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리의 걸어온 길

교회의 원리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임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니 자연히 '교회 '의 근본 뜻을 잠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예배당엘 다니면서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참된 교회를 발견한다는 것이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건물은 회당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보면 회당이라는 말이 많이 있 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뿐이고 지역 지역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會堂)이라고하면 '모을회(會)', '집 당(堂)' 으로 '모이는 집, 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원어는 '에클레시아' 인데 '이 세상에서 빼낸 무리' 라는 뜻입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빼낸 무리, 구원시켜 나온 무리, 이끌어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 사람이 아닌, 복수인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집합체로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조직으로 생각하는데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당회. 제직회, 무슨 회 하면서 조직을 위해 모이는 것이 교회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조직이 바벨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겠는데 그 조직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영혼의 생명이 없으면 조직이 됩니다. 영혼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 즉 자연인 그대로의 집단체는 인위적인 조직입니다.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죽은 시체를 여기에서 저쪽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사람이 덤벼 들어 양 팔 다리 들고 옮겨가야 합니다. 그것이 조직입니다. 그러면 산 사람을 저쪽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당신 이리 오시오' 하면, '그래요' 하고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경만 가르치면 따라 갑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조직이 있어야 따라갑니다. 집사나 장로 등 여러 가지 직분을 주면 열심도 없던 사람이 열심히 하는데 그것이 조직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는 곳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은 조직이지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비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우주적인 교회는 성경적으로 오순절 부터 시작되었는데 오순절은 무슨 날입니까? 레위기 23장에 보면 일곱 절기가 나오는데 그 일곱 절기는 유월절부터 시작됩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그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즉, 구원받는데서 시작 한다는 뜻으로 구원받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 안에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일곱 절기가 끝나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완전히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다음에 무교절이 있는데, 무교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부터 죄가 제해진다는 뜻입니다. 무교절이란 말은 누룩 없는 절기, 죄가 없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가 초곡절입니다. 초곡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가 오순절입 니다. 오순절은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이 일곱 절기를 잘 알게 되면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신 날부터 약 2천 년 만에 나팔절이 임합니다. 나팔절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절기이고, 나팔절 마지막에는 우리가 들림을 받습니다. 그 다음 여섯째가 속죄절인데 그것은 7년 환난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기간으로 그것이 속죄절입니다. 끝으로 일곱째가 초막절인데 천년왕국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했고, 성령으로 들림을 받아갑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으로 시작하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침례 - 첫 순종


우리 모임에서는 제일 먼저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 전에 구원받고 있다가 들어오신 분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961년 11월 18일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 제 마음 속에 이제는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니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성경을 읽다보니 약식 세례가 아니고 침례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세례(洗禮)' 라는 말은 '씻을 세 (洗) '예도 례(禮)' 자로써 씻는 예식이라는 뜻인데 'baptism' 이란 말은 물 속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원어가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이지 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이 우리 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세례라고 해 버렸는데 제가 성경을 찾아보니 전부 다 침례로 되어 있더군요. 저는 마음 속에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로교에서 자라서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는데 이 장로교는 약식 세례를 줍니다. 예배 당에 앉혀 놓고 물그릇에 담긴 물방울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침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례 지냈다는 뜻으로 물 속에 들어가 버려야 됩니다. 또한 물 속에 들어갔다가 올라오면 그것이 곧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식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식은 구원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장례 지내는 그 속에 내 옛 사람이 같이 장례 지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옛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같이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 했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여러분 속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안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식 자체가 구원의 내용을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다음에도 장로교식대로 약식 세례를 세 번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서는 '성경적이 아닌데⋯, 성경하고 틀리는데⋯ '라는 마음이 속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 마음이 조금 괴로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구원받고 난 다음에 장로교가 내 무대이고, 장로교 안에서 이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만일 침례를 받으면 장로교에서 쫓겨나야 하고 그러면 이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성경적으로 맞진 않지만 구원 문제와는 관계없지 않느냐고 자신을 위로하며 약식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세 번째 가서는 물을 찍어 세례를 주려고 하니 손이 나가질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스러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줄 알면서도 억지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마음이 괴로왔습니다.

그러던 중 구원받은 선교사 한 분이 저회들 주변에 있었는데 그분과 같이 어떤 기도원을 빌어 일주일간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를 하는 중 그 선교사가 어느 날 새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굉장히 괴롭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날 이삭을 바치는 경험을 한 번 하시면 신앙 생활에 굉장히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선교사는 저보고 침례를 받으라든지 하는 얘기는 한 번도 한 일이 없고 그 설교에서도 침례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그 실상을 얘기할 때에,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인줄 알면서도 침례를 안 받고 또 침례를 주지 않고 여전히 약식 세례를 주고 있는 그 이유가 뭐냐 하는 질문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먹고 살기 위해서 위선자 생활을 했었는데 그 생활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뜻을 그대로 순종해야 할 텐데 순종을 못하고 위선자의 생활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으면 장로교에서 쫓겨 날 것이기 때문에 머뭇머뭇하고 있었는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굉장히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또 다시 나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굶어 죽으면 죽겠습니다' 하고 굶어 죽기로 결심을 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고 나서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 장로 일곱 분이 계셨는데 당회를 열고 얘기를 했습니다. 비밀히 해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침례를 받았노라고 말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 중에 한 분이 노회에다 고발을 했습니다.  



두번째 경험


어느 날 소환장이 왔습니다. 종교 재판입니다. 루터가 재판 받듯이⋯. 재판이 있기 한 달쯤 전에 소환장을 받고 나니 마음이 떨리기 시작하는데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그 소환장을 받고는 성경을 읽어도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눈물만 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경북 노회가 열리기 6개월 전에 경북 사범대학에 다니는 어떤 여대생이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폐병이 3기가 되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오래 살면 괴로우니 자살하려고 가다가 저희 집을 찾아 왔답니다.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거기서 대화가 시작되어 6개월 만에, 제가 노회의 재판받기 이틀 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떤 말씀이 새롭게 하나 깨달아지면서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손들고 계시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겁이 나고 고통스럽고 하던 마음이 갑자기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내게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직장이 생긴 것도 아니고. 고소장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마음이 아주 조용해지면서 평화가 왔습니다. 구원 받았을 때보다는 기뻤고, 그 때는 완전한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경험인데. 그 경험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재판장에 나갔습니다. 저 한 사람 재판 받는 것을 보려고 4-5백 명의 목사, 장로가 모였더군요. 제가 구경거리가 된 겁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도 제 마음 속에 티끌만큼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이 마음 속에 승리가 온 것입니다.

고발하는 소리는 온갖 욕을 다하고 모함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장로는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같이 있던 분입니다.

어느 주일 오전 집회를 마치고 제직회가 열렸는데, 그 장로가 저보고 "우리 집에 심방을 좀 와 주십시오" 해요. 그 장로가 사업 자금이 모자라서 집을 팔고 전세로 들었는데 그 집이 어떤 돈 많은 과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고려파 교회를 다니는 과부인데 장로가 그 집으로 이사 가서 권유를 하여 두 주일째 우리 교회에 나왔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과부를 데리고 교회에 오는 중간에 싸움이 생겼답니다. 그 고려파 교인이 알고 "왜 우리 교회의 교인을 데리고 가느냐" 고 하여 길바닥에서 교인 쟁탈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집 식구가 둘인데 나뉘어졌답니다. 조카는 그 교회로 가고 과부는 우리 교회로 왔습니다. 그 장로가 하는 말이 "목사님이 심방을 자주자주 와 주셔서 그 과부가 완전히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되면 헌금도 많이 들어 올 겁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 제 마음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 그런 것 때문에 심방을 가진 않습니다. 장로님이 가셔서 완전히 우리 교회 교인이 된 다음에 그때 가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뒤틀려버린 것입니다. 그 전에는 나를 참 좋아하였는데 그 다음에 좀 이상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노회석상에서 많은 사람 앞에 나를 막 고발하고 거짓말을 섞어서 하는데 그렇게 욕하고 해도 이 마음 속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밉지도 않고, 속상하지도 않고. 겁나는 것도 없고, 다만 그 장로가 불쌍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이미 승리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의논하는 중에 어떤 분이 얘기하기를 본인의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 안되니 저에게 "피고로서 한 마디 하라" 고 하더군요. 제가 마음에 평안이 있기 전에는, 그 노회석상에 서면 장로교의 부패함을 큰 소리로 책망하고 노회를 떠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평화를 다시 한 번 얻고 난 이후에는 그런 것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제가 구원받은 간증부터 시작하여 제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조용히 이야기 했습니다. 그즈음 저는 설교의 권위자이고 목회자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그 전에는 저를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하니 전부 다 날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아는 목사를 만나면 길에 세워놓고 선 자리에서 2시간씩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미워할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기 오다가 나인 줄 알면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 정도로 제가 구원받고 열심 냈습니다. 어떤 손님이 무슨 용무로 집에 오든지 하면 그냥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 때 딸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손님 오면 아버지 일거리 생겼다고 할 정도로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 잡히기만 하면 놔두질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날 미워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니 왜 저렇게 되어버렸느냐고 미쳤다고 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하려면 간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구원받게 된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20분 쯤 하니 어떤 장로가 야단을 하더군요. ' '그런 소리 들으려고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니 침례 받은 것 취소하겠느냐, 못 하겠느냐. 그것만 이야기하라" 고 해요. 조용한 말로 내 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면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그곳을 물러 나왔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목사 면직이라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제가 아는 선교사 한 분이 따라 나오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권 목사 같은 분이 이 노회 안에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제발 그러지 말고 침례 취소하고 교회에 좀 있어달라고 간청을 해요. 아니라고 하고 제가 노회에서 잘렸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씀드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목이 잘릴 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때로 굶기도 하고, 심하게 고생도 했습니다. 제가 구원받은 후 넉 달만에 또 한 형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열 달 만에 저의 안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열 달 동안 안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마주 보고 앉기만 하면 "당신 지옥 가요" 하고 꼭 한 마디씩 합니다. 그것보면 저는 참 염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밥 먹다 말고 지옥 간다고 하면 "지옥 가면 내가 가지 당신이 가느냐" 고 하면서 악을 쓰곤 했습니다. 그 열 달 동안이란 세월이 우리 안 사람에게는 지옥이 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이 구원을 가르칠 수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로 있다가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 갓 받은 목사이니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지 모르고 공격만 했습니다. 자기도 구원 못 받은 줄 알고 찾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보았는데 고생 많이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일로 그렇게 고생 한다면 아마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을 하면 지옥 갈 것이니 자살은 할 수 없고 심히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구원받은 지 1년 반 만에 노회에서 떠나 따로 나왔습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역사


잠시 성경을 읽고 지나가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회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회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8 : 14-17)


여러분, 이 성경은 어느 날 성령 받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때 성령 받는 것과 여기에서 성령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 보세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과 성령 받았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6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령은 안 받았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못 받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성령 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말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둘입니다. 물론 구원받을 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은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받는 것으로 그것이 영혼 구원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 받았다는 말은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역사하는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아직 안 내렸다 이 말입니다.

17절, '이에 두 사도가 저회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여기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안수한다고 해서 영혼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 한 번 해 봅시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 태 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셔서 30살이 다 되실 때까지 아무것도 한 일이 없 습니다. 누구를 가르치지도 않으시고, 어떤 능력을 행하신 일도 없고, 병을 고친 일도 없고, 어떤 것을 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아무것도 못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 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고 했는데 그것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은 아직 못합니다. 만일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는 또 한 번의 경험이 있다고 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에 이미 대표적으로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교회가 세워지는데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도 교회가 시작 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됩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주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곳이고, 이 몸은 움직여서 머리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다리도, 눈도 모두가 몸입니다. 머리가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성령이 내리신 일이 없으면 교회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참된 교회 활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마리아 지역이 그러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회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19 : 1-7)


성경에서 세례라고 할 때에는 항상 침례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 에베소 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바울이 가서 전도를 했는데 바울이 성령받았느냐고 물으니까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고 하였고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하니까 요한의 회개 세례라고 하여 바울이 예수님을 또 전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어도 아직 역사하는 성령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수를 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내렸는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나타나면 성령이 내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교회가 참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구원받은 것 외에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으로 인도받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모릅니다.



인도하심 따라


제가 장로교회에서 제명되어 나오니 몇 십 명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 중에 제일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저를 따라 나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안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어떤 유치원을 하나 빌려서 교회를 따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그들에게 월급을 받을 것이 아니라 생기면 먹고 안 생기면 굶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살겠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도 일하면서 전도했듯이 나도 이제 평신도인데 돈 벌어 먹고 살아 가면서 주일에 설교하고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즈음 제가 아는 어떤 이북에서 온 과학자가 있었는데 과학 실험을 하다가 두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이디어는 굉장히 많은데 그를 도와서 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눈이 어둡다 보니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일이 되면, 조금 지나 다른 사람들이 다 배워 가지고 자기 것을 만들어 버리곤 해서 자기가 꼭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같이 사업을 하겠다고 저보고 자꾸 하자고 했습니다. 물주가 따로 있어서 그 두 사람이 하라고 해도 제가 없으면 믿지를 못 하니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자그마한 공장을 하나 했는데 제가 이 세상 태어난 이후에 그만큼 고생을 많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공장 안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공원들과 같이 일을 했는데 온 몸에 땀띠가 날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아침부터 조금도 못 먹고 굶어가면서 1년 동안 했는데 몽땅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전도하는 일로 전념하게 되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주일에는 수십명 씩 모였습니다.



방언이란?


어느 날 성경 공부를 하는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는 한 구절을 읽어 놓고 유형제라는 분이 설교를 했습니다. 방 안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데 손가락으로 탁탁 꼽 으면서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 니다. 대부분 구원받은 사람이 앉아 있었으니 "예, 예" 하고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성령 받는 것이 권능 받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 다음에 "권능 받았습니까?" 하고 한 사람씩 조금 전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느냐고 했을 때는 "예예" 하던 분들이 권능을 받았느냐고 하니 한 분도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안 사람 앞에 와서 "권능 받았습니까?" 하니 "예,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가 권능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것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성경 이야기를 쭉 하는데 우리 안사람이 일어나서 "잠깐만 오늘 저녁에 무엇을 알았는데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는 구원받고 세월이 좀 지났는데 왜 전도를 해도 구원받는 사람이 생기지 않고 전도가 안 되는지 참 지금까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오늘 저녁에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주님이 전도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도 일종의 깨달음입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이야기를 계속 하다가 갑자기 우리 안사람이 "지금 나의 창자가 뒤틀려 올라오는데 답답해 죽겠다"고 하더니만 사람이 죽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던 사람이 손바닥을 탁 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순간에 "주여" 라고 하는데 그만 입이 열려 버리면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방언입니다. 저는 그 때까지 방언이 라는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방언이 일어난 즉시 거기에 구원 안 받은 청년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얼굴이 새파래졌습니다. 그 다음 주일 다른 장소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설교가 끝난 후 또 다시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교회라는 곳을 처음으로 나온 60세 되는 노인이 그 방언하는 소리를 듣더니 거꾸러져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도 통곡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다섯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통곡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거기서 상담을 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인천에 가서도 얼마 동안 있었는데, 저희가 인천에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빚도 내고 해서 지은 집이라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방 한 칸을 새로 주었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줄근하고 난 다음에 안사람은 항상 집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상담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상담을 하곤 했었는데, 상담을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 날은 비가 막 쏟아지는데 안 사람이 혼자서 막 방언을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두 사람이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상담을 받으러 오게 된 경위가 이러합니다. 옆 방에 세 들어 있는 여인이 그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너무 무서워서 방 안에 그냥 있을 수가 없어 골목 밖으로 나갔는데, 두 사람이 우산을 받쳐들고 "여기 목사님 집이 어딥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그 분들은 우리 집을 찾으려고 비를 맞으면서 한시간을 헤맸답니다. 그래서 그 도망가던 사람이 가르쳐 주어 두 사람이 그날 와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방언이 아니었으면 그 두 사람은 그 날 구원받지 못하고 그냥 갔을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령 안에서의 참된 방언의 역할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절대적으로 사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하나님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고린도전서 14 : 22)


보십시오. 방언이 왜 일어나는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입 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성경대로 일어나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 방언의 원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특별히 방언이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으로 인해 방언이 일어나는데 교회가 성장해 버리면 방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몸의 비밀과 방언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 : 4-11)


그러면 아홉 가지나 되는 이 은사가 왜 일어납니까?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개인적으로 방언을 하는 것이 신령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을 보십시오. 머리가 있고, 그 다음에 이목구비가 있고. 오장육부가 있고, 사지가 있어 이 모든 것이 합쳐서 한 몸이라고 말하는데, 눈은 보는 것읕 하고, 귀는 듣는 것을 하고, 입은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을 하고. 또 손은 만지는 것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몸의 각 기능이 모두 개인의 것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입을 아무리 벌리고 있어도 손이 집어 넣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한 몸이 되었고, 또 성령을 마시게 하셨으므로 한 몸에 성령이 내렸습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전서 12 : 15)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은 혼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못합니까? 손가락이 손에서 잘려 나가 버리면 힘을 전혀 못 씁니다. 이 손가락이 이 몸에 붙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고 붙어 있지 아니하고 떨어져 버리면 생명이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으면 이 몸에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이 몸의 지체에서 떨어져 버리면 그것이 곧 죽은 것입니다.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신앙 생활이 완 전히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망상입니다. 성령은 한 분으로서 몸 안에 있는 신경조직이 그 성령의 역사인데, 이 신경조직을 떠 나서는 신앙 생활을 절대로 못합니다. 이 원리를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28절부터 또 봅시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율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 : 28-29)

여기 은사 가운데 사도와 선지자 혹은 교사가 있는데, 지금은 사도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와 선지자라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를 위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은사가 주어진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교회를 끌고 갑니다.


그 다음 30절,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 : 30)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으면 성령 못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도직과 방언은 다르나, 모두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 방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느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2 : 15-21)


모든 지체 중 손이 몸 전체를 대표해서 만지는 은사를 받았고, 두 다리는 걷는 은사를 받은 것처럼 방언도 하나의 은사입니다. 눈도 손처럼 되어 있고 발도 손처럼 되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과 같이 다 방언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진짜 한 교회이면 교회를 대표해서 한 두 사람이 하는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것을 합니다. 입을 열어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그 다음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 : 31)


그러므로 방언이나 병을 고치는 것은 초보적인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은사가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처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기름 부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릴 때에는 방언이 나타나고, 병 고치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교회로서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상수단으로 나타내시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라나서 더욱 큰 은사가 나타나면 방언이 끝나 버립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 : 1-3) 


방언을 아무리 해도, 성경을 아무리 잘 가르쳐도. 지식이 있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보통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 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랑인지는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사랑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간에만 있는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주신 참 사랑이 나타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듯이, 화가 나더라도 참습니다. 처음에 구원 갓 받은 사람은 이것이 잘 안 됩니다. 화나면 화를 내고, 욕도 하고 싶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이 점점 진보하게 되면 화도 안 내게 되고, 남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인정 있게 대해 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아는데 그것은 냄새 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인정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 : 4-7)


보십시오. 믿음이 자라면 이 사랑이 나타날 때에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진정한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 님이 가장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짝,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라면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순진하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것처럼 구원받고 나서는 아직 갓난 아기입니다. 아직 믿음이 자라나지 않고 어린 아이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없고 자기하고 안 맞으면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자기 유익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좋고 업어 주는 것이 좋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런 면 저런 면에서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이 어렵게 되면 그러한 과정을 잘 이겨 내지 못하여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8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방언도 그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라고 했습니다.

갓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는 구원받은 사람을 보면 반갑지 않습니까? 그래도 조금 있으면, 여러분이 구원받은 곳이지만,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라고 하지만 마음에 안 맞아 싫어하고 떨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가정에 부모가 있고 자녀들이 여러 남매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싸운다고 떨어집니까? 어떤 이유로라도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말씀과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 : 8-11)


방언은 어린 아이의 말입니다. 교회가 어린 아이 시절에 비상 수단으로써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음성인데 그 어린 아이의 말은 교회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끝나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이 시작될 무렵,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제가 항상 상담을 많이 했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깨닫게 되면 이상하게도 안사람이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면 그 방언이 끝나면서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약 6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6년 후 딱 끝 났습니다.

그러면 그런 방언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사람이 하도 방언 하기가 싫어서 하지 않으니 온 몸이 막 저려 오면서 굉장히 고통이 와서 하나님 앞에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면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다시 방언을 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방언이 그쳤습니다.

그것이 진짜 방언입니다. 그 방언은 개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교회에게 주신 것으로서 성령으로 시작이 되었으면 반드시 성령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바울이 안수하니까 방언도 하고 세례도 받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모임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병 고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여러 번 저희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는데 어떤 자매 한 사람이 자기 집은 믿지 않는 집인데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가면서 막 앓고 있으니까 부모들이 무당을 불러 서 굿을 한다고 무당 부르러 간 사이에 도망을 왔습니다. 낮에 성경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인데 그 자매가 오자마자 세 사람이 손을 얹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열이 내리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왜 있었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 것을 가지고 돈을 번다고 하면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어린 시절에 되었던 일로 교회가 성장되어 온 과정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교회의 원리


그 다음 교회가 성장하면서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성경을 읽고 계속 교제가 되어 왔습니다만 성도의 교제를 알기 시작하면 그것이 사랑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성장입니다.

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어 식구가 많았는데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신문지 둥 종이 쪽지를 모두 모아다 팔아 두부 두 모를 샀습니다. 그걸 쓱쓱 썰어서 아이들이 먹고 학교에 가고 저는 굶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공납금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 말을 하지 않고 견디다 못해 겨우 입을 열어서 "공납금 주세요" 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이겨 갈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으로는 그 어려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마 인간의 순전한 육신의 마음 같으면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큰 시련도 그리 어렵지 않게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낼 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이 모임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로서는 현재와 같은 이런 모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이런 역사가 일어날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