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첫 걸음 - 침례


침례에 대하여는 '서로 사랑하라' (하권)에서 언급한 바 있고, 또 침례를 받을 때에 이미 다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상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침례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순종의 첫 발걸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장자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애굽에서는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면해 죽지 않고 살아나기는 했지만, 애굽에 그대로 있게 되면 여전히 바로 왕, 곧 마귀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자 바로는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을 떠나도록 허락했었으나 막상 이스라엘 민족이 움직이니까 군대를 인솔하고 추격해 왔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애굽에 잡아 두고 종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구원을 받아도, 사단은 자기가 왕 노릇 하는 세상에다 붙잡아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완전히 애굽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침례의 뜻이 표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 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구름기둥)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침례)를 받고" (고전 10:1-2)라고 말한 것입니다. 

침례는 애굽을 떠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나는 이렇게 세상을 향해서 죽었습니다' 하면서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이 홍해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는 애굽이 아닌 다른 세상, 곧 광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애굽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으며, 바로의 명령은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바로와 애굽의 군대는 홍해 속에 장례 되고 말았습니다. 



이중 (二重)의 구원

여기서 십자가의 이중적인 은혜와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며, 두 번째는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영혼 구원이며.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은 생활 곧 바울 사도께서 '구원을 이루라' (빌 2:12)고 말한 바로 그것으로, 이는 영혼 구원을 생활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침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말하기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는 것이라"(벧전 3:21)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는 노아의 홍수 때에 여덟 명이 구원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홍수도 침례의 뜻으로써, 세상에서의 구원과 영혼 구원의 이중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물 속에서 죽은 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의미하고, 물에 의해서 방주가 높이 뜨게 된 것은 부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방주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노아의 가족이 물 위에 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타고 있던 방주가 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으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물 위에 뜬 배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는 두 가지 의미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예 해서 영혼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구원된 것, 곧 거듭난 것을 의미하고, 전 가족적으로는 홍수 전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딴 세상에 옮겨진 것입니다. 옛 세상과 새 세상의 사이에는 홍수라는 물이 경계가 되어 그들은 새 세상에 옮겨져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표로써 침례라고 했습니다. 영혼 구원의 사실을 외부로 형식화한 것이 침례임과 동시에 침례는 또한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옮겨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홍해를 통과해서 애굽이란 옛 세상을 떠나 새 세상에 옮겨진 것과 같은 것이며, 그 새 세상에서 선한 양심, 구원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거듭난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은 "나는 이제 옛 세상에 속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새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간다" 는 것을 확실히 하는 간증이며, 하나님께나 세상 앞에 나타내는 서원과도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 세상에서의 구원의 삶을 산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교제에 참예함

구원은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이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작이 있게 마련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고 한 것은 앞으로 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행위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 행함의 첫 발을 내어디디는 것이 침례입니다. 

 또 침례는 구원받은 교제에 참예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침례받기 전까지 30년간이나 사셨으나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은 채 사셨으며, 따라서 아무런 일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30세에 침례를 받으셨을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침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침례 받는다고 다 성령 충만해진다고 기대해서는 안되나 이미 충만한 교회 안에 참예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