부임해있던 교회를 나왔고, 나를 따라 나온 수십 명의 신자들이 어느 식당 2층에 장소를 마련해서 내게 계속 설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제부터 월급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신자 중에는 쌀도 가져오고 돈도 가져오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해서 생활이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침에 쌀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하고 집 안에 있는 신문이나 종이들을 모아 팔아서 두부를 두 모 사서 아이들을 먹여 겨우 학교에 보내고 부부는 하루 종일 먹지 못한 때도 있었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일에는 설교하고 쉬는 날 없이 일하였다. 여름철 삼복더위에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했는데 온몸에 땀띠가 나고 때로는 먹지 못한 채 일을 하곤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그만큼 고생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겉옷을 벗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목사 꼴이 참 말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흰쌀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거리에 노숙하며 떨고 배곯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도 설교 강단에 서면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위선인가. 결국 나는 위선자이며 삯꾼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이지 성령의 진리가 내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구 칠성 교회에 있을 때 길기수(Keith Glas)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 도중에 설교자가 "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고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예"라고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은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적인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지식의 믿음인 것이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주제로 설교 준비를 하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대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셨는데 그 의가 바로 내 의이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죄를 함부로 지으면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시니 함부로 방종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고 10여 년간 양심을 짓누르던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위선자란 생각도 사라졌다.
나는 동촌 강 서쪽에 있는 정자 밑에서 길기수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교회의 장로를 전원 모이라고 하고 그 앞에서 나는 침례를 받았노라고 알렸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해있던 장로교에서는 침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1962년 11월 21일 대구 영락교회에서 4,500여 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교재판을 받게 되고 목사직을 면직당하게 된다.
사실 그 재판은 예수님을 재판한 것이 된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침례를 받은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인가? 원래 거듭나기도 전에 위선자로서 받은 목사직이니 면직된 것이 오히려 짐이라도 벗은 것같이 시원했다.
수개월 후 나는 부임해있던 교회를 나왔고, 나를 따라 나온 수십 명의 신자들이 어느 식당 2층에 장소를 마련해서 내게 계속 설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제부터 월급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신자 중에는 쌀도 가져오고 돈도 가져오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해서 생활이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침에 쌀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하고 집 안에 있는 신문이나 종이들을 모아 팔아서 두부를 두 모 사서 아이들을 먹여 겨우 학교에 보내고 부부는 하루 종일 먹지 못한 때도 있었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일에는 설교하고 쉬는 날 없이 일하였다. 여름철 삼복더위에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했는데 온몸에 땀띠가 나고 때로는 먹지 못한 채 일을 하곤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그만큼 고생한 적이 없었다.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1960년대
일반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어 거듭남의 도를 전하다.
복성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저녁마다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량 청년들이 몰려와서 모임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집회를 하고 있는 곳에 벌렁 드러누워 욕도 하고 행패를 부리는데 어린 신도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 방해꾼들이 너무도 놀라서 도망치다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다.
며칠 지나서 그 청년들이 찾아와서 벌벌 떨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결국 전도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방언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방언은 교회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회가 어릴 때는 교회 자체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언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병을 고치는 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방언의 역사가 때때로 일어났으며 6년 후에 방언이 완전히 그쳤다. 교회가 성장하면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폐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복성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저녁마다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량 청년들이 몰려와서 모임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집회를 하고 있는 곳에 벌렁 드러누워 욕도 하고 행패를 부리는데 어린 신도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 방해꾼들이 너무도 놀라서 도망치다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다.
며칠 지나서 그 청년들이 찾아와서 벌벌 떨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결국 전도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방언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방언은 교회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회가 어릴 때는 교회 자체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언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병을 고치는 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방언의 역사가 때때로 일어났으며 6년 후에 방언이 완전히 그쳤다. 교회가 성장하면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폐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형제의 제안으로 1966년 2월에 극동방송국의 방송 목사 겸 전도 과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는 장로교에서 끊겨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도할 길이 없었는데 방송을 통하여 복음이 집집의 안방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방송국에서는 청취자 수양회라는 간판으로 지방 전도집회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수양회를 거듭할수록 참석인원과 구원받는 숫자가 배로 늘어났으며 한 번에 천여 명씩 침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방송국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극동 방송국 근무 시절
어느 형제의 제안으로 1966년 2월에 극동방송국의 방송 목사 겸 전도 과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는 장로교에서 끊겨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도할 길이 없었는데 방송을 통하여 복음이 집집의 안방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방송국에서는 청취자 수양회라는 간판으로 지방 전도집회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수양회를 거듭할수록 참석인원과 구원받는 숫자가 배로 늘어났으며 한 번에 천여 명씩 침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방송국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계약을 맺게 되었다.
청취자 수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교단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평신도가 아닌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중진들도 있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자기들 교회로 돌아가면 절대로 조용하지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동료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목사님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묻기도 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등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결국 몇몇 장로교회에서 교단 본부로 대책을 세워달라는 진정을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장로교회의 본부는 정식으로 극동방송국장에게 "권신찬 목사의 신앙노선이 이단"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극동방송국을 운영하던 팀선교부는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로부터 청취 거부 운동 및 관련 서적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치겠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1974년 9월, 방송국으로부터 우리 형제들 11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으며, 방송국 공동 운영 계약도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몇 달 동안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해고무효 가처분 결정 등 통쾌한 결과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방송을 이용한 복음전도는 그날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1970년대, 불광동 수양관에서 열린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
청취자 수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교단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평신도가 아닌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중진들도 있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자기들 교회로 돌아가면 절대로 조용하지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동료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목사님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묻기도 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등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결국 몇몇 장로교회에서 교단 본부로 대책을 세워달라는 진정을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장로교회의 본부는 정식으로 극동방송국장에게 "권신찬 목사의 신앙노선이 이단"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극동방송국을 운영하던 팀선교부는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로부터 청취 거부 운동 및 관련 서적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치겠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1974년 9월, 방송국으로부터 우리 형제들 11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으며, 방송국 공동 운영 계약도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몇 달 동안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해고무효 가처분 결정 등 통쾌한 결과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방송을 이용한 복음전도는 그날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90년 한국 하기수양회,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